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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연애다!

골프는 연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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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고 있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혹시 지나다니는 스튜어디스에게 들킬까봐 책에서 눈을 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문득 어릴 때 고종사촌 동생인 병섭이 놀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가진 여러 별명 중 하나가 ‘울보’였다. 병섭의 말에 따르자면 어릴 적의 나는 큰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거릴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영화나 연극,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잘 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보다 보면 눈물을 자주 흘리는데 남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이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도 눈물을 자주 흘린다. 그래도 책을 읽을 때는 그런 모습을 숨길 수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서는 방앗간에 갔다가 피대에 걸려서 왼팔이 잘려 나간 둘째형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들며 싸우는 나를 보고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냉혈한”이라고 나무라신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는 물론이요 어른이 된 지금도 ‘내 눈물은 참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눈을 감고 이런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눈에 고였던 눈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눈에서 눈물이 다 말랐다는 느낌이 들자 가만히 눈을 뜨고 아이가 앉아 있는 좌석을 보았다. 아이는 엄마의 허벅지에 두 팔을 걸치고 다리를 앞 좌석 밑으로 뻗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리 떼를 쓰고 응석을 부려도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때마침 배꼽이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아이의 배꼽을 오른손 검지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찌르면서 말을 걸어보았다.

“야, 네 이름이 뭐야?”

아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가락 끝을 그의 왼쪽겨드랑이 쪽으로 가져가서 간지럼을 태우며 물었다.



“야, 너 몇 살이야?”

그러자 아이는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가 대답하는 대신에 아이의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지준이에요라고 대답해야지!”

그러면서 아이가 이제 1년2개월 됐다고 소개했다. 아마도 너무 일찍 깨워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떠들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아이의 겨드랑이를 쿡쿡 찌르기도 하고 긁기도 하면서 간지럼을 태웠다. 마침내 아이는 큰 소리를 지르며 웃기 시작하더니 엄마를 떠나 통로 쪽으로 도망갔다. 그러자 우리들 사이에는 긴장이 사라졌다. 그 사이에 비행기는 이륙을 마쳤고, 어느덧 스튜어디스들은 식음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지준이게도 또다시 주스 잔을 건넸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인생 제2의 반려자

…1975년, 딸이 던디로 시집가서 신변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그때까지는 골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다. 오로지 살아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링크스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도 인생의 제2의 반려자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20년 만에 만진 클럽에서는 그리움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느껴졌어요. 볼이 맞기는 할까, 한 시간 넘게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생각했죠. ‘옛날은 옛날이고, 20년의 공백은 비기너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세월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새로운 클럽을 사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창고 안에서 연습 스윙을 시작했다. 긴 겨울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윽고 봄이 되어 코스에 나가자 깜짝 놀라는 주위 사람들에 둘러싸여 볼을 쳐보았다.

“마음먹은 대로 휘둘러지지도 않았고 거리도 나지 않았어요. 감도 돌아오지 않았고요. 세월은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들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비거리는 찾을 길이 없고, 다만 할망구 하나가 또박또박 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울어버리고 싶었죠.

그래도 클럽에 무게를 두고 매일같이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시간만 나면 퍼트 연습장에도 나갔어요. 1981년에는 잉글랜드시니어레이디스선수권대회에 도전했지만 순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예선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이듬해에는 84타 81타로 15위, 그 다음해에는 80타 82타로 12위, 겨우 골프를 한다고 말할 정도가 됐던 것 같아요.”

“겨우라뇨? 굉장한데요. 아까부터 존경스러워 감탄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선수였기 때문일까. 그녀는 굳건한 신념을 가진 아마추어 선수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지켜보노라니 풍향을 재빨리 읽고 전혀 망설임 없이 자세를 갖추고 연습 스윙도 하지 않은 채 클럽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볼은 낮은 탄도로 정확하게 날아가서 가장 이상적인 지점에 틀림없이 멈춰섰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게임 방식이자 골프의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지준이가 다시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을 덮고 잠시 기내 분위기를 살폈다. 비행기는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기압이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이면 나이 어린 지준이는 귀에 통증을 느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우는 지준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웠다. 아이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감촉이 몹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준이가 평온함을 찾는 것을 지켜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연애 같지 않나요?”

“여쭤봐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저 혼자서는 답이 보일 듯 말 듯한 어려운 질문인데요, 이토록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골프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일까요?”“사람에 따라 그 답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즐기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인생 최고의 교과서이자, 산소처럼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요. 혹은 신이 마련해놓은 사람과 자연의 멋진 접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그 다음 1홀, 질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 곁으로 와서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연애 같지 않나요?”또 그 다음 1홀, 이번에는 필자가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그렇네요. 골프는 연애입니다. 여태까지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당신을 만나고 나니 새로운 답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골퍼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골프가 연애라니? 나는 속으로 반문하면서 책에서 눈을 뗐다. 그 사이에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어느새 스튜어디스가 갖다놓은 양복 상의를 입고 서둘러 책을 안주머니에 쑤셔넣은 다음 나는 지준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야, 재미있게 잘 놀다 가거라!”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골프는 연애와 같다….’

신동아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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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일러스트·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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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연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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