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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서울 수복의 선봉 산악전의 명수

9·28 서울 수복의 선봉 산악전의 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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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 장병들은 155mm 곡사포로 적군을 방어하다가 포진지까지 밀고 들어온 북한군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같은 진지 사수로 8사단은 병력을 온전히 유지하며 대관령으로 철수해서 다음 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6월25일 강릉, 29일 포항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최초 기도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노도부대의 다음 전과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국군이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노도부대 17연대가 화령장 일대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이들의 남하를 지연시킨 방어 전투다. 이 전투에서 17연대는 북한군 15사단이 속리산 동쪽 문장대 계곡으로 남하하여 상주 방면으로 침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화령장 북쪽의 금곡리와 동비령 일대에서 매복했다. 곧이어 북한군 15사단의 선두부대인 48연대를 기습하여 이들을 거의 괴멸시켰다. 그 결과 북한군은 상주지역 진출이 늦어져 문경지역에서 후퇴중이던 국군 2군단의 퇴로를 막으려 했던 당초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 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전투에 대한 공로로 국회의 만장일치로 17연대는 연대장 이하 전장병이 일계급씩 특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다음은 1950년 9월18일부터 9월28일까지 전개된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이다. 인천 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총사령부는 서울만큼은 한국군이 탈환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이때 한국군은 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부대가 해병대 1개 연대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도부대 예하 17연대를 상륙군 부대에 포함했다. 이때 연대장이었던 백인엽 대령(당시 수도사단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자리에서 “전공이 많은 사람이 수도를 탈환해주어야 하겠다. 연대장을 하겠냐 아니면 사단장을 하겠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떻겠습니까? 책임을 지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어 “어떤 연대를 지휘하겠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백대령은 “창설 당시부터 함께한 제17연대를 가지고 가겠다”고 대답하여 17연대가 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1950년 9월18일에서 19일까지 이틀간 인천에 상륙한 17연대는 서울 영등포 남쪽으로 진격하여 9월26일 서울 동쪽의 348 및 292 고지를 탈환한 뒤, 망우리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탈주로를 차단했다. 특히 면목동 방면으로 진출한 1대대는 경춘가도를 따라 퇴각하는 적 탱크 10대를 노획하고 영관급 이상 장교와 당간부가 타고 있던 트럭 1대를 공격하여 모조리 생포했다.



신동아 200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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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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