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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선 향기가 난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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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울타리

서울 구기동 북한산 등산로 초입에는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수수한 4층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이곳은 국어국문학자인 숙명여대 이인복(李仁福·64) 교수와 서울대 심재기(沈在箕·63·국립국어연구원장) 교수 부부가 미혼모나 가정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을 위한 쉼터로 마련한 공간이다. 1989년 이교수가 이 나자렛성가원을 설립한 뒤 노부부는 성가원에 함께 기거하며 고단한 삶에 지친 여성들을 보듬고 위로하면서 이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갈 힘을 북돋워주고 있다.

성가원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아담한 카페 ‘르샤’ 역시 쉼터를 찾는 여성들의 복지와 재활을 위해 그들 스스로 운영하고 종사하는 곳이라 했다.

“1989년 11월18일, 제가 대한민국 문학상(평론부문)을 받았어요. 그 상금으로 무언가 비개인적인, 공익을 추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0여 년 전부터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돌보던 일을 사회에 공개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영하는 기구를 만들고 싶어서 성가원을 만들게 됐어요.”





모친의 유산, 남편의 외조

이인복 교수의 말대로 이들 부부가 상처 입은 여성들을 거둬온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리면서 안락하게 살 수도 있었던 이들은 소외된 여성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부의 집에는 의지할 데 없는 딱한 여성들이 늘상 예닐곱 명씩 머물게 됐다. 특히 이교수는 6·25전쟁 직후 고생하면서 남을 도우며 살다 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이런 ‘나눔’ 정신 실천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열네 살 때 전쟁이 터져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납북되셨고, 오빠와 남동생도 실종됐습니다. 병든 어머니와 다섯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졌죠. ‘월북자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사람들은 신세가 몹시 고단하던 때라 9·28 서울수복 직후 집을 떠나 부평 백마장 미군부대 옆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습니다.

생계가 막막했지만 학교에 가고 싶어서 연백성모원이라는 천주교회 고아원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천 박문여고를 졸업한 뒤 동생들을 데리고 고아원에서 나왔어요. 숙명여대에 다닐 때는 부평 기지촌 근처에 방을 얻어 가정교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매일 저 몰래 밥을 퍼다 인근 매춘여성들에게 먹이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직업을 바꾸게 하거나 신앙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 가난한 ‘가정교사’가 벌어오는 눈물 젖은 밥을 말이죠. 어머니께선 당신이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로 한때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산 것을 부끄럽게 여기셨어요. 그런 어머니로부터 평생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방향을 배운 셈이지요.”

이교수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으로 봉사와 베푸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그를 곁에서 격려하며 도운 이는 남편 심재기 교수였다. 두 사람은 인천 창영초등학교 ‘6학년 6반’ 동급생. 심교수는 고아원으로 이교수를 찾아와 “쓰러지지 말라”고 격려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고아원 출신이라고 멸시할지 모르니 나한테 시집 와라”고 말해준 친구를, 이교수는 대학 졸업 후 평생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결혼 후 아이 셋을 낳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해서 박사과정에 진학케 했고, 어려운 여성들을 돕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준 것, 그게 외조라니 가당치 않아요.”

심재기 교수는 한사코 찬사를 사양했다. 하지만 이교수는 “친척들, 직장 동료들, 심지어 교회 봉사자들에게서도 저의 특별한 소명을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는 커다란 아픔이었어요. 그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일하게 지지해준 이가 이 사람입니다. 제가 일하는 것을 보고, 전화 받는 것을 듣고, 제 글을 읽고, 제 강연을 들으며 지금도 공감하고 눈물을 흘려주는 소중한 격려자이자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람이지요”라고 했다.

혼수비용으로 장애인 집 지어

이들 부부는 네 딸을 키운 과정에서도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부부는 평소 딸들에게 “미혼모와 매춘여성, 뇌성마비 환자나 지체장애인을 돌보며 그들을 돕는다고 여기지 마라. 나 대신 그들이 그리 됐다고 알고,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며 헌신해라”며 검약과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쳤다.

특히 딸들을 결혼시키며 사돈댁에 양해를 얻어 혼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 큰딸의 혼수비용은 뇌성마비 환자의 집을 짓는 데, 둘째딸의 혼수비용은 장애인의 집을 짓는 데, 셋째딸의 혼수비용은 나자렛성가원에 바쳤다. 막내딸의 혼수비용도 성당 건축기금으로 내놓고, 피로연을 생략한 대신 부부의 수상집(‘막내딸의 혼인날’)과 이교수의 자전적 고백록을 하객들에게 돌렸다.

더욱이 부부가 회갑을 맞던 1997년, 네 딸과 네 사위는 부모의 재산을 성가원에 바치는 일에 동의한다는 재산 포기각서를 날인해 회갑선물로 드렸다.

“막내딸 우찬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하루는 새벽에 상담전화가 걸려왔는데, 늘 잠이 모자라던 제가 무심코 ‘낮에 전화하시지 왜 이 밤중에…’라고 했던가봐요. 그랬더니 자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엄마, 그렇게 전화받으실 거면 성가원 운영하지 마세요’ 하면서 절 나무라는 겁니다. 전화를 건 쪽에서는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 그 시간에 했을 텐데, 그걸 몰라준다면 성가원을 운영할 자격이 없다는 거였죠.”

‘미혼모들의 어머니’인 이교수는 어려서부터 속이 깊은 막내딸을 여간 대견해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우찬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소외여성들을 위한 봉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 가정문제상담소에서 미혼모와 폭력에 시달리는 교포여성들을 돌봤으며, 남편도 같은 전공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아이들이 유학 가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해 부모에게 학비 부담을 주지 않았어요. 막내는 지금 일리노이대학에서 사회복지학 박사논문을 준비중인데 그 마무리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며칠간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여러 시설을 둘러보고는 성가원에 부족한 부분을 이것저것 지적해줬어요. 딸이 아니라 엄한 감독관이에요.”

이교수는 자신에게 장학금을 줘 학교를 마칠 수 있게 해준 모교에 은혜를 갚기 위해 매년 인천 박문여고와 숙명여대에 장학금을 보낸다. 또한 자신과 남편의 월급, 강연료, 인세 등은 고스란히 나자렛성가원의 운영자금으로 들어간다. 카페 르샤의 수익금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몫이고, 성가원이 직영하는 출판사의 수익금도 전국 교도소 재소자들의 서신 상담에 응하면서 책을 보내주는 데 쓰인다.

퇴직 후 직업은 ‘성가의숙’ 수위

부부는 요즘 새로운 구상을 현실화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정년퇴직 후 두 사람은 경기도 포천에 사둔 1500여 평의 땅에 ‘성가의숙’(가칭)이라는 교육기관 겸 쉼터를 세울 예정이다. 부부의 퇴직금으로 주추를 놓을 것이라 한다. 성가원을 운영하면서 2개월여의 짧은 보호기간으로는 정상적인 삶의 길을 비껴간 이들을 온전히 바로잡아주기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좀더 장기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모색한 것.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조차 손을 든 부랑 가출 청소년들이나 미혼모들이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이들 부부와 뜻을 같이해 설립기금에 기여하는 퇴직교수나 봉사자들이 쾌적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노후를 보내며 교육과 봉사에 참여하는 생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교수의 말.

“심교수는 정년퇴직 후엔 성가의숙의 수위이자 만년 교사가 되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성가의숙을 설립하는 데 많은 분들이 저희와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비싼 돈을 들여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대신 그것과 다를 게 없는 생활여건이 보장되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가르치고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생명 나눔의 기회를 누리며 살자는 것이죠.”

부부는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사람의 인생에서 ‘장수(長壽)’란 물리적 신체가 몇 년을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다”며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아름다운 추억,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나이를 합한 것이 내 나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진정한 나눔의 기쁨과 그 의미를 체득한 분들이었다.

김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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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khmzip@donga.com 이형삼 hans@donga.com 김영신·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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