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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과의 전쟁 벌여온‘백신의 황제’

WHO 신임 사무총장 이종욱

결핵과의 전쟁 벌여온‘백신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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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사무총장은 총회가 아닌 집행이사회(32개국)에서 선출한다. 총회는 이 결과를 그대로 인준하는 것이 관례다. 외교통상부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지명도가 너무 낮아 승산이 희박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박람회 여수 유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복지부는 조금 달랐다. 이박사는 5년 전에도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하려다 노르웨이 수상 출신인 브룬틀란트가 너무 버거운 상대여서 포기했었다. 다행인 점은 남북한이 모두 집행이사회 멤버라는 것이었다. 집행이사국은 WHO의 6개 지역별로 정해진다. 원래 순번대로 서태평양 지역의 집행이사국이 될 베트남은 한국의 설득으로 자리를 양보했다. 북한은 서남아시아 지역의 집행이사국이었다.

WHO를 통해 남북한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협력을 늘리기 위해 한국이 북한과 함께 집행이사국이 됐는데 이것이 선거에서 엄청나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32표 중 남북한의 2표를 그냥 먹고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7차까지 가는 투표 결과가 17[:]15로 끝나 남북한의 2표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입증됐다.

김성호 복지부장관은 지난해 10월 김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이박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보고했고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 지난해 12월3일 국제박람회 유치에 실패하자 외교부 역시 총력지원 체제로 돌아섰다. 국내 보건의료계 인사들은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비를 모금했다.

이박사는 투표권이 있는 32개국 중 20여 개국을 직접 다녔다. 지난해 11월 30일 이집트 방문을 시작으로 미얀마 몰디브 필리핀 일본 중국 미국 그레나다 카자흐스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리투아니아 등 전대륙을 돌아다녔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는 짐이 분실돼 현지 한국 대사가 준 속옷과 양말을 입고 다녔다.



김성호 장관은 미얀마 몰디브 러시아 중국 일본 필리핀 브라질을, 신언항(申彦恒) 복지부 차관은 그레나다와 보고타를, 문경태 기획관리실장은 가봉 가나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를 돌았다. 정부는 가봉의 집행이사와 기니아의 보건부 차관을 국내에 초청해 지지를 호소했다.

민간의 선거운동도 큰 힘이 됐다.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관계자는 그 나라 대표가 투표를 위해 출국하자 자신도 선거기간 중 제네바에 머물며 지원했다.

예비선거에서 이변 연출

이박사가 1월21일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예비선거에 나섰을 때 세계 언론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해 미국 상하원 의원 54명이 이박사에 대한 지지서한을 미국 국무부와 보건부에 보냈고 WHO 내부에서는 숨은 일꾼으로 꼽혔지만 국제적으로는 무명의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벨기에 출신의 피터 피오트 유엔 에이즈퇴치계획 사무국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수상 또는 장관 직책을 가지지 않은 후보였다.

그러나 예비선거의 뚜껑이 열리고 그가 두 차례의 투표에서 1, 2위를 차지하자 각국 대표단이 깜짝 놀랐다. 1월28일의 최종 선거는 첫 투표에서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으면 최저 득표자 1명을 탈락시키고 나머지 후보를 대상으로 과반수가 나올 때까지 계속 투표하는 교황선출 방식. 이에 따라 투표권을 가진 32개 국가를 대상으로 물밑 교섭, 특히 1차 투표 이후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합종연횡이 활발했다. 이박사는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17:15로 피오트 후보를 누르고 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선거가 끝난 뒤 각국의 대표들이 한국 관계자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재미 있는 사실은 끝까지 한국을 지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몇몇 집행이사국이 “마지막 7차 투표에서 우리가 이박사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고 밝혔다는 것. 이박사는 “스웨덴 대표만 유일하게 ‘사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같이 일을 잘해보자’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당선 요인은 이박사가 오랜 기간 WHO에서 근무하면서 보여준 능력,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 민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박사는 “저는 상품이고 여러분(정부 관계자들)이 그걸 팔아주셨다”고 말했다.

좋은 상품(자질과 능력)과 판촉 능력(외교력과 경제력),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부족했어도 유엔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의 수장에 한국인이 선출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WHO 개혁이 공약의 핵심

그는 “WHO를 이끄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유엔 산하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인 만큼 책임이 무겁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정식 취임(7월) 전까지 계획을 세우고 여러 사람과 많이 상의할 작정이다.

그는 선거기간 중 WHO의 개혁, 특히 분권화와 투명성을 공약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인력과 예산의 75%를 본부가 아닌 6개 지역에 나눠주겠다는 것. 선거가 끝나자마자 지역 사무처 직원들과 하루 종일 회의를 가진 이유가 이해됐다.

그는 북한 문제에도 많은 신경을 쓸 것으로 보인다. 현재 WHO와 북한이 의료협력 프로그램을 갖고 기초의약품 생산시설, 혈액관리, 수액 제조시설 건설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기초의약품 생산시설을 만들기 위해 1000만달러 모금목표를 세웠지만 모금액이 부족한 상태. 북한에 대해서만 지원을 파격적으로 늘리기는 어렵겠지만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보건의료분야의 남북한 협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박사는 당선 축하 만찬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선거운동 과정에 여러 비화가 있는데 앞으로 총회 인준이 남아 있습니다. 듣고 아는 얘기라도 절제해서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비화는 (다 밝히면) 도움이 안 됩니다. 앞으로 다른 선거에도 도움이 안 되니 잘 부탁드립니다.”

기자는 그가 5월 총회뿐 아니라 5년 후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보건대학원 학장인 배리 블룸 박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박사는 자신의 내면을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일을 추진하기 위한 개인적 야심을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유엔 최대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그가 올 7월부터 WHO를 5년간 성공적으로 이끌고 연임에 성공할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신동아 200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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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상근 동아일보 사회2부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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