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9일 빈소를 찾은 배씨의 어머니 이영순씨를 배씨의 동료들이 달래고 있다.
노조에게도 이 시기는 황금시대였다. 1987년 설립돼 1990년대 초반까지 강성 조직으로 이름을 날린 ‘마창노련’의 핵심이었던 한중 노조는 다른 지역 파업에까지 출장지원을 나갈 정도로 탄탄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이는 줄줄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역대 사장들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
두산중공업 직원들이 가장 ‘그리워’ 한다는 박운서 전 사장(현 데이콤 회장)은 1996년 3월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노조 사무실로 달려가 협력을 요청했고, 직원이 상을 당하면 사장이 직접 찾아가는 ‘근경(근로자와 경영자를 줄여 박사장이 부르던 용어) 동반자 정책’을 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끝난 후에는 업무방해 혐의로 노조 집행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고소도 조용히 취하했다. 이는 그 때까지의 관행에 가까웠다. 이수영 홍보실 부장의 설명이다.
“노조는 1987년 설립 후 17년간 9차례, 총 280일간 파업을 강행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죠. 직원들도 파업중에 못 받은 임금은 나중에 야근이나 특근을 통해 보상받게 돼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노조활동이나 파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한 엔지니어는 “그때는 회사가 나서서 직원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켰다”고 말한다.
“어차피 매출액 규모가 워낙 컸던 터라 노조 요구대로 임금 몇 % 올려준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었거든요. 공기업의 방만한 운영 덕분이기도 했겠죠.
중공업은 ‘기술장사’입니다. 회사도 기술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습니다. 임금도 무척 높았지만, 단순히 월급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회사 본관 유리문에 대통령 휘장인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는 회사에 다닌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IMF 위기가 닥쳐 국내발전소 건설물량 주문이 취소되고 해외물량 수주에도 비상이 걸리자, ‘소 270마리와 청주 1만2600병을 명절 선물로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잔치는 끝이 났다. 한전 설비 공급도 국제경쟁입찰로 바뀌었다. 텃밭이 사라진 셈이었다.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확정했고, ‘적자기업을 누가 사겠느냐’는 논리를 들어 ‘알짜 기업’ 한중을 첫 대상으로 삼았다. 이듬해 노조는 48일간의 파업을 통해 민영화 저지를 시도했지만 정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대신 ‘분할매각, 해외매각, 4대재벌에 매각은 않는다’는 약속만을 받아냈다. 이후 민영화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12월13일 자회사를 포함해 5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중공업은 3057억원을 적어낸 두산 컨소시엄에 낙찰됐다.
‘블랙리스트’와 ‘기무사’
‘나는 매일같이 고민을 해본다. 두산의 노조 말살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 배달호씨의 유서 중에서
“아 예, 파업에 참여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그런 증언은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가급적 구체적인 자료가 있었으면 합니다. 문서 같은 것 말입니다.”
촛불시위를 지켜보고 난 뒤 들어선 노조 사무실에선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핸드폰이 어찌나 많이 걸려오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며 박유호 대책위 상황실장이 불평 아닌 불평을 터뜨렸다. 대책위가 1월27일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공개한 이후 걸려오는 ‘제보전화’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전화가 갑자기 많아진다는 설명이었다.
대책위가 제시했던 이 블랙리스트에는 ‘근태현황’ ‘주간선무활동계획보고’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우선 ‘근태현황’에는 조합원 개인에 대한 전담 관리자 이름, 노조경력, 참여도 등과 함께 ‘관찰’ ‘주기관리’ ‘지속관리’ 등 등급별 해결책이 기록돼 있고, 2002년 9월 날짜로 돼 있는 ‘주간선무활동계획보고’에는 ‘선무자’가 ‘피선무자’를 만난 일시 및 장소, ‘회사방침전달’ 등의 활동내용과 ‘파업엔 가담치 않겠다’ 등의 결과가 정리돼 있다. 회사의 노조활동 통제를 입증하는 자료라는 것이 대책위 측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