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사진으로 보는 독립의 열망 … 덕수궁에서 북간도까지 만세시위 행렬

  •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hongsp6054@hanmail.net

    입력2011-03-21 17: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이번에 공개한 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는 독립기념관이 200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해 범국민 역사자료 기증운동을 전개할 당시 한 재미교포가 기증한 자료다. 가로 23㎝, 세로 15㎝의 신국판 크기로 표지를 포함해 총 52쪽으로 구성돼 있으며 표지와 제본은 매우 낡은 상태지만 다행스럽게도 내용은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화보에는 발행 지역이 상해로 명기돼 있으나 발행처와 발행 일자는 표시돼 있지 않다. 그러나 상해 대한적십자회의 조직과 활동상을 담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대한적십자회에서 발행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 발행 시기는 대한적십자회의 조직란에 이희경이 회장으로 나온 것을 볼 때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목차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화보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서문에 해당하는 첫 부분에는 3·1운동이 발발한 사실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내용, ‘3·1독립선언서’의 공약 삼장과 선언서의 주요 내용 등을 영역(英譯)해 수록했다. 두 번째 부분은 3·1운동의 만세시위와 일제의 만행을 담은 사진 31장과 상해 대한적십자회와 독립문 사진 3장 등 총 34장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 마지막 부분은 1919년 7월1일자로 발기한 상해 대한적십자회의 발기문과 발기자 명단, 대한적십자회의 조직 상황을 담고 있다.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의 실상과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세계에 호소하기 위한 선현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만으로도 의미 있는 사료지만, 특히 3·1운동 당시의 사진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 실상 사진자료를 하나의 사진첩에 묶어 발행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동안 3·1운동과 관련된 사진들은 국내에 많이 소개됐지만 이 자료처럼 국제적인 선전홍보를 목적으로 제작해 배포한 영문 화보집이 발굴된 것은 처음 있는 일. 3·1운동이 단순히 한반도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는 인식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발기문과 조직, 관련 사진들을 통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해 대한적십자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부분이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1_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표지.



    2_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는 만세시위 행렬. 학생과 일반인이 합세해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위 현장의 뒤편 건물은 미국 공사관이다.

    3 _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앞 도로를 점거한 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대규모 시위행렬. 사진 속 군중의 규모로 가늠할 때 수천 명의 시위자가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4 _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일본군. 3·1운동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무장한 군대를 동원해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수록된 34장의 사진을 내용별로 보면 3·1운동과 직접 관련된 사진이 30장, 대한적십자회 사진 2장, 기타 2장이다. 이 가운데 그간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3·1운동 관련 사진이 7~8장으로, 특히 수원 화수리와 제암리에서 찍은 일제 만행의 사진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의 참사 사진, 일제의 탄압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만세시위자들의 합동 장례식 사진, 1919년 3월13일로 추정되는 북간도 용정에서의 만세시위 사진들이 사실상 처음 발굴된 귀중한 사진들이다.

    영문 화보집의 기록에 따르면 수록된 3·1운동 관련 사진들은 모두 외국인이 찍은 것이다. 촬영자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주요 외국인 중 한 명은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ofield)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1운동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에 분개해 그 실상을 사진으로 남겨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특히 이 화보집에 수록된 제암리에서 벌어진 일제 만행 사진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중상을 입은 만세 시위자들의 사진이 그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코필드 교수가 쓴 ‘수촌리에서의 잔학행위에 대한 보고’라는 제목의 기록이 남아 있는바, 이번 영문 화보집에도 수촌리에 관한 사진이 한 장 수록돼 있다. 그 밖에 화수리 참사 사진도 넉 장이 수록돼 있는데 이는 당시 현장을 조사했던 선교사 노벨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1_거리 경계를 서는 일제의 군인. 시위대를 진압한 뒤 재발을 막기 위해 시내 곳곳에 경계를 강화한 모습이다.

    2_상점 문이 닫힌 서울 거리의 한산한 모습. 3·1운동 당시 상인들은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스스로 철시했다.

    3_상점 문을 강제로 열고 있는 일제 경찰들.

    4,5 _참변을 당해 아수라장이 된 화수리. 경기도 수원과 안성 지역에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치열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4월3일 수원군(현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면의 주민 1000여 명은 시위대를 조직해 두 곳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공격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4월4일 일본군 78연대 소속 1개 부대를 특파해 4월11일 화수리 마을을 포위했다. 주민들은 인근 야산으로 피신했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일본군의 일제 사격과 구타로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가옥 역시 절반 이상이 방화로 파괴됐다. 당시 일제가 저지른 화수리 참변의 실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진이다.

    이처럼 영문 화보집에 수록된 사진들은 3·1운동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공개됐던 사진들을 한데 모아 3·1운동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편집,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영문 화보집을 발행한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안창호를 비롯해 이희경, 김성겸 등 79명의 이름으로 1919년 7월1일 발기했다. 발기 목적으로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온갖 참상을 겪은 한국인들에 대해 아무 구실도 하지 않는 일본적십자사의 무도한 죄악을 전세계에 고발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해 한국인의 독립을 호소하며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인 동포들을 구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8월29일자로 상해시 장빈로 애인리 39에 사무소를 열고 정식 설립됐다. 초대 회장으로는 의사인 이희경이 선임됐고 부회장은 김성겸, 이사는 여운형이었다. 이후 중앙의 상해 본부 외에 국내 지회와 미국(샌프란시스코)지부, 시베리아(소왕영)지부 등지로 조직이 확대되기도 했다.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9월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유학 중인 이관용을 국제적십자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시키는가 하면, 1920년 10월 일본적십자회로부터 분리 독립활동을 벌이고 1921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10차 국제적십자회에 정식 회원 가입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교적 방해와 국제연맹에 가입한 독립된 주권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절돼 대한적십자회의 국제적 승인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1923년 국민대표회 이후 임시정부가 쇠퇴하면서 침체했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에 정착한 뒤 ‘한국홍십자의원’이란 이름으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한편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말 혹은 1920년 1월 무렵 양성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재정과 학생의 부족으로 1기생 배출에 그치고 말았지만, 한인 동포들을 위한 실질적인 의료구호 사업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3·1운동 영문 화보집
    1_수촌리 참사 직후의 마을 어린이들. 1919년 4월4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수원군 일대를 대대적으로 파괴, 방화한 일본군은 70여 명의 주민을 붙잡아 고문했다.

    2 _참변을 당한 제암리 마을. 일제는 1919년 3월31일과 4월5일 경기도 발안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제암리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스코필드의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는 21명이었고 가옥 30여 채가 방화됐다. 아울러 일제는 인근에 있던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의 가족 6명을 몰살하기도 했다.

    3_일제에 의해 대량학살당한 시위자들의 장례식.

    4 _북간도 용정에서 열린 3·1운동 기념 축하식.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의 한인들은 용정과 연길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국내에서 이미 독립을 선언했으므로 북간도에서는 1919년 3월13일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거사를 단행했다. 용정의 3·13 거사로 공덕흡을 비롯한 17명이 순국한 이후에도 만세시위는 북간도 각지로 확산됐다.

    5 _상해 대한적십자회 임원과 간호원양성소 제1기 후보생들. 상해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1월 한인 동포에 대한 의료구호를 위해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사진을 보면 1919년 간호원양성소가 개소한 것으로 돼 있다.

    6 _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의 주검.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여학생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채 길거리에 방치돼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