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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흥남대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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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마친 그는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끝낼 즈음 광복을 맞았다. 그 후 고향인 함흥으로 의사생활을 하러 갔는데,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박해가 너무 심해 의업을 열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던 봉학은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윌리엄스 부인(1907년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운 분)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의 버지니아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임상병리학을 공부하고, 195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그날부터 그는 피범벅이 된 채로 병원으로 밀려드는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사흘째(6월27일) 되는 날 자정 무렵, 문창모 세브란스 병원장이 전직원을 모아 놓고 “인민군 전차가 시청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각자가 알아서 활로(活路)를 모색하라”고 언명했다. 이때서야 현박사는 ‘큰일났구나. 나는 월남자인데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기독교인이니, 인민군에 잡히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병원 직원 두 명과 함께 피신을 결심했다.

구멍난 조각배로 한강 건너

그가 손쉽게 피신을 결심할 수 있었던 데는 서울 신당동에 있던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여동생만 있고 나머지 형제들은 군이나 미국에 가 있어, 신경 쓸 가족이 적었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현박사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알아서 몸을 피할 것으로 믿고 피신을 결심했는데, 얼마 걷지 않아 그는 “꽝” 하는 폭음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울 시내를 향해 거꾸로 올라오는 피란민들을 통해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한강으로 나간 현박사 일행은 강변을 따라 서빙고 쪽으로 걷다가 구멍난 나룻배 한 척을 발견했다. 세 사람은 ‘한 사람이 구멍에 앉아 엉덩이로 물을 막고, 한 사람은 물을 퍼내며, 또 한 사람은 손으로 노를 저어 건너가 보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그 방법으로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수원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세브란스 동기생인 주정빈을 만났다. 주정빈은 소령 계급장을 단 육군병원장 자격으로, 경기도립병원에 야전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봉학은 친구를 도와줄 요량으로 이 병원에 남아 부상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약품이 너무 부족했다. 소독약과 마취약이 없어 절단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오면 끓는 물로 톱날을 소독하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절단하는 수술을 감행하곤 했다. 한마디로 병원은 생지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군병원도 인민군의 공세 때문에 대전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대구로 후퇴했는데, 봉학도 이 병원을 따라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그는 2대 국회의원 황성수씨(목사)를 만났다. 황의원은 “내가 신성모 국방장관을 잘 안다. 닥터 현의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봉학은 일본에 주둔하다 부산항을 거쳐 들어와 막 마산에 주둔한 ‘미 25사단의 사단장(Kean 소장) 통역으로 일하라’는 국방장관의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봉학은 마산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을 인사차 방문했다. 그리고 해병대의 백남표 소령이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미 25사단 사령부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소령은 미 25사단 사령부를 지나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진동리의 한국 해병대 부대 앞에서 지프를 세웠다. 백소령은 “당신 같은 사람은 미군부대가 아니라 한국 해병대에서 일해야 한다”며 껄껄 웃었다. 이것이 현박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제는 통일을”

그날 이후 현박사는 해병대 문관이 되었다. 그는 한국 해병대가 무기 등을 얻기 위해 미 25사단을 찾아갈 때 통역을 담당했다. 문관으로 봉학은 진동리 전투와 통영전투에 참여했다. 이 시기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일본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주축으로 10군단을 구성했다. 이때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돼 미군과 함께 인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서울을 수복한 후 그는 한국 해병대를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역사적인 흥남 대철수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생살여탈권을 잘 활용해 흥남에서 9만8000여 명을 살려냈다면, 그의 가슴에는 자부심이 그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누구도 그의 공적에 주목하지 않았듯이 그 또한 수많은 사람을 살려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살아난 9만8000여 명이 아니라, 함흥에서 기차 타기를 거부한 친구 박재인과 흥남항에서 끝내 배에 타지 못한 2000여 명의 고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 그가 흥남철수작전으로 10여만명을 구한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로 인해 10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는 뜻이 된다. 이산가족들의 고통이 실향민인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최근 세 차례나 이루졌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본 그는 “상봉이 아니라, 이제는 이산가족들이 한데 살 수 있어야 한다. 남북이 화합하고 통일을 이루는 날이 하루빨리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아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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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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