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태권도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대한태권도협회(대태협)와 국기원, 그리고 세계연맹 등이다. 이 가운데 대태협은 얼마전 이윤수 의원과 구천서 전의원이 표대결을 벌여, 구 전의원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세계연맹은 2001년 총회에서 김회장이 4년간의 임기를 보장받은 상태다. 문제는 국기원인데, 김회장은 지난해 ‘운동연합’ 회원들이 데모를 벌이던 도중 국기원장에서 물러났다.
2001년 태권도 사태의 후유증은 컸다. 우선 김회장과 함께 한 시대를 이끌어온 엄운규 국기원 부원장이 운동연합의 퇴진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한 엄부원장의 오랜 측근이었으며, 국가대표선발전 당시 심판배정 등에 관여했던 임윤택 세계연맹 사무차장은 업무방해 및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그런가 하면 김회장과 아들 정훈씨는 사법 당국의 내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종우(75) 국기원 부원장은 엄 전부원장과 함께 ‘김운용 신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회장을 태권도계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며, 대태협 국기원 세계연맹의 요직을 거치면서 태권도 분파를 통합해 새롭게 형틀을 만들고 경기화를 추진했다. 엄부원장이 조직을 담당했다면, 이부원장은 김회장의 브레인이라는 것이 태권도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김회장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3월5일 기자는 국기원으로 이부원장을 찾아갔다. 그와의 네번째 만남이다.
“나는 더 이상 욕심 없다”
―태권도계가 1년째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김운용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일부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소문에는 별소리가 다 나오지만, 내가 사람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건 곤란합니다. 나로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니까 뭐라 말하기도 어렵고요. 여하튼 문제가 많은 사람(임윤택 세계연맹 사무차장)을 데려다놓은 것이 화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조직이든 어려움에 처하면 원로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부원장께서는 태권도계가 내분을 겪는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태권도계를 이만큼 만들어놓은 사람은 김운용씨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추진력으로 오늘날 태권도가 이만큼 발전했다면, 설사 과오가 있더라도 업적을 인정해야 되지 않냐는 거죠. 그래서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용서하는 기분으로 문제를 풀어라. 태권도계를 감시 감독하는 기구를 만들어서 김운용씨가 탈선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했던 거죠. 그건 김운용씨 없는 한국 태권도는 아직 이르다고 보았기 때문이에요.”
국기원 이사회는 최근 김회장의 복귀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것이 또 한번 분란을 초래했다. 2002년 1월 김회장의 재추대를 결정한 국기원 이사회를 향해 ‘운동연합’은 “이사들도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김운용 회장이 국기원장에서 물러날 때 이부원장이 배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데모대가 김운용씨 집과 의원회관으로 몰려간다고 하니까 그건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김운용씨가 나름대로 태권도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대외적인 망신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사표를 받고 나중에 조용해지면 컴백시키고 싶었어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의원회관으로 찾아가서 ‘우선 조용하게 수습하자’고 하니까 그 양반이 사표를 써주더라고요.
나는 사표를 학생대표한테만 보여주고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이 사람들이 데모대 앞에서 읽고 텔레비전에 비치고 그랬어요. 그래서 막 화를 내면서 ‘왜 나를 잔인한 사람으로 만드느냐’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부원장께서는 김운용 회장의 국기원장 복귀에 찬성하는 거죠.
“당연하죠. 국기원과 세계연맹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김운용씨는 지난해 세계연맹 총회에서 4년 동안의 합법적 임기를 보장받았잖아요. 그러니까 국기원장을 맡는 게 좋다는 얘기인데 운동연합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나는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더 이상 뭘 하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운동연합’ 사람들이 진정으로 한국태권도를 위한다면, 김운용씨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태권도계에서는 김운용 회장을 박정희 전대통령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이 컸던 만큼 과도 많았다는 지적인데, 부원장께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 양반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 태권도가 세계화될 수 없었어요. 태권도인들이 어디 가서 돈 10원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윗사람의 힘을 빌려 이 만큼이나마 만들어놓았잖아요. 국기원 지을 때 태권도인이 모금한 게 얼마인지 압니까? 몇 백만원인가 그래요. 창피한 일이죠. 태권도인이 모두 나서서 그것밖에 구하지 못했다니까요. 하긴 나부터도 안 냈으니까. 돈 낼 생각은 안하고 김운용씨 얼굴만 쳐다보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60년대만 해도 태권도 사범들은 깡패 취급을 받았어요. 내가 명색이 지도관 관장을 지냈는데 42세가 돼서야 장가를 갔습니다. 주먹 쓰는 놈한테는 딸도 안 준다던 시절이에요. 그런 수준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태권도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김운용씨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김운용씨의 과는 간단해요. 그 사람이 지나치게 ‘나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열심히 뛴 건 사실이지만, 태권도인들이 도와주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어요. 태권도인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또 한가지 김운용씨는 떼거지로 달려드는 데 겁을 내는 사람입니다. 조직력이 강하다 싶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져요. 그러다가 그쪽 얘기만 듣고 문제가 많은 사람을 두둔하다가 대가를 톡톡히 치렀잖아요.”
―부원장께서는 ‘운동연합’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동연합’이 태권도 발전을 생각하기보다 자기들 감정에 치우친 측면이 있어요. 내가 그 사람들을 잘 모르니까 뭐라고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소문은 많지만 남의 말만 듣고 떠들 수는 없잖아요.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자기들이 김운용을 먹여 살리고 김운용이가 자기네 돈을 집어삼킨 것처럼 말하는데 그건 말이 안돼요. 지금은 그런 걸 따져보았자 감정만 상할 뿐입니다. 이쯤에서 서로 잘못한 건 덮어두고, 잘한 것만 얘기하는 게 좋아요.”
이부원장은 말을 아꼈다.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 때는 이따금씩 김회장을 날카롭게 공격했지만, 이번엔 철저히 김회장을 보호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것은 그가 최근 김회장의 국기원장 복귀를 추진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적으로 김회장을 추종하는 세력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일종의 ‘비판적 지지론’인 셈이다.
―김운용 회장은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IOC위원으로 활발하게 스포츠 외교를 전개했습니다. 그렇다면 태권도계에서 추앙을 받아야 마땅한데 현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인데요. 우리가 그림 전체를 보고 얘기해야지 일부분만 보고 말하면 안돼요. 나도 그 양반한테 서운한 게 많지만 그건 개인적인 문제예요. 태권도 전체의 덩어리가 어떻게 굴러가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김회장의 가족이 태권도계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래도록 집권하다보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일개 군인도 장교가 되면 그 부인이 부대원들로부터 사모님 대접을 받잖아요. 하물며 대장이면 말할 것도 없죠. 군 전체를 통할하는 사람의 부인이니까. 요즘 뉴스에 보면 대통령 아들에 관한 게이트가 쉴새 없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구체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고, 그냥 그 정도에서 판단해보세요.”
―지난 번에 인터넷 사업과 관련해서 개인적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국기원과 세계연맹 사이트를 만들어서 태권도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내가 예산을 뽑아보니까 한 8500만원 들어가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업자는 그걸 다 설치해주고 3000만원을 더 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국기원과 세계연맹이 앉아서 1억1500만원을 버는 거잖아요. 그래서 담당자한테 얘기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변이 없어요. 소문에는 나하고 누구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안된다는 거예요. 어찌나 기분이 나쁘던지 ‘이게 무슨 감정 가지고 할 일이야? 사적인 문제를 왜 끌어들여’ 하고 따졌지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김운용씨 아들이 이미 계약을 끝냈다는 거야. 돈도 내놓았다가 찾아갔다는 소리까지 들리잖아. 그래서 ‘내가 명색이 국기원 부원장이고 김운용씨 참모인데 나를 속여? 이런 나쁜 놈의 새끼들’ 하고 한바탕 욕을 퍼부었지.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나도 이해했을 거야. 아들이든 누구든 사전에 계약했으면 도리가 없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간단해요. 혼자 하는 무술은 고달프거든. 상대가 있어야 서로 경쟁력이 생기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겁니다. 다른 도장에서는 ‘사람 죽는다’고 반대할 때 우리(지도관)가 먼저 겨루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제시대 부민관이 있던 장소에서 시합을 열었는데, 우리쪽 아이들이 다 이기다시피 했어요. 다른 도장은 시합을 안 했으니까 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처음엔 지도관의 겨루기를 두고 다른 도장에서 말들이 많았어요. 사람이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 그때 내가 ‘죽긴 뭘 죽어, 밥을 죽여?’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다른 도장들도 노상 질 수는 없으니까 겨루기를 적극적으로 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 도장이 맥을 못 추는 신세가 됐어요.
저는 처음부터 태권도의 가치를 높이려면 경기화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자가 나와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건 미미한 비율이었어요. 그보다는 싸우면서 선수들의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스포츠 전체를 볼 때 수기(手技)는 권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족기(足技)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경기에서는 주먹을 못쓰게 하고 경기 규칙도 발공격 중심으로 만들었고….
이걸 가지고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발만 쓰는 건 아닌데 주먹 점수를 없애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해서 지금은 주먹을 쓰되 얼굴을 때리면 반칙을 주도록 고친 겁니다. 어떤 운동이든 스포츠로 발전하려면 뭔가 독특한 것이 있어야 돼요. 말하자면 축구는 발로 차는 거고 농구는 손으로 던지는 게 특징이죠. 그래서 우리는 발 중심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만일 태권도를 서로 엉겨붙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경기로 만들었다면 아주 지저분한 싸움이 됐을 거예요.”
―경기화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싸움을 붙여보니까 재미있거든.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을 하잖아. 솔직히 태권도를 배웠다는 놈들이 밖에서 매 맞고 들어오면 기분 나쁘잖아. 그래서 매맞지 말라고 시킨 건데, 아이들이 단순히 손발만 빨라지는 게 아니더란 말이에요. 제일 중요한 건 순간 포착력이 빨라진 점입니다. 결국 경기화가 선수들의 말초신경까지 발달시켜놓은 거죠. 저는 실전 경험이 많아서 그걸 잘 알아요.”
―안전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초창기엔 검도 선수들의 투구를 헤드기어로 이용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때리는 사람은 손에서 피가 나고, 맞는 사람은 투구가 흔들려 머리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펀지를 넣어서 헤드기어를 만들었죠.”
―저는 초등학교 때 1년쯤 태권도를 배웠는데, 당시 사범이 태권도는 자기수련이라고 자주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요즘 들어서 태권도가 경기화에 치중하다 보니까 자기수련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옳은 얘기예요. 태권도는 스포츠로 인격을 기르는 운동이기 때문에 도(道)라는 말을 붙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게 더 흥미있고 즐길 수 있느냐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혼자 하는 품세는 고독하고 힘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겨루기를 시작한 거고. 겨루기를 하다보면, 이기면 이길수록 신이 나고, 지면 그날밤 잠을 설치면서 자기가 어떻게 맞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단 말이에요.”
태권도는 유난히도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지금까지 한국 태권도계를 이끌어온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채명신 최홍희 김용채 김운용 최세창 이필곤…. 또한 역대 대통령들도 태권도에 상당한 관심을 쏟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태권도인들이 시범을 보인 것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와 군대에 태권도가 집중적으로 보급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태권도가 ‘국기’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직후부터 맺어진 정치권과 무도계의 특수한 관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태권도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운용씨를 회장으로 모신 건 그 양반이 당시 태권도인들보다 좀 낫고, 자금 등 여러가지로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볼 때 태권도인 중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가진 역량이 뻔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용한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이용당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 시점에서 득과 실을 따져보면 득을 많이 본 게 사실입니다.
군사혁명 시절에는 채명신 장군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돈 한푼 내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김용채씨를 앉혔죠. 그 사람은 나름대로 국고지원도 받고 해서 기초를 잘 닦았어요. 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요로에 많은 협조요청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 뒤를 이어 김운용씨가 큰 일을 했고….”
―태권도계 인사들을 보면 과거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태권도를 한 사람들이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로 해서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누르려는 저의가 숨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건 말하기 곤란한 얘기인데, 상대방이 수 틀리게 나올 때를 대비해 제어장치로 갖다놓은 사람도 있고…. 결국 그 사람들은 죄가 없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죄인이죠.”
―총회나 이사회 같은 데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로 눈에 거슬릴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내세우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거죠.”
―태권도계의 해묵은 파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얼마전 대한태권도협회는 우여곡절 끝에 두 정치인이 맞붙어서 구천서 전의원이 회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정치인이 회장을 맡는 건 문제가 없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일하기 나름이죠. 처음에는 누구나 잘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들어와서는 공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태권도인들 스스로 태권도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태권도인들한테 몰매 맞아 죽을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심사비를 규정대로 받는 도장이 아마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반성할 때가 된 겁니다.”
―1980년에 태권도계의 국보위 정화자 명단을 이부원장께서 직접 작성하신 경위를 설명해 주세요.
“국보위에서 정화자 명단을 내라고 통보가 왔잖아요. 그러니까 김운용씨가 고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나하고 의논해서 명단을 작성하고, 원로들도 다 퇴진하기로 결정한 거죠. 무더기로 사람을 자르고 원로랍시고 눌러앉아 있으면 말이 안되니까 저도 일선에서 물러났던 거죠. 저는 그 뒤에 김운용씨가 이규호 장관한테 얘기해줘서 컴백했고요.”
한국태권도는 현재 수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권도가 건국 이래 최고 히트를 기록한 문화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태권도 인구는 무려 5000여 만명에 이른다. 태권도가 민간외교에 기여한 부분과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에 끼친 효과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태권도의 역사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는 좀더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태권도는 앞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이자 스포츠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태권도의 미래를 어떻게 보세요.
“현 상태로는 암담합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쌀도 씻을 줄 모르고 조리질도 할 줄 모르면서 밥이 되다 질다 탔다며 불평하는 꼴이죠. 남이 한 걸 우습게 생각해선 안돼요. 나도 내가 제일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겁니다.”
―태권도를 취재하면서 연구가 부족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국기원에서 연구를 담당하는 부원장으로서 책임을 느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느껴야죠. 그런데 말이 그렇지 뭐 하나 되는 게 없어요. 내가 벌써부터 다 준비해두었어요. 전자호구도 만들고 기술연구도 해놓고…. 1년에 4500만원인가 들여서 했는데, 그뒤에 지원이 끊기고 채택도 안하고 그래서 다 집어치웠어요. 이 동네가 생각보다 아주 복잡해요.”
―자금지원이 안되는 건가요.
“어느 정도 결과물이 나오면 그걸 받아들여서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데 그게 안돼요. 그러니까 ‘이까짓 거 해서 뭘 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저도 편히 지낼래요.”
―앞으로 한국이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을 지켜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세요.
“용서하고 단결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아까 얘기한 대로 ‘죄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거예요.”
오전 9시10분부터 시작한 인터뷰가 5시간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이부원장은 얘기를 끊지 않기 위해 점심으로 잡채밥과 잡탕밥을 시켰다. 최근 들어 디스크 치료를 받느라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다는 그였지만, 단 한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질문에 답했다. 태권도와 택견의 차이점을 설명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녹슬지 않은 몸동작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태권도가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김운용의 후계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이부원장. 그는 태권도인들의 관용과 김회장의 사심 없는 결단을 동시에 촉구하고 있었다.
―지난해부터 김운용 회장의 행보를 보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오히려 긁어부스럼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재를 털어서 국기원을 지었다’는 발언이 대표적인 경우 아닌가요.
“옛날에는 장관보다 청와대 경호실이 더 셌잖아요. 김운용씨가 경호실 출신이니까 웬만한 업자한테 부탁하면 알아서 다 지원했거든. 땅은 양택식 서울시장한테 얘기해서 기부체납 형식으로 구했고, 건축자재는 도처에서 공짜로 얻었어요. 내가 그때 김운용씨 밑에서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내막을 잘 알아요. 김회장은 자기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생각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데,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죠. 설사 자기 공로가 있더라도 겸손하게 나왔으면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었는데, 그 양반은 그걸 못해. 꼬투리 잡힐 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나도 솔직히 그게 불만이에요.”
―이번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보여준 김회장의 행동을 어떻게 보세요.
“한번쯤 그 양반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겠죠.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 개최지 선정 때부터 여러가지 스캔들이 나왔잖아요. IOC위원장 경선과정에서 IOC측과 갈등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발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해야죠. 그 양반은 직선적인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지 못해요.
나는 하도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그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김운용씨는 승부욕과 추진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에요. 한국선수단의 성적이 부진하면 가만히 있질 못해요. 국내에서 아들 문제로 시끄러운 데도 욕을 먹어가면서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을 칭찬했다면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이부원장은 김회장의 남다른 승부욕을 강조하면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털어놓았다. 이 내용을 곱씹어 보면, 한국이 얼마만큼 엘리트 체육에 중독돼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선수단의 메달 수가 적으니까 김운용씨가 심통이 나서 나를 쳐다보고 말도 안해요. 그때 한국이 다른 종목은 다 작살나고 마지막으로 태권도에 희망을 걸었거든요. 김운용씨 얘기가 ‘우리가 4체급에 출전해 금메달 3개를 땄지만, 나머지 4체급은 쿼터제한 때문에 아예 출전도 못했으니까 금메달 4개를 양보한 거나 다름없다’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주최국 호주가 챙길 걸 다 챙기니까 김운용씨가 열통을 터뜨린 겁니다.
내가 그때 세계연맹 부총재로 태권도 경기의 기술적인 관계를 다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심판을 배정할 때 ‘이 사람은 된다 안된다’ 하는 것을 내가 다 결정하다시피 했어요. 심판들한테 노골적으로 한국을 봐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배 울리라고 등을 친 거죠. 눈치 빠른 놈은 금방 알아듣지만, 둔한 놈은 그런 걸 잘 몰라. 봐달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공정하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막상 한국이 지면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왜 그 따위로 심판을 보느냐?’고 소리를 지르는 거죠.”
―한국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공정하게 평가받도록 힘을 썼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그렇지. ‘공정하게 해라’ 이렇게 얘기하면 다 알고 눈치채거든. 이런 공작을 내가 책임지고 했잖아. 그런 게 없었으면 금메달 하나나 둘밖에 못 따요. 다른 나라가 아니고 한국이니까 그게 통한 거죠.”
―저는 한국선수가 뛴 결승전 세 게임을 모두 지켜보았는데, 한국선수가 내용적으로도 이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결승만 보면 안되죠. 전체적으로 잘 되려면 예선전부터 신경써야 해요. 그래서 그게 간단하지가 않은 겁니다. 소위 작전이라는 게 있어요. 강적은 미리 죽이는 거지. 우리가 죽이는 게 아니라 심판이 죽이는 거예요. 심판에게 ‘공정하게 하라’고 말하면 알아서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예선전부터 ‘가지치기’를 해야지 안하면 나중에 곤란해져요.”
이부원장의 입에서 ‘가지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승부조작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라이벌이 될 만한 상대를 일찌감치 탈락시키는 편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선수에게 강한 A선수가 있다면, A를 예선에서 떨어뜨려 한국 선수의 우승을 돕는 것이다. 체육계에서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당시 일부 투기종목에서 이러한 ‘가지치기’가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경우는 없었다.
―2001년 국가대표선발전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도 그게 문제가 됐잖아요. 당시엔 심판들이 특정학교 출신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설퍼서 그렇죠. 얕은 수를 쓰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다 들통이 나잖아요.”
―한국이 태권도 강국의 위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지치기’도 불가피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무서운 사람이 심판으로 나가면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한국하고 결승에 붙은 선수를 그냥 죽이려고 드는 것도 곤란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느 나라가 강하다는 걸 파악하고 시작해야죠. 심판을 배정하는 것도 기술이에요. 어느 나라가 나오는데, 어느 나라가 결승에 가면 안된다. 그러니까 누구 누구 이렇게 해서 죽이는 거죠.”
―태권도는 예절을 중시하는 스포츠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건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불공정 행위가 아닌가요.
“심판이 장난치면 승부가 뒤바뀝니다. 한번 못 봤다 그러면 그만이고, 자꾸 감점을 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심판 한 명을 이거(손으로 목을 가로지르며) 시켰잖아요. 그 사람이 한국 여자선수에게 감점 줘서 패하게 만들었거든. 내가 심판들 모아놓고 ‘감점 절대 주지 마라. 주의를 줘라, 두 번 주의 주고 세 번째 가서 경고를 줘라’고 말했는데도 그가 감점을 준 거야. 그 경기 끝나고 ‘너 그렇게 하면 안돼. 너 감정 있어?’ 하고 소리치니까 벌써 초죽음이 되더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심판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가지치기’는 냉정하게 볼 때 승부조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공개되면 한국 망신이지만 그건 현실이에요. 예를 들어 한국과 독일이 제일 강할 경우 둘이 붙었는데 독일을 지게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이전에 독일이 결승에 올라와서 한국과 대결할 경우 불리하겠다는 감이 들면 미리 죽이는 거지.”
―그건 공정한 승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원장님의 말대로라면 한국이 승부조작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태권도 강국의 명성을 유지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됩니다.
“이건 국익과 관계되는 거예요. 민감한 사안입니다. 한국 태권도가 망가지면 난리가 나고 선수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요. 요즘 외국선수들 기술이 휙휙 올라가거든요. 한국이 태권도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예요. 쇼트트랙의 김동성도 다 그런 거죠. 페어플레이는 없어요.”
―올림픽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대회에서 이런 불문율이 적용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주도권 잡은 나라가 언제든지 강국이 돼요.”
스포츠에 강국의 논리가 작용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 일본 유도는 대진표가 불리하다며 재추첨을 실시한 일이 있다. 또한 88서울올림픽 때 한국의 어느 복싱선수는 불리한 경기를 펼치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레슬링에서는 유령선수가 대진표에 무더기로 등록되는가 하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심판매수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구기종목에서도 경기장소 경기시간 대진표 심판배정 등에 강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게 상식이다. 스포츠맨십은 스포츠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경기 외적인 요인은 끊임없이 승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일본 유도도 텃세를 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원장께서는 강자라면 그 정도의 특권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누려도 된다는 게 아니고요. 문제는 민족혼을 살려야 한다는 거죠.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국민적 사기가 크게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이런 얘기가 인터넷에 뜨면 이거….”
―부원장님이 생각하기에 우리 태권도가 만약 특권 없이 공정하게 대결하면 몇 체급이나 금메달을 딸 것 같습니까.
“잘 봐서 반타작이고 그렇지 않으면 40% 정도. 열 체급 중 네 개는 욕심이고, 여섯 개는 분산될 겁니다. 그러니까 열 개 중에서 세 개쯤 딸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부원장은 자신이 간접적으로 승부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지만, 공정한 행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해 태권도계가 파문에 휘말린 직접적인 도화선도 국가대표선발전에서의 편파판정 시비였다.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애매한 판정기준을 보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대비책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태권도 판정기준을 보니까 ‘강하고 정확하게 가격할 때는 득점’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렇게 해놓으면 심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가 한 단계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가 과학의 과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전자호구(護具)를 개발했어요. 그걸 채택하면 판정시비는 대부분 사라질 텐데 그걸 안해요. 인간이 인간을 못믿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지금은 심판도 못 믿는다 그겁니다. 불행한 얘기지만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고 봐요. 전자채점기로 해서 때리는 대로 점수를 주는 거예요. 그냥 스쳤다고 점수가 올라가는 게 아니고 파워를 과학적으로 측정해서 처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내에서는 어느 정도 공정성을 회복할 수 있겠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한국이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복싱의 경우 컴퓨터 채점이 도입된 이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차원에 머무르면 태권도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하면 감정이 생기거든요. 한국을 잡으려고 이렇게 했다느니, 때린 것만 보고 맞는 건 보지 않는다느니…. 모든 사람이 그런 편견을 갖게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기계에 의존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 이런 얘기죠.”
―승단심사에서도 불공정 시비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협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도장은 물을 먹는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자꾸 의혹이 증폭된다고요. 그러니까 기계로 판정하자는 거죠. 기계가 결정하면 깨끗이 해결되잖아요. 불합격했다고 기계를 때려부술 수도 없을 테고.”
―지난 번에 승단심사와 심사비 문제 등을 언급하면서 ‘태권도인 전체가 범죄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를 포함해 모두가 죄인이라는 얘기죠. ‘죄 없는 사람은 이 여자한테 돌을 던지라고 했더니 한 사람도 던지는 사람이 없더라’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그런 심정으로 살아야죠.”
이종우 부원장은 1928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이부원장의 부친은 경기도 이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왔는데,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다고 한다. 1949년 이부원장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무도계에 입문했다. 미술대를 지원한 것은 ‘전과’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부원장께서 무예를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해방 직후죠.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죠. 그곳이 바로 일제시대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부와 권법부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권법부에서 가라테를 배운 거죠. 권법이 바로 일본 가라테거든요. 일본말로 부르면 국민감정도 있고 하니까 권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장군의 아들’이나 ‘시라소니’ 같은 영화를 보면, 광복 직후의 주먹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도 가라테를 배웠나요.
“내가 알기로 깡패 중에 가라테를 제대로 배운 놈은 없어요.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몽둥이로 때리니까 강해 보였던 거지, 진짜 실력으로 붙었으면 김두환이고 시라소니고 형편없었을 걸.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한 ‘쪼다’들이 주먹계에 들어간 경우는 간혹 있었고.”
―당시 가라테는 당수(唐手)로 불렸죠.
“당수(唐手)로 쓰는 사람도 있고 공수(空手)라고 쓰는 사람도 있었죠. 당수나 공수를 일본말로 옮기면 가라테가 되거든. 모두 같은 내용인데 도장별로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 권법이다 당수도다 공수도다 그렇게 불렀어요.”
―부원장께서는 조선연무관에서 가라테를 배우다가 지도관을 새로 여신 겁니까.
“초창기 조선연무관은 유도가 중심이고 한쪽 구석에 권법부가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연무관이 6·25 때 부역을 했습니다. 조선연무관을 관장하던 이병석씨는 민족주의자였거든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곤란하니까 권법부 사람들이 다른 장소를 구해서 떨어져 나간 거죠. 을지로 3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이 지도관 자리였어요.”
―무술단수로 부원장님은 몇 단까지 땄습니까.
“1년 넘어서 초단이 되고 2단이 되고 3단이 되고 그러면서 6·25가 났어요. 서울이 수복되고 4단 심사를 보는데 그때 내가 맹장수술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실기시험을 보았고, 나는 추천으로 4단을 땄죠. 나중에 협회를 만든 뒤에는 9단까지 올라갔고요. 처음엔 권법 1단이었는데, 나중엔 태권도 9단이 된 겁니다. 명칭이 그렇게 바뀌었으니까.”
태권도계에서 무술단수를 얘기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게 김운용 회장의 실제 태권도 실력이다. 태권도인들은 김회장을 ‘명예 10단’이라고 부르는 데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가 태권도계에 기여한 부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 태권도 실력에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김회장이 태권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무도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 양반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혼자서 독습을 많이 했거든요.”
―김회장의 태권도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 태권도인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경동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있던 윤병인 선생이 조선연무관에 나왔다가 나중에 종로 YMCA 체육부에 권법부를 만들었는데, 김운용씨가 거기서 운동을 했어요. 김운용씨가 경동고등학교를 나왔잖아요. 저도 정확한 단수는 잘 모릅니다. 김운용씨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없고요.”
―태권도인들은 김회장에게 ‘명예 10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내가 지도관에 있을 때 그 양반에게 6단을 선물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실력이 없어도 공로가 있으면 단을 주고 그랬어요. 단이라는 것이 꼭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연륜과 인격을 상징하던 시절이었죠.”
―저는 무술계를 잘 모르지만, 1단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지금은 그렇게 돼있지만 그때는 달랐어요. 인격적으로 훌륭하면 관장이 단증을 줄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준으로 그걸 따지는 게 이상한 거예요. 일반인들은 기술이 있어야 단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또 단증과 실력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요. 10년을 배우고도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많거든요. 나는 유도 단증이 없지만, 유도 4단을 이긴 적도 있어요.”
이부원장은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회장이 태권도계에 들어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부원장은 당시 김회장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의 분파를 정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태권도인들은 그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박종규 경호실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박종규씨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옛날 복싱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 될 때도 박종규 실장의 후원이 컸어요.”
―박실장이 국가대표 선수들한테 용돈도 많이 주었다면서요.
“그 양반이 보이지 않게 우리나라 체육발전에 크게 기여했어요. 내가 알기로도 신세진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도 컸습니다. 내가 김운용씨에게 협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니까 김운용씨 말이 ‘세 분한테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내 짐작에 세 분은 박종규 실장, 김종필 최고위원,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 같아요.”
―김회장이 박대통령과도 직접 통할 정도였나요.
“그게 아니고 공직에 있으니까 허락을 받은 거겠죠. 박종규 경호실장은 직속상관이고, JP는 여러 차례 수행한 분이고, 대통령은 최고 의결권자이니까 그랬겠죠. 김운용씨가 그때 세 분을 직접 만났는지는 모르겠어요.”v ―국제태권도연맹(ITF) 최홍희 총재는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계에 들어온 것 자체가 정치적 음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요. 답변할 가치도 없어요. 천하에 못된 자가 그 자에요. 모르는 사람은 최홍희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그거 아주 쓸개 빠진 자입니다. 최홍희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요.”
이부원장은 ‘최홍희’라는 이름이 나오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광복 이후 강호의 고수들이 저마다 도장을 차리던 시절 두 사람은 돈독한 관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부원장은 최홍희 총재를 ‘사기꾼’ 수준으로 평가절하했다. 무슨 까닭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최홍희라는 인물이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홍희씨는 1918년 함경북도 화대에서 태어나 일본중앙대학과 서울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뒤에 대한태권도협회로 바뀜)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육군 6군단장을 지냈으며 가라테 유단자였던 그는 군대시절 자신만의 태권도 체계를 정리했다.
최씨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상당수 남측 태권도인들은 최씨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공금유용 혐의를 받고 귀국조치를 당했으며,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반면 최씨는 2001년 발간된 ‘태권도와 나’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과 부딪히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캐나다로 간 최씨는 박정희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1980년대엔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며 군부대를 중심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섰다. 이러한 최씨의 ‘친북행보’ 때문에 남한에서는 최근까지도 최홍희라는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다. 최씨는 자신이 1966년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로도 활동했지만, 1973년 김운용씨가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출범시킨 이후 국제경쟁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남측의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를 둘러싼 남북한의 주도권 싸움은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4월11일 최홍희 총재가 중심이 됐던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됐습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씨로 나와있고요. 이건 인정하시죠.
“최홍희가 독단적으로 ‘택견’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태권(跆拳)’으로 했던 거죠. 태권은 지축 태(跆)와 주먹 권(拳)을 합한 뜻입니다.”
―최홍희씨가 쓴 ‘태권도와 나’를 보니까 당시 여러 명이 모여서 협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태권도’라고 정한 걸로 나오던데요.
“반대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만장일치는 아니죠.”
―최홍희씨는 군복무 시절인 1949년부터 9년 동안 자신이 연구해서 현대적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평가할 가치가 없어요. YMCA에 창무관을 만들고 경동고등학교에서 김운용씨에게 가라테를 가르친 분이 윤병인씨인데, 그 양반이 일본에서 최홍희를 만나서 같이 하자고 그랬는데 최홍희가 안했어요. 그 뒤 최홍희가 부대에서 여러가지를 조합해 무술을 만들었는데, 그게 모두 일본 거예요. 가라테를 기본으로 만든 거죠. 가라테를 기본으로 하고 명칭만 태권이라고 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가라테라고 인정한 우리가 더 순수하죠. 최홍희가 나중에 이박사(이승만 대통령)한테 ‘태권’ 휘호를 신청했는데 이박사가 안 써주고 그랬어요.”
―최홍희씨 책에는 이대통령이 시호를 써준 것으로 나와 있던데….
“거짓말이에요. 그건 최홍희가 쓴 겁니다. 글씨가 최홍희 글씨예요. 태권도라는 휘호는 나중에 김운용씨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받았어요. 만약 최홍희가 대통령한테 그때 휘호를 받았다면 근거가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우리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휘호를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지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겁니다. 당시에는 최홍희가 휘호를 받았다는 소리를 한번도 꺼낸 적이 없어요. 만일 받았다면 왜 그때 공개하지 않았겠어요?”
―태권도 이전에는 태수도(跆手道)로 불렸습니다. 태수도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까.
“내가 한남동 외무부장관 공관 위에 살 때 최홍희 집은 그 건너 이슬람교회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자주 만났죠. 5·16이 나고 얼마 안됐는데,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어요. 그러다가 가라테(당수·공수) 하고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끼리 펴면 수(手)고 쥐면 권(拳)이니까, 쥔 거나 편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했어요. 그때 최홍희가 6군단장이었는데 권총을 차고 막 출근하려다 말고 나하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부원장께서는 태수도를 태권도로 바꿀 때 왜 반대했습니까.
“한번 정했으면 됐지 왜 자꾸 바꾸느냐고 따졌죠. 그랬더니 최홍희가 체육회에 압력을 넣고 해서 사태가 아주 복잡했어요. 그때는 군사혁명 직후니까 군인들이 요직에 많았거든요. 나는 그때 ‘왜 체육회가 명칭까지 바꾸려고 드느냐’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태수도 간판을 내리고 태권도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태권도와 나’에는 태권도 통합논의 과정에서 이부원장께서 ‘태권도협회 간판으로 갈 수는 없다’고 맞섰고, 태권도와 태수도의 표결에서 태권도 표가 더 나오자 두 다리를 뻗고 울면서 ‘죽어도 가라테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친 놈이에요. 내가 그것 때문에 울고 그랬겠어요? 오히려 그 자식이 술만 먹으면 울면서 ‘나는 두 사람(이부원장과 엄운규 전부원장)밖에 없어. 나는 믿을 사람이 없어’ 그랬습니다.”
‘태권도와 나’에는 이부원장에 대한 최홍희 총재의 불편한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나온다.
‘이종우는 태권도 기술은 없고, 음모와 아첨의 명수이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접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우이동 일류 요정에서 주흥이 어느 정도 오르자 김종필 곁에서 뻔질나게 귀엣말을 나누었다.’
―최총재가 이부원장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제일 강적이니까 그랬겠죠. 내가 그 자한테 국제태권도연맹까지 만들어주었는데, 어떻게 나를 그렇게 모략하는지…. 최홍희는 태권도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어요. 국제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맨날 돈 받고 단증이나 만들어주는 수준에 그친 거예요. 그 바람에 처음에는 최홍희를 따르던 사람들도 나중에 다 떨어져 나갔잖아요.”
―최총재는 자신이 3선개헌을 반대하니까 박정희 대통령과 불편해졌고, 태권도계에서 조직적으로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거짓말이에요. 그 놈은 여기서 금방 이렇게 얘기했다가 ‘아까 얘기하고 다르잖아’ 그러면 ‘아까는 농담이고 이젠 진담’이라고 둘러대는 아주 소문난 놈이에요. 박정희 밑에서 말레이시아 대사까지 해먹다가 공금유용으로 귀국조치 당한 거잖아요. 그러다가 청와대 경호실 출신인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니까 슬그머니 도망간 거고. 나는 그가 거짓말한 증거를 수도 없이 댈 수 있어요.”
최홍희 총재가 북한 군부대를 중심으로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남북 태권도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한이 경기화와 건강증진에 역점을 두었다면, 북한은 실전용 무술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남북한의 장점을 조화시킬 경우 태권도의 경쟁력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최근 일부에서 제기된 남북한 태권도 통합론을 어떻게 보세요.
“나는 그걸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이북은 이북대로 세계연맹의 회원국으로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최홍희가 국제연맹을 이끌고 있지만, 그건 사조직이나 다름없어요. 우리가 사조직과 타협해서야 되겠습니까?”
―남북한 태권도의 장점을 통합할 필요는 없다고 보세요? 북한 태권도는 특히 실전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우리가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기술적으로 인정할 부분은 있다고 봐요. 하지만 실전에 강하다는 건 붙어봐야 아는 거니까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 힘듭니다. 현대 스포츠는 어찌 됐든 경기화(스포츠화) 수준에 따라 발전하는 겁니다. 과거에는 개인별로 운동하거나 국가별로 자기네 문화를 유지해도 됐지만, 이제는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경기화하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어요.”
―우리 태권도를 좀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북한 태권도의 기술적인 부분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고 보십니까.
“그냥 시범하는 것하고 실제로 겨루는 것은 달라요. 그래서 화면만 보고 북한 태권도의 기술수준을 평가하기가 힘든 거죠. 태권도에서는 어떤 사람이 발차기를 할 때 또는 주먹을 지를 때, 기술적인 문제보다도 눈의 발달이 중요합니다. 모든 신경계가 발달해야 되고, 감지기능이 빨라야 하거든요. 그런 것은 서로 겨뤄보기 전에는 아무도 몰라요.
한국 태권도는 경기화하면서 기본이 변질됐어요. 그래서 기본만 놓고 따지면 북쪽이 더 낫다는 주장이 나오는 겁니다. 그쪽은 경기화하지 않아서 덜 변질됐으니까요. 쉽게 얘기해서 때릴 때 힘을 빼야 하는데 요즘 태권도 하는 아이들을 보면 힘이 많이 들어가요. 이북 아이들도 힘이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체중을 실어서 때리느냐 주먹으로만 때리느냐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때릴 때 체중을 실어야 강한 펀치가 나오거든요. 무게하고 속도가 있으면 힘이 생기는 게 물리의 법칙인데 선수들이 그걸 망각하고 있어요.
또 우리 선수들은 뻗정다리 발차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무릎이 먼저 들려야 제대로 된 발차기가 나옵니다. 돌려차기를 할 때도 발만 도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돌아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는 선수는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스피드와 파워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요즘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고칠 게 수두룩한데 습관이 돼서 교정하기가 아주 힘들어요.”
―얼마 전 김운용 회장이 최홍희 총재를 초청하겠다고 밝혔잖아요.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막연하게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 만나서 뭘 하겠습니까. 지금도 부자간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있잖아요.”
광복 직후 한국 무술계엔 수많은 파벌이 존재했다. 그들이 저마다 도장을 열었는데, 상당수가 가라테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부원장은 이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엄운규 전부원장 고 이남석씨 등과 함께 실무작업을 맡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광복이 되고 나서 40여 개 파벌이 난립했다고 나오던데, 이걸 하나로 묶어서 새롭게 태권도의 틀을 만든 거죠.
“40여 개까지는 안됩니다. 지도관 청도관 무덕관 송무관 창무관 오도관…. 거기에서 파생된 유파까지 합치면 9개가 주축이죠. 우선 협회 기준으로 9개관으로 정리했는데 관 파벌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통합관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이종우한테 다 먹힌다’고 해서, 그냥 을지로 6가에 9개 관이 함께 쓰는 총본관 사무실을 얻었죠. 그때 9개 관이 모두 책상을 가지고 들어와서 복닥거렸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김운용씨하고도 의논해서 그때까지 각 관에서 심사를 보고 협회에 신청하던 단증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어요. 총본관을 폐지하고 단증 발급을 협회로 넘겨버린 거죠. 그러고 나니까 관장들은 맥을 못 추게 됐고 협회가 태권도의 기준이 된 거예요. 아직까지도 파벌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태권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무예에서 태권도의 원류를 찾는 부류고,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신종 무예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태권도계는 오랫동안 전자를 대변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통무예와 태권도를 연결시킬 만한 구체적인 물증이 빠져 있다. 반면 후자는 최근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가라테 유입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가라테의 잔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기화된 태권도는 가라테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품세 등에 아직까지 가라테적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먼저 과거의 관점으로 기술된 문헌을 살펴보자. 이종우 부원장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한 ‘국기 태권도 교본’(국기원, 2000)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시대적 환경이 무예를 중시한 관계로 무사단의 창설을 촉진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선배(帛衣仙人)’와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이들의 심신단련과 무예수련의 방법으로 태권도가 행하여졌다고 추찰된다.’
다음은 교육인적자원부 검정 중학교 체육1 교과서(교학사, 2001) 내용이다.
‘태권도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조상의 슬기와 얼이 담긴 우리의 전통무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무인들의 필수 무예로 성행하였으며, 시대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게 변하면서 발전해왔다.’
반면 국기원 기술심의회 김병운 의장과 경희대 최영렬 교수가 감수한 ‘신편 태권도 대백과’(2001)에는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광복이 되면서 태권도는 급진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일제치하에서 태권도는 가라테의 영향을 받아 상당 부분 변질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혼용되던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였다.’
또한 한국체육대학 태권도학과 안용규 교수는 ‘태권도 역사·철학·정신’(21세기교육사, 2000)에서 가라테 유입설을 이렇게 정리했다.
‘태권도가 가라테 품세를 활용했거나 도장의 명칭을 당수 또는 공수로 썼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부분이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한 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근대 이후에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태권도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기자는 대학 시절 한 학기 동안 택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의를 맡았던 사람은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도기현(현 택견계승회)씨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도씨는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부원장에게 택견 수련자들이 태권도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점을 조심스럽게 던져보았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죠. 나는 박자를 잘 몰라요. 하지만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잘 알아요.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요즘은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아요.”
―택견은 시작할 때 손을 앞쪽으로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하잖아요. 반면 태권도는 손을 허리에 대고 기마자세를 취하고. 그게 일본적 특성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적 기준으로 일본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법일 뿐이죠. 일본 가라테에도 다양한 유파가 있고, 그 중에는 자세가 다른 것도 많아요. 중요한 건 손발을 움직여서 얼마나 강한 타력을 만드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볼 때 택견에는 그런 타력이 없고, 가라테에는 있다는 거예요. 중국 무술에도 그런 타력은 힘들어요.”
―태권도는 직선적인데 택견은 곡선적이므로 택견이 전통무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힘은 거짓말을 못해요. 직선적이라야 강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먹으로 때리는 데도 여기서부터 둥글게 돌아나가는 것보다 곧장 나가야 파괴력이 있거든요. 어떤 경우든 곡선은 직선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맞는 얘기라고 봐요.”
―옛날 ‘무예도통지보’ 같은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동작은 직선보다 곡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건 간단한 신체운동이나 보건체조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물론 투기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됐겠지만, 과학적으로 발전한 가라테에 비하면 전혀 다르다고 봐요.”
―결국 부원장님께서는 기술적인 수준으로 평가할 때 한국무술이 일본무술보다 뒤떨어진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은 태권도가 경기화해서 앞서 있지만, 태권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일본이 훨씬 앞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니까요. 당시 한국무술은 송덕기 옹이 하는 택견뿐이었고요. 하지만 택견은 보건체조 수준이었어요. 그러니까 동작이 부드럽게 나가고 건강관리에 효과가 있는 거죠. 태권도도 강력한 힘을 가지려면 부드럽게 나가야 해요. 모든 펀치가 힘을 가지려면 미는 것이 아니라 탁 끊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부드러운 자세가 필요한 거고.”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