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찾아서

  • 이양구 | 극작가

    입력2014-05-20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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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햇살사회복지회에서 화요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할머니.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K-6 캠프 험프리 근방에 흩어져 살아가는 독거 할머니들. 1960~70년대 미군을 상대로 클럽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쪽방 하나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해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주 화요일만 되면 햇살사회복지회에 모여 공동기도를 하고 점심 한 끼를 나눠 먹고 흩어진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아마도 내가 왜 평택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야기는 초등학생 시절 평화로웠던 고향 마을 충북 제천시 청풍면 단돈리가 댐 건설로 호수로 변해 사라져가는 과정을 목격했던 어린아이가 자라서 지명이 호수(평택(平澤))인 마을에서 어린 시절 자기 마을을 만난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상처를 간직한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글에서 경기도 평택의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지원이, 법률이나 조례를 통하든, 혹은 개인의 독지에 의한 것이든 지금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호소하려 한다.

    포털 사이트에 ‘기지촌’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자 가장 먼저 평택시민신문 허성수 기자가 보도한 기사가 검색된다. “기지촌 할머니들 지원조례 제정 시급해요! 햇살사회복지회, 염동식 도의원 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이라는 제목이다. 입력 시간은 2014년 04월 02일 (수) 15:33:13. 그리고 여기에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다. ‘▲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오른쪽)가 염동식 도의회 여성가족평생교육위원장(왼쪽)에게 4월 도의회에서 기지촌 여성지원 조례를 상임위에 상정할 것을 촉구한다’라는 설명과 함께. 우 대표는 염 위원장에게 조례안을 상임위에 상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핵심은 이렇다. 주한미군이 기지를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하면서부터 이 지역의 땅값이며 집값이 뛰었고 그 때문에 최저 생계비로 살아왔던 기지촌 독거노인들이 현재 사는 쪽방에서마저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평택지원특별법에는 이들을 위한 지원금이 단 한 푼도 없고 누구 하나 이들의 삶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 이 여성들은 한때 미군을 상대로 클럽에서 일하면서 밑천이 들지 않는 외화벌이 역군, 민간 외교관으로 한몫을 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산업화의 그늘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우순덕 대표(오른쪽)가 염동식 위원장(왼쪽)에게 기지촌 여성들의 지원방안을 담은 조례안을 도의회 상임위에 상정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법적인 책임이든 도덕적인 책임이든 누군가는 이들의 생계에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누울 자리와 하루 세끼조차 근심거리가 된 이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안타깝고 죄스럽다. 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1960~70년대 산업화의 그늘에는 그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늘에 있다. 그저 그늘에 있을 뿐 아니라 소리 없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 여생이나마 방 걱정, 밥 걱정 없이 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회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될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으니 경기도라도 당장 나서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지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지촌은 대부분 경기도에 있었으니 경기도가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허성수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염 의원은 4월 임시회에 상정할 것을 요구받고 ‘위원장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경기도의회가 국회에 상위법 제정 촉구결의안을 보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이에 햇살사회복지회 측과 시민단체들은 통과되지 않더라도 위원장 직권으로 상임위에 발의할 수 있지 않으냐며 할머니들이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어 빨리 관련 조례를 제정해 지원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염 의원은 기지촌 할머니들의 사정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4월 도의회에서는 어렵다는 뜻을 밝히고 자칫 8월 차기 도의회로 넘어갈 수 있다며 좀 더 기다려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논쟁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 허 기자가 지켜본 그 현장을 함께 보았다. 허 기자는 기자로서 이날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보도했지만 나는 그날을 객관적으로만 기록할 수 없다. 도의원들이 절차를 밟는 동안 그녀들의 고통은 점점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가한 할머니 한 분에게 나중에 마음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녀는 “안정리에만 있다 막상 그곳에 가보니 마음이 다르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당사자로서 나서야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막상 당사자로서 바깥세상에 나서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참으로 비참한 마음이 들더라는 뜻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봉사자들은 돌아오는 길에 그녀들을 지원하는 조례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노력이 도리어 그녀들을 더 상처받게 한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지촌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생계비 지원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우덕임 할머니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냉소했지만 누군가 “당사자가 나서야 사람들이 지원해주지” 하고 말하자 기대하는 표정이 어리는 것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다.

    생계비 지원 조례안 논란

    사실 우순덕 대표는 사회복지사이지 운동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할머니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박하기 때문이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한 조례안 상정 권한을 가진 염 위원장이 소관 상임위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임위에 상정할 권한을 가진 염동식 위원장과 우순덕 대표는 몹시 가까운 사이였다. 평택에서 자란 염 위원장도 어려서부터 할머니들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고 우 대표 또한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염 위원장이 당황스러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 대표는 염 위원장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지촌 여성들이 처한 생활고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극단적 사례로, 내가 4년 전 햇살사회복지회의 소식지에 기록해둔 내용을 옮겨본다.

    먼저 L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자원봉사자 S선생의 기억에 따라 적어둔다. S선생은 고인이 세상을 뜨기 전날 전화를 받았다. L할머니였다. 복숭아를 사다달라는 내용이었다. 치아도 없는 양반이 복숭아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입이 헐어서 그랬을까. S선생이 복숭아를 사들고 찾아갔더니 “맛있는 거 사먹게 돈 좀 달라”고 했다. S선생은 3만 원을 줬다. L할머니는 어린애가 투정 부리듯 2만 원을 더 달라고 떼썼다. S선생은 “내일 또 올 텐데 무슨 돈을 자꾸 달라고 그러느냐, 치아도 없는 사람이 밤사이에 5만 원어치나 무얼 사먹으려고 하느냐”고 해도 소용이 없어 결국 2만 원을 더 내줬다. L할머니는 손에 쥔 5만 원을 팬티 속에 넣었다.

    다음 날 새벽 간병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L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녀는 아마도 노잣돈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L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 S선생에게 통장을 주며 장례식 비용으로 쓰라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통장 잔고는 699원에 불과했다. 정부 보조금이 입금되기 전 돌아가신 것이다.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햇살사회복지회를 찾은 할머니들의 일상.

    “빨리 죽고 싶은데…”

    그녀의 별명은 왜가리였다. 사람을 만나면 마치 소리를 지르듯 말해서다. 아마 외로워서 그랬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오랫동안 유방암으로 고생하다 작년 초 세상을 떠난 나영란 할머니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잘 죽지를 않아. 이쪽 세상에서 안 받아주니까 저쪽 세상에서도 안 받아주나벼”라면서. 나영란 할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저쪽 세상에서나마 그녀를 받아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할머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 연극 ‘숙자이야기’(노지향 연출)에서 빼어난 연기를 펼친 노배우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간 사람 중에는 여복동 할머니도 있다. 아직 살아 있는 그녀들을 위한 일이므로 여복동 할머니 또한 실명으로 자신이 거론되는 것을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내가 그분과의 마지막 기억을 햇살사회복지회의 소식지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여복동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2010년 1월이나 2월이었을 것이다. 조미라 간사님을 따라서 할머니 방을 처음 방문했을 것이다. 조 간사님이 기도를 해주겠다고 하면 자기는 불교니까 기도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며 웃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민망해하던 조 간사님의 얼굴도. 할머니 방에는 달마대사 그림도 있었다.

    2012년 봄 학기에 나는 화요일에 수업이 있어서 평택에 거의 갈 수가 없었다. 대신 화요일이면 못 간다고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이번 학기 끝나면 갈게요. 미안해요. 그러나 3월이 지나가고 4월이, 다시 5월이 지나가는 동안 못 간다는 전화를 하는 것도 미안하고 바쁜 일상에 묻혀 6월에는 전화조차 끊게 되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연세였지만 무척 건강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내가 학기를 마치기 전에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학기는 끝났고 바쁜 일이 좀 정리돼 이틀 후면 평택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일요일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있었다니까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돌아가셨을 것 같았다. 혼자 빈방에서, 언제나 그랬듯 그날도 혼자 영원히 잠드셨다.

    다음 날 평택으로 갔다. 할머니는 평택시 장례문화원에 안치돼 있었다. 빈소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병원 근방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조문을 대신했다. 병원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무연고 노인 1’이라고 누군가 써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원장님과 자원봉사자 몇 명, 팽성읍사무소 직원 한 명이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하고 시립 납골당에 유골을 안치하자 모든 것이 끝났다. 바람이 불었고 안성천에 떨어진 햇살은 물결 따라 반짝이며 멀리 사라져갔다.

    흔히들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의 차이로 강제성과 자발성을 거론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간 것이지만 미군 기지촌으로 온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니 다르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 여부도 연행 과정의 강제성보다는 현지 위안소에서의 강제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듯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의 경우도 ‘자발적으로’ 기지촌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여부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왔어”

    할머니들에게 물었다. “원한다면 거절할 수도 있었던 거지요?” 대답은 이랬다. “싫다고 할 리가 없잖아. 그러려고 온 것인데.”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 기지촌으로 흘러와 나 혼자 몸 팔아 동생 학교 보내고 엄마 아빠 돈 보내드리고 말년에는 홀로 안정리에 남아 가족과도 연을 끊고 살아온 할머니의 대답이다.

    게다가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직속으로 ‘기지촌정화위원회’를 설립하고 한미 합동으로 장기적이고 효과적으로 기지촌 여성에 대한 성병 관리에 돌입했던 사정까지 알고 나면 강제성이니 자발성이니 하는 구분이 공허하게 들린다. 그때 안정리 할머니들도 정부 시책에 따라서 ‘국화회’라는 자치회를 만들어 ‘너는 감찰하고 나는 감찰당하고’ 그랬다. 지금도 할머니들은 그때 감찰을 했던 할머니를 가리켜 “저년이 더했어”라고 쑤군거린다. 그러나 감찰을 했건 감찰을 당했건 내 눈엔 다 똑같이 슬픈 빛깔이다.

    기지촌정화위원회 활동 기간에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국가의 관리 감독은 인권침해 요소가 다분해 기지촌여성인권연대에서 곧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할 것이니 법적 책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문제는 소송이 제기되고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또 누군가 소리 없이 사라져갈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내심 기대하는 것을 우리 또한 기지촌 여성들에게 기대하는 것일까.

    나는 5년간 햇살사회복지회를 다니면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햇살사회복지회를 찾아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을 만나는 장면을 목도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안정리 할머니들에게 죄의식을 벗고 당당하게 살라고 말했다. “우리도 첨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정작 기지촌 여성을 대표해 대답한 할머니 한 분은 ‘자발적 선택’임을 강조했다. “언니들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난 솔직히 자발적으로 왔어.”

    이 ‘자발적 선택’의 논리는 단순히 ‘바깥세상’ 사람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의 삶을 연극의 대본으로 옮길 때 ‘썩은 고기의 비유’를 들었다. 연극 ‘일곱집매’에서 극 중 심화자 할머니는 기지촌으로 흘러든 자신의 삶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정작 또 다른 기지촌 여성인 김순영이 던져준 썩은 고기를 먹고 죽은 개에 대해서 그건 언니가 죽인 것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어느 날 안정리 거리를 걷다가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난 뒤에 끙끙거리고 누운 강아지를 보았다. 먹을 것 없는 개들이 썩은 고기라도 먹고 죽어야 하듯 나라가 가난했던 1960~70년대 기지촌으로 흘러들어온 삶이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쉽사리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내게 “자발적으로 왔어”라는 할머니의 말은 “나를 쉽사리 피해자로 만들지 마. 이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거야”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이분들의 모습은 내게 도리어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의 삶이 쉽사리 훼손될 수만은 없는 것이라는 감동을 주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들은 내게 큰 선생님들이었다. 나는 어떤 시인에게서도 받지 못한 감동을 그녀들에게 받았으니 이 말은 결코 위로의 말이 아니다. 내 걸음으로는 20분이면 될 길을, 4~5시간씩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전찬숙 할머니나 김복남 할머니의 잔영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손가락질 안 받으며 살 공간

    집값·땅값은 계속 오르고 ‘기지촌 할매’들 쪽방서 쫓겨날 판

    먼저 세상을 뜬 할머니를 기리는 추도 모임.

    어떤 사람은 기지촌 할머니들을 일반 양로원이나 사회복지단체에서 함께 관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길 가면 사람들이 우리들의 ‘과거’를 들추며 손가락질해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김순배 할머니는 12년 전,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손가락질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우 대표는 ‘그러면 햇살사회복지회에서 기도를 하자’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이후 그곳에서는 12년째 매주 화요일 기도회가 열린다. 김순배 할머니가 교회에 나가서 맘 편히 기도할 수 없었듯이 다른 할머니들 역시 양로원에서조차 편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운 까닭이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만을 위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들은 공동체 공간은커녕 저 혼자 편히 누울 공간조차 없다. 햇살사회복지회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아주 좁은 가정집 한 칸에 불과하다. 슬프지만 이것이 그녀들에게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앞에서 허 기자가 찍은 사진을 다시 보자. 이 사진에서 선글라스를 쓴 분은 엄숙자 할머니다. 이분은 이날 당사자 발언을 통해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눈물이 나서 더는 말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지원을 부탁하려면 불쌍한 척 연기도 하고 죽는 시늉도 좀 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그런 것조차 몰랐다. 클럽에서 미군을 상대로 일했다고 말해야 할 것을 “노래하고 춤추고 노느라” 고생했다고 말한 것이다. 눈물이 나서 더는 말을 못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웃은 것이 미안했다. 이 사진에서 복면을 쓴 할머니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녀가 “여러분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실 거예요. 우리는 당사자였기에 너무 아파요”라고 말한 할머니라는 것만 적어둔다.

    ‘일곱집매’에 묻힌 슬픔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뒤에 아주 작지만 할머니 한 분이 더 있다. 그리고 이 여성들의 등에 가려진 플래카드에는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 소관 상임위 상정 촉구 기자회견’이라고 적혀 있고, 그 플래카드 뒤에는 10여 명의 기지촌 할머니가 아픈 다리를 쉬며 앉아 있다. 그리고 사진의 사각 프레임 바깥에는 이날 행사에 참가한 연대 단체 회원들과 사진 찍는 기자들,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인쇄된 사진의 프레임 바깥에는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읽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나와 함께 과거 양(洋)공주, 양색시라고 불리며 외화를 벌어들이던 사람들을 보고 있다. 한때 그녀들은 평택송탄 지역 경제의 60%를 책임졌다고 전한다.

    염 위원장은 상위법에 근거가 없어서 지원 조례를 제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사람들은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한 조례의 제정은 상위법인 법률의 근거가 필요하지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례의 제정은 상위법의 위임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1992년 제정된 청주시행정정보공개 조례를 들었다. 염 위원장은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만이 아니라 경기도의회 의원 대부분과 국회의원들이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법률안이나 조례안 제정에 소극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과거의 치부―대한민국 정부가 안보를 위해 여성의 몸을 도구로 사용했다―를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정리 할머니들에게 우 대표는 “어떤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바깥세상’에서 왔지만 그녀들을 거의 완전히 받아들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것도 우 대표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 대표는 내게 연극 대본을 부탁하면서 ‘일곱집매’라는 제목을 줬다. 예전에 안정리를 ‘일곱 집이 자매처럼 모여 살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1942년에 일본군 비행장이 들어서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지금의 K-6 캠프 험프리가 들어섰다고 했다.

    나는 연극을 만들기 위해 ‘일곱집매’를 걸어다니면서 그 땅에 묻힌(埋) 슬픔을 잠시나마 만났다. 그 슬픔은 나로서는 닿을 수 없이 깊은 곳에 있었으므로 내가 쉽사리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평택’에 비친 자화상

    나는 ‘평택’이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눈물이 흘러가서 고인 연못이라고 생각했다. 평평한 연못이라는 이 지명―평택―을 평등과 평화, 깨달음(해인(海印))이라는 뜻으로 들었다. 나는 평택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다목적’을 위해서 댐이 만들어지자 그 댐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는 경험을 한 아이가 자라서 맞딱뜨린 고민이다. 현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적어놓은 기록의 일부를 옮긴다. 3년 전의 기록이다.

    어느 날 할머니가 평택의 굿모닝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강은 너무 악화되어서, 병실에 가보면 할머니가 통증이 너무 심해서 신음을 토하며 울었다. 진통제를 맞고서 가물가물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할머니를 두고 서울로 돌아오는 마음은 무거웠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이것보다 무력한 일이 또 있을까.

    현 할머니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자 안성의 요양병원으로 옮기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일임을 알았는지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L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노잣돈이 없어서 운명하기 직전까지 걱정하셨던 기억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아직 건강하실 때 봉투를 드렸다. 고마웠는지 잘 받으셨다. 나중에는 이성주 선생님도 보태주셨으니 노잣돈 걱정은 훨씬 덜었으리라.

    현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원을 찾았을 때 내게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를 할 줄 모르는 나였지만 뭐라고 기도해줬으면 좋겠는지 물었다. 그녀는 “다 좋다”고 했다. 거듭 물어도 대답은 같았다. “다 좋아.”

    정작 생의 마지막에 닿은 할머니는 그저 “다 좋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과 아직 살아남은 일곱집매 할머니들까지 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다. 글을 쓰기 전에 할머니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김숙자 할머니는 얼마 전 앞집에서 스스로 목을 맨 지 몇 달 만에 발견된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방 한 칸씩이나마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죽고 난 뒤에 몇 달이 흘러가도 아무도 모른다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고 했다고 우 대표는 내게 전했다. 할머니는 일곱 집이 자매처럼 모여 살았다는 옛 마을의 풍경이라도 떠올렸던 것일까. 아직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있을 때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법률안과 조례안이 통과되기를 바란다.

    아픈 현대사를 겪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 흘러들어 맑은 호수를 이루는 곳. 그래서 거길 가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자화상이 투명하게 비치는 곳. 하지만 비로소 우리의 얼굴을 씻을 수 있는 곳. 평택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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