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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가 본 세종의 학문·언어정책

“이 땅의 사대(事大) 지식인들아, 세종에게서 배우라”

정인지가 본 세종의 학문·언어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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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 주상께서 “신하 중에는 상서(祥瑞)를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고, 재변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오로지 상서만 말하고 재변을 말하지 아니하면 어찌 가하겠는가. 상서를 만나면 상서를 말하고, 재변을 만나면 근심과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옳다”(1/7/25)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치우치지 않는 정보를 가지고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주상의 의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의 삶을 직접 돌아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백성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라”

하지만 왕의 궁궐 밖 출입은 제한이 많았다. 따라서 상께서는 나에게 지방 백성이 공법(貢法) 도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듣고 오라고 지시하곤 하셨다. 관찰사가 된 다음에도 나는 최대한 많은 백성을 만나보려 했고, 들판을 돌아보려고 노력했다.

백성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은 상당한 인내력과 체력을 필요로 했다.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막무가내로 무리한 요구를 해오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세액을 적게 책정받기 위해 얄팍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그런 불합리하고도 이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빛에 보이는, 조정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망과 기대를 보면서 ‘정치의 본령’이 과연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곤 했다.

무엇보다도 촌락의 실정은 조정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1436년(세종18)의 작황이, 내가 부임하기 1년 전의 흉년보다 덜하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백성이 느끼는 고통은 그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걷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굶주린 백성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무능한 관리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세금을 독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방 관리는 모름지기 세금을 많이 걷어 올리기보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사’를 잘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평의 아름다운 뜻”을 잘 살리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이듬해 올린 ‘흉년구제 방책’에서 말했듯이, “백성을 살리는 정치는 식량과 재화 두 가지를 넉넉히 하는 데 달려있는 바, 농사가 풍년이면 값을 올려서 수매하고 흉년일 경우 낮은 가격으로 (식량을) 내다팔아야 했다.”(18/7/21) 이런 내 생각을 주상께서도 인정하셨다. 신인손 등의 나에 대한 탄핵에 대해서 “정인지는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문학에 전임하고 정사에는 경험이 없지만, 내가 듣건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다고 하더라”라는 말씀이 그것이다(17/12/17).

15개월의 걸군(乞郡)생활. 그것은 내 개인으로서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존재,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외경(畏敬)의 대상이었다. 내 나이 19세 되던 1414년(태종14) 문과에 급제해 당신 곁을 떠나기까지, 아버지는 우리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셨다. 망설임과 신중함, 말하기 전의 시간과 말하고 난 후의 시간 고려, 재빠른 대답보다는 책임 있는 말의 침잠. 이 모든 것을 당신은 몸으로 보여주셨다. 이제 쉰셋의 나이에 나는, 네 아들의 아비로서 아버지의 길이 얼마나 무겁고 벅찬 것인지를,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되어간다는 사실을―아비 된 자격을 갖춰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새삼 깨닫는다.

세종에게 배운 효성

1427년(세종9)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곤혹스러웠다. 부여군 석성(石城) 현감을 지내신 아버지(鄭興仁)는 홀로 그곳(부여)에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고집하셨다. 우리 4남매 중에서 두 누이는 이미 시집을 갔고 경기도 광주(廣州)로 장가간 아우는 생활이 곤란한 형편이었다. 그나마 봉양할 수 있는 자식이라곤 나밖에 없는 처지라 주상께 걸군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고려사’ 편찬 등을 이유로 번번이 거절하곤 하셨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모셔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상의 효성이었다. 상왕전하에 대한 주상의 효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대비에 대한 당신의 태도였다. 재위 2년 여름 대비께서 학질병에 걸리셨을 때 주상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학질은 여러 곳을 자주 옮겨 다녀야 환자에게서 떨어진다[出避之以圖離病]는 말에 따라 당신은 5월27일부터 7월10일까지 43일간 무려 12곳을 전전하셨다. 그 기간에 당신께서는 수라는 물론이려니와 “침소에도 들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셨다.”(02/06/01).

주상께서는 “말 한 필에 내시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피병(避病)을 위해 옮겨 다니셨다. 한밤중에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임금은 주야로 잠시라도 대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왕은 불가불 환자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께서 “탕약과 음식을 친히 맛보지 않으면 드리지 않았고, 병환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든지 하지 않는 것이 없는”(02/06/20) 것을 보고 상왕도 감동을 받았다. 그간 소원했던 두 분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순전히 주상의 효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지극 정성에도 7월10일 대비께서는 끝내 눈을 감으셨다. “임금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후, 발을 벗고 부르짖어 통곡”하셨는데, 그 곡성이 너무나 슬퍼 이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애간장이 녹아내렸다(02/07/10). 그때 그 슬픔이 너무나 강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차가운’ 성격을 가진 나에게조차 주상의 뜨거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반드시 봉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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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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