전두환 정권에서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책임자들도 이런 고민을 했음이 틀림없다. 김대중 정부가 통합론자의 손을 들어준 것은 통합론의 정책적 목표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합론 선택이 정권에 미칠 정치적 여파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또 여기에는 현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합론자들의 로비도 요인이 됐다.
20년 동안 계속된 의료보험 논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통합이 되기는 했으나 조합주의 시대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현재 한·양방 의료일원화, 의약분업, 한약 분쟁 등 의료보험의 구조에 깊은 영향을 끼칠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 논쟁은 의료보험 체계와 상관없이 진행돼왔다. 그런데 작년부터 의약분업 논쟁이 뜨거워지자 보건의료 정책과 관련된 논자들이 무대를 의료보험에서 의약분업 쪽으로 바꾸고 의약분업이 의료보험 재정에 끼칠 영향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의료보험 논쟁에서 사용된 전략과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다 다를까 벌써 ‘예측’이 난무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의약분업이 실시되더라도 의료비가 감소하므로 보험재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반면, 어떤 전문가들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약 1조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전혀 다른 ‘예측’을 내놓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통합론자들은 정부와 여당에 1조2000억원을 지역의료보험 재정에 지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의약분업 논쟁은 의료보험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재연하고 있는 셈이다. 통합론자들이 조합론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대결 선수만 바뀐 셈이다.
한·양방 의료일원화, 의약분업, 한약 분쟁은 의사, 한의사, 약사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의료보험 논쟁과 성격이 다르다. 그동안 의사단체는 의료보험 논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보험진료비 체불만 해결된다면 나머지 논쟁에 대해서는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의사 단체도 한방진료 중 침과 한방 농축제재 등은 의료보험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더라도 진료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의료보험 논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사들은 사정이 달랐다. 1977년 의료보험이 부분적으로 도입되면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는 “보험환자부터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노력하자”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 후 대한의사협회가 합의내용을 무효화한다는 공식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의료보험 체계 속에서 의약분업을 실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하지만, 만약 이때 의약분업을 의료보험 제도 속으로 편입해 실시했더라면, 의료보험의 점진적 확대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년간 의료보험 논쟁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1980년대에 조금만 ‘보험 내 분업’에 바쳤더라면 의약분업은 훨씬 순조롭게 발전해왔을 것이다.
의약분업 실시를 몇 개월 앞두고 의사단체는 느닷없이 시범사업을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단체의 이 제안은 의약분업 역사를 되돌아보면 명분이 없다. 이미 1984년 약사들의 강경한 요구로 목포시에서 8개월간 시범 실시를 하다 실패로 단정한 의사단체의 반대로 중단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약사단체는 계속 실시하자고 주장했지만 정부도 의사단체의 의견을 따랐다. 이런 의사단체가 이제 와서 다시 시범사업을 해보자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도 의약분업 실시를 몇 개월 앞두고 말이다. 1980년대 중반 의약분업을 정착시킬 기회는 이렇게 사라졌다.
1989년 7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약사단체는 다시 의약분업을 요구했다. 정부, 의사단체, 약사단체가 모여 밀고당기는 협상에 들어갔지만 조정안은 또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결렬됐다. 대신 정부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약국의 조제투약을 보험에 적용하는 ‘약국 의료보험’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발표했다. 약사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의사들은 반대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1980년대 약사들은 보건의료 정책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의약분업 실시를 위해 외롭게 싸웠다. 의료보험 논쟁의 논객들은 조합론과 통합론 싸움에 정신이 팔려 의약분업을 의료보험에 접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93년 시작된 한약 분쟁으로 인해 약사들은 의약분업 추진에 더욱 매달리게 됐다. 한약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 개정된 1994년의 약사법은 1999년 7월부터 의약분업을 실시한다고 명기했지만, 막상 1999년이 되자,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는 또 준비 부족이라는 이유로 정부에 연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단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실련, 참여연대, YMCA 등이 의약분업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의료 정책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시민단체의 강력한 요구에 부담을 느낀 정부와 여당은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가 2개월 안에 합의한다는 것을 전제 1년 연기를 수용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의료보험 논쟁처럼, 의약분업도 국민 건강을 위해 정책적 목표를 구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의약분업을 주장하는 쪽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의사들의 진료행위가 바뀌며 소비자의 의료 이용 행태도 하루 아침에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진료비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의료제도를 바꾸면 관행적으로 굳어진 의술과 소비자의 의식까지 단시일 내에 바뀔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사실 이 점이 의약분업에 큰 걸림돌이다.
드링크제인 박카스가 약 판매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약의 소비행태 면에서 후진성을 보이는 한국 현실에서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국민들은 당장 불편하다고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또 우리 국민들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주사 맞고 약 받는 것을 당연시해왔는데, 7월1일부터 환자들이 의사 진료를 받고 나서 처방전 한 장 달랑 갖고 의료기관 문을 나서려면 얼마나 허탈감을 느낄 것인가.
최근 대한소아과학회의 의뢰로 여론 조사기관인 한국 갤럽이 의약분업에 관해 시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의약분업에 대해 찬성(27.3%)보다 반대(57.1%)가 많았으며, 반대 이유로 다수(전체 반대의 79.6%)가 불편함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의약분업 제도가 넘어야 할 장벽은 의사와 약사 사이의 권익다툼이 아니라 바로 국민들의 관행인 셈이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안일한 홍보 정책으로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몇몇 시민단체가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의약분업에 대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지만, 이 정도 노력으로 전 국민의 의료 이용 행태를 하루 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다.
의약(醫藥)의 전통과 서구화
의료보험 논쟁과 의약분업 논쟁에 가담했던 논자들도 한·양방 의료 일원화 논쟁과 한약 분쟁에 대해서는 머뭇거린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두 사안이 앞의 두 논쟁과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서구사회에서 발달한 제도를 한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라면, 후자는 우리 사회처럼 전통의료와 서구의료가 공존하는 나라에서나 생길 법한 논쟁이다.
우리 사회는 개화기에 서양의학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됐고 일제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전통의학이 억압을 받았다. 광복 이후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한의학은 1970년대 경제성장과 때를 맞추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방진료 덕분에 늘어난 수입이 의료 일원화와 한약 분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특히 경제적 여유로 보약을 먹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전국 곳곳에 휘황찬란한 네온 간판을 단 한방 병·의원이 들어서는 현상을 보고 의사와 약사들이 ‘배가 아팠’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논쟁은 광복 이후 양방의료와 약사업무에 비해 국가적 지원과 정책적 관심을 끌지 못했던 한방의료가 복원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쪽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려는 집단 사이의 대립상황으로 치달았다. 의사, 한의사, 약사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정책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진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통틀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만큼 우리나라 의약사(醫藥史)에서 민중이 의(醫)와 약(藥)의 주체가 된 시기가 없었고, 향약(鄕藥)이 나라 경제에 지대하게 공헌했던 시기도 없었다.
12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향약에 관한 여러 서적이 쏟아져 나왔는데, ‘향약구급방’과 같은 서적은 당시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약초로 질병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자라난 모든 약용물질의 총칭인 향약은 민중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향약의 대중화는 의약을 사회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이 사용하는 보약과 달리, 당시 민중은 약초가 지닌 자연 치유력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때는 민중이 스스로 의료의 사회화를 실천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다.
이와 같이 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의약의 상품화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환자와 소비자들이 의약을 통해 몸의 주체로 거듭나게끔 관행적인 기존 의약행위를 바꿔가야 할 것이다.
또한 국내 시장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일 게 아니라, 대체의학과 보완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런 당위론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 논쟁에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의사, 한의사, 약사들에게 감히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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