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眞’은 어떤 과정을 거쳐 여자가 된 것일까. 그 발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글 번역본이 아니다. 하태형의 영역(英譯)본 ‘NANJUNG ILGI(난중일기)’가 시작이다. 여진을 여자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이자 이순신 전문가이던 최두환이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卄(입, 20)·?(삽, 30)’을 ‘여자를 눕혀놓고(一) 성관계한 횟수를 세로로 표시한 것’이라고 봤다. 이런 상상은 최근 이순신 친필 초서본을 다시 탈초한 노승석에 의해 한발 더 나간다. 노승석은 ‘여진’을 조선시대의 ‘여자 노비’라고 추정했다. 결국 난중일기 속 ‘여진’은 처음엔 암호문과 같아 번역되지 않다가 여진족 20·30명이 됐다가, 하태형-최두환-노승석을 거치며 ‘이순신과 성관계를 한 여자 노비’로 둔갑한 것이다.
문맥조차 없어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女眞, 女眞卄(共), 女眞?(共)’ 때문에 번역자들은 각자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몇 가지는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이는 ‘난중일기’가 소설이 아닌 일기이고, 또 한글 번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진이 여자 노비라는 확증은 없다. 오히려 여진이 남자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료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54042;齋叢話)’다. 이 책에는 “상사(上舍) 임맹지(任孟智)의 별명은 견(犬)이요, 정양근(鄭良謹)의 별명은 여진(女眞)”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진이 여진족을 뜻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지봉유설’(이수광·1563~1628)과 ‘조선왕조실록’(태종 11년 1월 3일, 세종 14년 5월 29일)에는 당시 귀화한 여진족이 호남에 널리 분포해 살았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난중일기 초서 원본의 ‘여진’ 부분이 모두 해당일의 일기 하단에 쓰여 있다는 점도 의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순신은 어느 날 한번에 추가로 여진과 관련된 내용을 메모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것이 ‘이순신이 여진이라는 여자 노비와 잤다’는 모든 번역에 의문을 제기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의 실제 사생활은 어땠을까. 난중일기에 기록된 것처럼 부하들이 가끔 데리고 찾아오는 방인(房人), 즉 현지처와 같은 여성이나 노비 수청기는 정말 없었을까. 난중일기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라서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정반대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불쌍한 사람’ 이순신
왜란 당시 이순신의 좌수영 근처에 이순신의 모친 초계 변씨, 여수에 부인 상주 방씨가 피난을 와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친인척과 집안 노비의 왕래 사례도 자주 나온다. 아들들은 물론 동생 우신, 조카들, 이순신 집안의 많은 노비가 등장한다. 일기 속의 빈도와 그들이 왕래하는 곳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가족들은 대부분 여수 고음천에 피난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95년 5월 8일 “춘세가 불을 내 집 10여 채가 탔지만, 어머니가 계신 집까지는 붙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16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시나 아내는 불난 뒤 마음이 많이 상해 천식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등의 기록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1596년 10월 11일은 이순신이 어머니를 뵙고 한산도로 돌아간 날이다. 그날 일기에는 “삼경말(三更末, 밤 12시 30분쯤)에 뒷방(後房)으로 갔다가 사경두(四更頭, 밤 1시쯤)에 마루방(樓房)으로 돌아왔다. 오시(午時, 낮 12시)에 어머니께 떠난다는 인사를 올렸다”고 썼다. 이 일기에는 명시적으로 상주 방씨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조선시대 남편과 아내의 거주 장소를 반영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남편과 아내는 사랑채와 안채에서 각각 지내지만, 밤에 남편이 안채로 들어가 아내를 만나고 새벽녘에 다시 사랑채로 돌아오는 관습 때문이다. 이날 일기의 뒷방은 상주 방씨가 기거하던 안채이고, 마루방은 이순신이나 다른 가족 남성들이 거주하던 사랑채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엔 ‘종년을 간통하는 것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양반 주인의 힘이 막강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 어머니와 아내가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자식과 조카도 수시로 왕래했다. 군사와 백성들이 늘 리더 이순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이항복의 기록처럼 책임감으로 전쟁터에서 심신이 지극히 피로한 상태였다. 스스로도 젊었을 때부터 여색을 절제하려 했다. 그런 그가 함부로 다른 여인과 동침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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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그야말로 전쟁의 승리, 그리고 군사와 백성이 먹고사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글자 몇 개로 조각내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후대가 할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