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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보수·진보 아우르며 인재 배출, 획일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

졸업 20년, 경북고 68회 최영철 기자의 ‘同門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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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호남 편중 인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YS정권의 설움에서 벗어난 경북고 출신들은 DJ정권 들어 조금씩 기지개를 켠다. DJ정권은 지역안배 차원에서 경북고 출신들을 요소요소에 기용했다. 사실 ‘지역안배’라는 말보다는 ‘TK 민심 달래기와 구색 맞추기 인사’라고 하는 게 옳다. 경북고 출신은 아니지만 당시 농림부 차관이던 김동태(64·성주농고 출신)씨는 2000년 16대 국회의원선거에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방탄 출마’를 했다 참패한 후 1년8개월 만에 농림부 장관으로 돌아와 ‘국민의 정부’와 행보를 같이했다.

당시 경북고 출신은 검찰총장을 2명이나 배출했다. 박순용(44회)·이명재(42회)씨가 그들. 지청장급 이상 간부들도 경기고(58명)에 이어 경북고가 28명으로 많았고 중앙부처 1~3급 고위직 공무원 중에서도 경북고는 경기고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급 이상은 경기고 출신이 21명이고 이어 18명이 경북고 출신.

기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인 2000년 초 연합뉴스의 경력기자 면접을 치렀다. 당시 연합뉴스 사장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출신의 김종철(63)씨였다. 김 사장은 면접 시간의 절반을 기자의 출신 고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이상한 면접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경북고 출신이면 ○○○ 기자 잘 알겠네. 그럼 술도 많이 먹겠고. 그래서야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

DJ 정권 아래 경북고 출신들의 고초를 뼈아프게 대리체험한 면접이었다.



너섬, 인사동, 광화문포럼

대구시청에 도착해 현재 실·국장급 중에 경북고 출신이 몇 명인지 알아봤다. 취재 결과는 놀라웠다. 김범일 시장과 권영세 행정 부시장(52회)을 제외하고 경북고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격세지감이 일었다. ‘동아일보’ 대구시청 출입기자인 정용균 차장은 “대구지역 기자생활 20여 년에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했다. 대구지역에서도 이제 경북고 외의 인재 풀(pool)이 다양화된다는 방증이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 정부는 5, 6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청와대와 검찰에서 경북고 출신을 중용했다. 이 지역의 민심이 반(反)노무현 정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마도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기반 일부가 예전부터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노 대통령의 사시 17회 동기인 정상명(48회)씨가 검찰총장이 됐고, 대구고검장(권재진·53회)과 부산지검장(김태현·55회), 제주지검장(정진영·58회)이 경북고 출신이다. 전체 검사숫자는 2006년 4월 현재 1992년의 73명보다 절반 이상이 줄어든 31명이다. 1위인 경기고 출신 검사 숫자도 38명에 불과하다. 1990년 이후 외국어고와 사립 명문고의 부상으로 사시 합격자 출신고교가 다양화 됐기 때문이다.

행정부 3급 이상(검사, 군인, 국가정보원 제외) 공직자도 경기고(69명)에 이어 경북고 출신(48명)이 2위를 다린다. 경북고 동문들에 따르면 현재 중앙부처 서기관급 이상 공무원 중에는 80여 명의 동문이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쥐 죽은 듯 보내야 했던 YS 정권과 DJ 정권 시절, 경북고 출신 공직자들은 동문회조차 꺼려야 했다. 한 고위직 동문은 “누구도 모이자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또 모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이면 모두 죽는다는 식이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분위기는 DJ 정권 말기부터 사라져간다. 서울 여의도 정가와 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동문모임인 ‘너섬 포럼’이 만들어지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사대문안 관가와 언론 정계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인사동 포럼’ ‘광화문 포럼’ 등의 동문 모임이 만들어졌기 때문. 이들 모임의 특징은 정치적 성향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지만 굴곡의 세월을 보내온 만큼 ‘정치가 끼어들면 모임 자체가 없어질 것’임을 동문 모두가 알기 때문일 터이다.

同門과 同窓

뜬금없는 인사 불만이나 로비성 발언을 하는 동문이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바로 제지당하거나 외면받는다. 2005년 8월 서울 인사동에 있었던 인사동 포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중앙부처의 고위직 선배 한 사람이 취기가 올라 동석한 이재용 당시 환경부 장관 앞에서 인사 불이익에 대해 눈물로 호소했지만 선배들은 하나같이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기자는 최근 동문회에 갈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정치권 선후배가 어우러져, 또 재야단체 출신과 이들을 억누르던 경찰 고위관료 선후배들이 웃으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이명박계와 박근혜계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한나라당 의원(13명)과 그 보좌관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허물없는 동문일 뿐이다. 그들에겐 서로 손가락질하던 과거도, 현재의 다툼도 “미안하이”라는 한마디로 모두 풀린다. 3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는 공통된 경험이 정치적 견해차와 상반된 이해관계를 화해의 분위기로 녹여버린다. 이것이 같은 문(門)을 드나들며 배우고, 같은 창(窓)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던 동문과 동창의 의미다.

경북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최재원 변호사(68회)의 날카로운 분석으로 이 글을 맺는다.

“5·16군사정변 이후 30년 동안 정권의 중심이 대구·경북에 있었고, 경북고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고급 인재풀의 임무를 다했다. 거기에 속했든 거기에 항거했든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못이 있다면 시대에 있다. 동문 집단도 하나의 사회다. 사회는 좌파, 우파, 중도, 정치적 무견해자 등 온갖 구성원이 섞인 ‘잡곡밥’이다. 경북고도 그렇다. 경북고 동문회는 사적 경험을 같이 한 모임일 따름이다. 그 다양한 구성원을 단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매도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한다면 그 또한 획일주의고 독재다. 동문은 안 보면 보고 싶은 애인 같은 집단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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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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