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같지만 목적지 다른 6·15남북공동선언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조기붕괴 가능성은 높지 않으며, 북한은 자체의 힘으로 변하기 어려운 정권이라는 전제하에서 햇볕론에 입각한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
2007072007년 07월 05일전략과 일관성 부재로 변죽만 울린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1988년 2월~1998년 2월의 10년은 대한민국이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전환되는 역사적 시기였다.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근대화와 고도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히고 시민사회의 급속한 성장으로 군부 권위주의 정부가 더 이상 통…
2007062007년 06월 04일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1979년 부마항쟁에 이은 박정희의 사망은 권위주의체제의 극점이 사라진 사건으로 민주화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체제 내 자유파인 민주공화당과 온건 반대세력인 신민당은 국회에서 권위주의 폐기와 대통령 직선제에 합의했다. 군부는 온건…
2007052007년 05월 02일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북한 경제
1970년대 국제정세는 미국과 소련의 핵 군사력 균형에 따른 평화공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 일본과 중국의 국교 수립,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 등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한도 그 흐름에 적절히 대응할 필요…
2007042007년 04월 11일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갑작스럽게 예고된 ‘중대뉴스’에 맞춰 박정희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
2007032007년 03월 09일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2006년 12월5일 대한민국은 세계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1억달러 초과 달성일이 박정희 시대인 1964년 11월30일이므로 43년 만에 빛나는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이 목표는 실적 지상주의에 의해 달성됐…
2007022007년 02월 12일‘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5·16은 한국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예고한 정변이었다. 이로써 고려조의 무신통치가 끝난 뒤 수백년 동안 지속된 민간 우위의 정치·문화 질서가 파괴됐다. 대한민국 건국의 첫 번째 대안으로 마련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쿠데타로 인해 일단…
2007012007년 01월 08일미국이 버린 제2공화국, 나약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제2공화국은 1960년 4·19혁명의 결과 수립돼 5·16군사정변으로 붕괴했다. 한국 헌정사상 유일무이하게 내각책임제를 택한 제2공화국은 1960년 8월23일 출범한 장면(張勉) 내각이 이듬해 5월18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내각 총사…
2006122006년 12월 08일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휴전 이후 한국정치는 6·25전쟁의 연속에 불과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선의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전쟁 위협은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진행경로를 규정했다.미국의 아이젠하워 …
2006112006년 11월 07일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전쟁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레닌은 이 관계를 “전쟁은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라고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했다. 두 혁명가는 전쟁과 정치가…
2006102006년 10월 09일사회주의경제 노선 투쟁이 정치권력 투쟁으로
6·25전쟁 이후 북한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북한이 본 피해는 엄청났다. 굳이 북한의 공식문헌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미국인이 묘사한 책에도 당시 북한의 실태는 ‘단테의 지옥편’과 …
2006092006년 09월 08일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공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이 주도한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이 이처럼 신속히 개입한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도발을 방치할 경우 소련이 자유세계에 대한 또…
2006082006년 08월 14일미국 방조와 소련 동조의 합작품, 6·25는 내전 아닌 국제전
수정주의자들은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전쟁이 남북한의 대결적 정부수립 이후 조성된 내전적 상황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는 이른바 내전론을 1980년대 이래 제기해왔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948년부터 1…
2006072006년 07월 21일좌익 모험주의와 우익 폭력의 대충돌, 제주 4·3과 여순사건
1947년 3월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시가행진을 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했다.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구경꾼이었으므로 무고한 양민이 희생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3·…
2006062006년 06월 12일‘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1948년 8월15일,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호(號)’가 출범했다. 대한민국, 그것은 한민족 최초의 근대국가였다. 그리고 그 첫 정부의 산실은 한국 최초로 선거를 통해 구성한 제헌국회였으며 첫 수장은 …
2006052006년 05월 02일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광복 이후 3년간의 한국정치는 제1공화국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현대 한국민족주의의 최대 과제인 민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것을 위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는 모두 …
2006042006년 04월 10일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전까지는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방침은 ‘우의적 친선’이었다. 노동운동도 미군정에 협력하는 산업건설노선에 따라 전개됐다. 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문제에 대한 결정(이하 모스크바…
2006032006년 03월 06일협의단체 선정 놓고 입씨름만 하다 끝난 미소공동위원회
한국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하 ‘모스크바결정’)은 남북한에서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남한의 우익은 “신탁통치 주창자는 소련이고, 모스크바결정을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는 소련의 앞잡이이자 매국노이며, 반탁운동은 즉시독립을 …
2006022006년 02월 16일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그날이 오면’·심훈)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해방가’·박태원 작사, 김…
2006012006년 01월 13일미·소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 모스크바 3상회의의 허구성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인 1945년 12월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외무장관이 회합했다. 당시 미국 대표는 번스(Byrnes) 국무장관이었으며, 소련은 몰로토프(Molotov), 영국은 …
2005122005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