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9·28 서울 수복의 선봉 산악전의 명수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09-03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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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노도부대 병사들은 지칠 줄 모른다. 경사 30도가 넘는 오솔길을 병사들은 30kg이 넘는 완전군장을 착용한채 다람쥐처럼 기어오른다. 10분을 이렇게 기어오르다가 분대장이 손짓을 하자 병사들은 곧바로 근처 숲으로 흩어져 몸을 숨긴다. 조금 전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는데도 병사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금방 식별하기 힘들다. 주위는 그냥 낙엽과 바위, 빽빽한 소나무, 그리고 급경사를 이룬 언덕일 뿐이다. 3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1시 방향에서 바스락하는 소리가 났다. 네 명의 병사가 벼락같이 10여m를 전진하다가 다시 낙엽과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이 병사들은 노도부대에서 가장 강도가 센 훈련을 받는 17연대 수색중대 병사들이다. 이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모든 일과를 산에서 해결한다. 교육도 산에 올라가서 받고, 행군도 산을 타고 한다. 유사시에는 산을 타고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 가장 중점을 두고 하는 훈련이 바로 산타기 같은 체력훈련이다.

    육해공군 중에서 이 부대처럼 맨몸으로 승부하는 부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부대는 다른 부대처럼 기계화장비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에서는 탱크나 장갑차 같은 기계화장비가 그다지 필요없기 때문이다. 전군에서 그야말로 튼튼한 두 다리로 승부하는 부대가 바로 보병 2사단 노도부대다.

    이 부대의 훈련은 거의 중동부 전선 산악에서 진행되는데 봄, 가을이나 여름철 훈련은 그나마 견딜 만하다. 가장 혹독한 훈련은 눈덮인 산악에서 진행되는 혹한기 훈련이다. 이런 고된 훈련을 소화하다보니 신병들은 죽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병장을 달고 제대할 무렵이 되면 그야말로 강한 체력을 갖춘 병사로 거듭나게 된다. 또 가혹한 신체훈련 덕택인지 장병들 사이의 전우애도 각별하다.

    이 부대 수색중대에는 쌍둥이 병사가 네 명이나 있다. 주민경·주민구 상병과 유호민·유민호 일병 형제다. 이들은 각각 같은 날 입대하여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란성 쌍둥이인 주민경·민구 상병 형제는 “힘들 때 위로하고 서로 격려해줄 수 있어 좋다. 부모님도 면회오면 같이 볼 수 있어서 기쁘다. 하지만 고참들이 한 사람을 혼낼 때 옆에서 지켜보기가 가장 괴롭다”고 말했다. 이들 쌍둥이 형제들은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는다. 훈련도 같이 받고 심지어 외박, 휴가도 같이 나간다.



    육군 노도부대가 하는 교육훈련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일즈 훈련이다. 노도부대는 1998년 12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분대와 소대 훈련장에서 군 최초로 과학 훈련장비인 마일즈를 활용한 소대 훈련을 실시했다.

    마일즈장비(MILES: Multiple Integrated Laser Engagement System)란 다중통합 레이저 교전체제로, 전투에 사용되는 모든 화기에 레이저 발사 장비를 장착하고 병사들의 몸에 감지장비를 부착한 뒤 교전상황을 통합처리하는 소프트웨어다. 이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착안한 훈련체계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개별 병사는 K1소총에 레이저발사기를 장착한다. 소총을 쏘듯이 격발하면 실제상황과 똑같은 진동과 소음이 발생한다.

    다만 총구에서 나가는 것은 공포탄이고 실제로는 레이저발사기에서 레이저가 발사된다. 개인화기뿐만 아니라, 크레모아에도 이 장비를 붙일 수 있다. 또 전차끼리도 이 장비를 붙여 포격전을 벌일 수 있다. 이 레이저를 감지하기 위해 개별 병사들은 머리에 4개, 몸에 10개 등 모두 14개의 감지기를 붙인다.

    이렇게 실제 전장과 똑같은 지형에서 병사들은 전투를 벌인다. 엎드리라고 하지 않더라도 레이저를 맞지 않기 위해 알아서 엎드리고, 자기 몸도 스스로 숨긴다. 이때 레이저를 맞게 되면 맞는 위치에 따라 몸에 붙인 감지기가 사망, 중상, 경상을 표시하고, 지휘관은 그 통계를 자동적으로 집계할 수 있다. 이 훈련에서는 모든 것이 실제상황과 똑같다. 조준 사격을 피하기 위해 20보를 뛰다가 엎드리는 것도 병사들이 알아서 한다. 또 후송하는 것도 실제 상황과 똑같아 중상자로 처리된 병사는 1시간 안에 응급처치하지 않으면 사망으로 처리된다.

    노도부대는 이 시스템으로 중대 단위 전투도 치르고 있다. 습격조를 편성, 중대장 지휘소를 습격하여 적 중대장을 사살해서 부대 지휘체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중대장이 일반 병사로 위장하는 등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양상이 이 훈련에서 전개된다. 이 훈련에 참가한 노도부대 한 장병은 “마일즈 훈련은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과 같아 재미있고 열심히 하는 훈련 중 하나입니다. 총소리를 들으며 실제 상황처럼 훈련할 수 있기 때문에 훈련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교육효과도 큰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노도부대는 이 마일즈시스템 전문 훈련부대도 갖추고 있다. 바로 32연대 3대대가 해당 부대다. 이 부대는 인근 중동부 전선의 보병부대들을 해발 640m에 펼쳐진 길이 16km, 폭 8km 정도의 개활지에 불러 전차까지 동원한 마일즈 훈련을 펼친다. 이때는 크레모아와 연막이 터지고, 전차가 굉음을 내며 전진하고 소총수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총질을 해댄다. 32연대 3대대가 대항군을 맡고, 소집된 부대가 이를 공격하는데, 열이면 열, 공격부대인 훈련부대가 수비부대인 대항군(32연대 3대대)을 이기지 못한다.

    소집된 부대는 훈련 한번 치르고 나가는 부대지만, 항상 이곳을 수비하는 대항군은 그야말로 백전 노장들이기 때문이다. 32연대 3대대는 거의 매일 실전과 같은 마일즈 훈련을 하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다른 부대보다 훨씬 뛰어난 전과를 올릴 가능성이 많다.

    노도부대는 일과만 끝나면 장병들의 자유시간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지난 1999년 10월에 결성된 17연대의 록밴드‘POPS’는 장병들이 저녁시간과 휴일을 즐기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동아리다. 이 동아리는 드럼, 리드기타, 베이스기타, 보컬로 구성되어 있는데, 힘들고 바쁜 훈련 일정 속에서도 매주 세 번 이상 연습하고 있다. 지금은 자작곡까지 만들어 부를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 동아리를 결성한 초기 멤버들은 모두 제대하고 이제는 후기 멤버들이 이끌고 있다.

    육군 노도부대는 1947년 12월1일 대전에서 육군 두번째 부대인 조선국방경비대 제2여단으로 창설된 뒤 올해로 창설 55주년을 맞이했다. 이 부대는 창설 다음해인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여 21일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때 작전을 진압하는 모습이 ‘여름철 성난 파도와 같이 시원하다’고 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노도(怒濤)’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현재는 강원도 양구지역에 주둔하고 있으며 춘천 동쪽에서 한계령까지 중동부 전선을 수비하고 있다. 이 부대가 올린 주요 전과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당일인 1950년 6월25∼27일, 사흘 동안 18포병대대가 동해안에서 거둔 승리다. 당시 18포병대대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766부대, 549부대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에서 맞서 백병전까지 치르며 승리를 따냈다. 한국전쟁 개전 초 북한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국군의 주저항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당시 국군 8사단 10연대는 다음 작전을 위해 대관령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8사단 10연대를 지원하던 18포병대대도 사단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고향을 북쪽에 둔 서북청년회 젊은이들로 구성된 대대 장병들은 이를 어기고 인식표를 땅에 묻고 저항을 각오했다. 당시 장병들은 “만약 내가 전사하고 네가 산다면 이것을 가족들에게 전해달라”는 유언과 함께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종이에 곱게 싸서 서로 교환했다. 곧이어 포진지 앞까지 접근한 북한군과 18포병대대 장병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대대 장병들은 155mm 곡사포로 적군을 방어하다가 포진지까지 밀고 들어온 북한군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같은 진지 사수로 8사단은 병력을 온전히 유지하며 대관령으로 철수해서 다음 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6월25일 강릉, 29일 포항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최초 기도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노도부대의 다음 전과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국군이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노도부대 17연대가 화령장 일대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이들의 남하를 지연시킨 방어 전투다. 이 전투에서 17연대는 북한군 15사단이 속리산 동쪽 문장대 계곡으로 남하하여 상주 방면으로 침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화령장 북쪽의 금곡리와 동비령 일대에서 매복했다. 곧이어 북한군 15사단의 선두부대인 48연대를 기습하여 이들을 거의 괴멸시켰다. 그 결과 북한군은 상주지역 진출이 늦어져 문경지역에서 후퇴중이던 국군 2군단의 퇴로를 막으려 했던 당초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 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전투에 대한 공로로 국회의 만장일치로 17연대는 연대장 이하 전장병이 일계급씩 특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다음은 1950년 9월18일부터 9월28일까지 전개된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이다. 인천 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총사령부는 서울만큼은 한국군이 탈환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이때 한국군은 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부대가 해병대 1개 연대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도부대 예하 17연대를 상륙군 부대에 포함했다. 이때 연대장이었던 백인엽 대령(당시 수도사단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자리에서 “전공이 많은 사람이 수도를 탈환해주어야 하겠다. 연대장을 하겠냐 아니면 사단장을 하겠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떻겠습니까? 책임을 지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어 “어떤 연대를 지휘하겠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백대령은 “창설 당시부터 함께한 제17연대를 가지고 가겠다”고 대답하여 17연대가 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1950년 9월18일에서 19일까지 이틀간 인천에 상륙한 17연대는 서울 영등포 남쪽으로 진격하여 9월26일 서울 동쪽의 348 및 292 고지를 탈환한 뒤, 망우리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탈주로를 차단했다. 특히 면목동 방면으로 진출한 1대대는 경춘가도를 따라 퇴각하는 적 탱크 10대를 노획하고 영관급 이상 장교와 당간부가 타고 있던 트럭 1대를 공격하여 모조리 생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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