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판사’의 한끼 | 따뜻한 모닝 빵을 구워온 2년
2년이 조금 못 되는 기간 매달 혼밥판사 이야기를 써왔지만 사실 나는 3년 반 전 판사직을 그만두고 행정부 관료로 새 출발을 했다. 판사로서의 삶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판사로 지내면서 내 나이와 깜냥에 비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20년 06월 08일[혼밥판사] 제주도에 가면 두부를 드세요
일곱 살 때였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친구 집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하는 흑백 텔레비전 안에서 대여섯 명의 산타클로스가 염라대왕 앞에 좌우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색하고 화를…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20년 05월 10일[혼밥판사] 코로나 시대의 혼밥
코로나19 시즌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기차가 고스란히 재난영화 세트 속으로 들어가 정차해 버린 것 같다. 예전에는 매번 내 자신이 김밥 속 단무지처럼 느껴지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요즘은 늘 앉아 간다. 직장에서는 화장실에서 볼 일 …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20년 04월 14일‘별 헤는 밤’과 피자
나는 지금 거실에 놓인 테이블 앞에서 컴컴한 유리문 밖을 내다보며 피자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고기, 햄, 올리브,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흔히 배달시켜 먹는 브랜드 피자다. 조금 식었지만 늦은 밤에 …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20년 02월 29일결혼식장에서下
이날 지인의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했다가 팔짱을 끼고 나갔다. 가정법원에 온 사건 중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혼식 전날 파혼해 하객을 돌려보내거나 어느 한쪽이 예기치 않게 식장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20년 01월 02일판사의 ‘이혼주례’
지인의 결혼식에 가는 길.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깨끗한 도심 거리가 아름다워서 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었다. 머리칼을 쓰다듬고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상쾌했다. 햇살도 적당히 따뜻하고 밝아서 샤워하듯 온몸에 …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12월 12일카레우동과 독도
주말이면 동네 일본 식당에서 가족들과 카레우동을 즐겨 먹었다. 어릴 적에는 카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맛과 냄새가 강하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일본에서 살다 온 분이 일본 가정식 카레를 예찬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 카…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11월 10일커피와 소주, 냉정과 열정 사이
나는 지금 커피전문점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돼지갈비, 곰탕, 칼국수에 대한 글을 쓸 때는 돼지갈비를 뜯으며, 곰탕 국물로 가글을 하면서, 칼국수 면발을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의 흰 수염처럼…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10월 06일100년 식당의 30년 셰프
호텔 카페 유리벽 밖으로 불볕더위가 작열한다. 그랜드피아노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나는 청포도 빙수를 먹고 있다. 동그란 토기 그릇 위로 연녹색 빙수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표면에는 절반으로 잘린 청포도 알맹이가 언덕을 오르는…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09월 14일이혼법정의 눈물 젖은 도시락
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집에서 직장까지 한 시간 걸린다. 처음과 끝은 차들이 오가는 도로변을 달리지만 그 사이 대부분은 개천가에 난 자전거 도로를 달린다. 달릴 때는 대개 ‘멍 때리고’ 있다. 하루 계획을 세운다거나 뭔가를 골똘…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08월 10일푹 곤 고기 조각처럼 부스러진 사실관계
일요일 밤늦게까지 판결문을 썼다. 지엽적 쟁점까지 거론하면서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는 바람에 기록이 수천 페이지로 불어나 판결문 쓰기가 까다로운, 판사들의 은어로 ‘깡치’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판결문이 50페이지를 넘어섰다. 금요…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06월 13일홍어를 문설주에 걸어둔 까닭
법원 근처에 한정식집이 하나 있다. 주인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잘 웃는 중년 아주머니다. 한정식도 괜찮다. 그런데 내가 그 집에 갈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홍어애탕이다. 홍어애는 홍어 간을 말한다. 이 집에서 홍…
정재민 전 판사, 작가2019년 05월 10일누구에게나 자신의 순대가 있다
검정 뚝배기 속에서 흰 사골육수가 목욕탕처럼 부글부글 거품을 뿜어낸다. 한가운데에서는 들깻가루가 곧 폭발할 화산의 재처럼 들썩거린다. 국이 식기를 기다리면서 젓가락으로 당면순대 하나를 꺼내서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 고소한 맛과 함께…
정재민 전 판사·작가2019년 04월 04일“집구석에 통닭 한 번 사들고 온 적 없어요”
야근을 마치고 집 안에 들어서니 컴컴한 거실에 익숙한 양념냄새가 진동했다. 불을 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 양념통닭 상자가 놓여 있다. 군데군데 양념이 묻은 흰 상자 안에는 통닭 서너 조각이 황금 알처럼 반짝거렸다. 턱 아래…
정재민 전 판사·작가2019년 03월 11일라면중독 軍검사가 라면 끊은 사연
몇 번을 주저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분식집에 들어가서 라면을 시켰다. 써야 할 판결문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심하고 몸의 컨디션이 나쁜 날에는 오히려 내 몸을 거칠게 다루는 습성이 있다. 라면같이 짜고 몸에 부담이 되는 음식을…
정재민 전 판사·작가2019년 02월 05일“어른은 짜장을 입가에 묻히지 않는다”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쓰지 못하고 ‘자장면’이라고 써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짜장면’이라고 ‘짜’에 힘주어 발음하지 않고 ‘자’장면이라…
정재민 전 판사·작가2019년 01월 13일호로록~ 마성의 맛과 ‘초짜’ 도둑
식당을 찾아 거리를 걷는데 늦가을 냉기가 외투 속을 파고든다. 올해는 여름이 그토록 치열하더니 겨울은 또 얼마나 냉혹하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쌀쌀한지. 이런 날에는 칼칼한 국물에 젖은 칼국수의 치명적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 나는 속…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12월 16일이혼소송 이기고 눈물 펑펑
이번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할까 고민하며 법원 뒷골목을 걷다가 내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돼지갈비 냄새였다. 은근한 열기 속에 각종 양념 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수록 그 냄새가 강하게 진동했다. 돼…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10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