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동대 교수 김봉연, 삼성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 군산상고 감독 김성한
1997년 해태는 전해에 이어 또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후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하와이 반란의 주역’들은 쫓겨가듯 삼성으로 옮겼다. 이순철은 이듬해인 1998년 삼성에서 은퇴하고, 1999년 삼성 코치가 됐다.
이순철과 김응룡의 관계는 2000년 말 김응룡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한번 더 꼬였다. 이순철은 더 이상 삼성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또 한번 짐을 꾸려 LG트윈스 코치로 옮겼다. 이순철은 3년 동안 LG에서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2003년 말 LG의 감독이 됐다. 이제 LG트윈스가 2005년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 이순철은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선동열과 김응룡)를 잡는 셈이다.
그러나 초보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삼성라이온즈의 전력은 겉보기에도 막강하다. 내야에는 1루수 김한수, 2루수 박종호, 유격수 박진만, 3루수 조동찬이 있다. 만약 김한수가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3루를 본다면 양준혁이 1루를 맡는다. 심정수 박한이 강동우 신동주 김종훈으로 구성된 외야진은 8개 구단 중 최고다.
투수진도 막강하다. 한국 최고의 투수로 떠오른 배영수를 비롯해 김진웅 권혁 권오준 김현욱에 외국 투수 2명이 가세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사자왕국이다. 선수 면면만 놓고 볼 때 선동열 감독의 부임 첫해 성적은 첫술에 배부를 여지가 충분하다.
김성한은 기아타이거즈 감독으로 있다가 2004년 시즌 도중 경질된 뒤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해태타이거즈가 최고 명문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등공신이 누구였냐를 따진다면 단연 김성한이 꼽힌다. 김성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투수와 타자로 활약했다. 그 해 10승 고지에 올랐으며 타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김성한은 또 한국 최초로 한 시즌에 홈런 20개,도루 20개 이상을 기록하는 20-20클럽에 가입한 만능선수였다. 해태가 9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김성한은 무려 7차례나 현역으로 뛰었다. 프로야구 원년부터 14년 동안 활약하면서 1137경기에 출전해 1경기에 1개가 넘는 1389개의 안타를 쳤고, 통산 0.286의 타율에 홈런 207개, 781 타점을 기록했다.
그밖에도 숱한 기록을 세우며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김성한, 유승안 감독이 도중하차하고, 2004년 시즌 이순철 감독의 LG가 정상등극에 실패함으로써 해태선수 출신 감독의 최초 우승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환의 저주’
해태타이거즈는 두 차례 성공적인 트레이드를 통해 강팀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라이온즈에서 유격수 서정환을, OB베어스에서 한대화를 2대1 트레이드로 데려온 것이 그것이다.
서정환은 원래 삼성라이온즈 선수였다. 그러나 호화군단 삼성에는 천보성 오대석 배대웅 등 기라성 같은 유격수가 있었다. 물론 서정환도 국가대표 출신이지만 이들보다는 공격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서정환은 프로야구 첫 시즌이 끝난 직후인 1982년 12월7일 겨우 1600만원에 해태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프로야구사상 첫 트레이드였다.
그때부터 ‘정환의 저주’가 시작됐다. 서정환을 싼값에 트레이드한 삼성라이온즈는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고, 해태타이거즈는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서정환은 유격수로서 빼어난 수비와 알토란 같은 공격력을 발휘해 해태 우승에 톡톡히 기여했다. 서정환은 자신을 해태로 보내준 고 서영무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실제로 삼성과 경기할 때마다 서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서정환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기아 코치로 남아 있다. 이제는 완전히 호남사람이 된 것이다.
한대화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리는 해결사로 야구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남모르는 지병이 있었다. 간염이었다. 그러니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는 프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해태 김응룡 감독은 1986년 시즌을 앞두고 한대화를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