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제13장)봄의 개울이 남으로 흘렀다. 창경궁 담장으로 접어든 한림은 걸음을 멈추었다. 북쪽 박석고개 마루를 넘어 곧게 뻗어 내려오던 궁궐의 동쪽 담장이 그 종점을 앞두고 안으로 살짝 꺾여 들어간다. 담장 안에서 나란히 흘러내려오던…
2012092012년 08월 22일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최재형(崔才亨·독립운동가)은 창문을 열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크고 높은 러시아풍 창틀의 머리는 딸들의 눈썹처럼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너머로 사위어가는 별빛을 빨아들이며 암청색 허공이 차츰 어둠을 벗어나고 있다. 방에는…
2012082012년 07월 24일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제11장)밤9시의 관철동(貫鐵洞) 거리는 낮의 활기가 채 꺼지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밤의 열기는 아직 정점에 이르려면 멀었다. 서울 북촌의 중심, 관철동의 야경은 낮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또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일요…
2012072012년 06월 21일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제10장)김옥균(金玉均)은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무덤에 비(碑) 하나를 얻었다. 1904년 3월에 세워진 그 비의 후면을 가득 채운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
2012062012년 05월 22일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제9장)조선군사령관 우도궁태랑(宇都宮太郞)은 식탁에 홀로 앉아 술잔을 들었다. 정오 무렵이다. 이른 봄의 용산(龍山) 관저는 물오르는 남산의 기슭 아래 호젓하다. 대낮의 독작(獨酌)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점심상을 앞에 두고 몰려…
2012052012년 04월 20일부자유친 군신유의
(제8장)1920년 4월. 한림은 신문의 창간 특집 이틀째 기사를 보고 있다. 거기에 고종(高宗)과 순종(純宗) 부자의 이야기가 크게 실렸다. 기미년 3월의 장례와 소요는 벌써 1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2012042012년 03월 20일일본 소년 손으로 운반된 독립선언문
(제7장)총독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오후 4시를 지날 무렵 남대문역전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대로는 밀려드는 군중으로 출렁댔다. 물이 넘치는 둑을 막기라도 하듯 가로변을 따라 조선군사령부 제78연대장 장굴전(長堀田) 대좌가 지…
2012032012년 02월 22일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제6장)1920년 3월 31일. 봄비를 맞으면서 한림은 야트막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남으로 안국동(安國洞) 사거리를 향해 뻗어 내린 길은 곧고 길다. 이틀 연속 내린 비에 기온은 떨어졌다. 화동(花洞)의 기와집 낮은 담장 …
2012022012년 01월 19일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제5장)신년호 신문은 무사히 나왔다. 새해에 인사이동 하는 총독부 관리와 판사들 명단이 1면에 그득하다. 그 사이사이 조선인 이름도 보인다. 사회면에는 인사동의 조선극장에 격문이 살포된 사건 이후 검거인원이 속속 불어난다는 소식이…
2012012011년 12월 21일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제4장)한통의 전화에 평화는 깨어졌다. “이런 제기, 또 압수야.” “여보, 큰일 났소. 압수요 압수.”웅성거림 속에 먼발치서 편집국장의…
2011122011년 11월 22일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제3장)거리는 찬비에 젖어있다. 한림은 장교정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섰다. 왼편으로 바라보면 청계천과 그 너머 북촌이고 오른편은 황금정과 그 너머 남촌이다. 올 때와는 반대로 길을 잡아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남산을 바라보는 걸음은 …
2011112011년 10월 19일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제2장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한림은 행랑채 지붕보다 높은 솟을대문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대문은 가마가 드나들 정도로 높고 넓다. 종2품(從二品) 이상의 벼슬아치만이 탈 수 있는 초헌(?軒)이 25년 전만 해도 매일처럼 이 문간…
2011102011년 09월 20일‘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제1장겨울의 개울이 얕게 흘렀다. 서린동(瑞麟洞)을 지나던 신문기자 한림(韓林)은 걸음을 멈추었다. 축대 아래 개울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흰 치마저고리와 쪽찐 머리들 뒤로 하천부지는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청계천은 장…
2011092011년 0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