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傳
좌하변에 집을 짓고 수성전을 펼치던 도림은 외벽을 두껍게 쌓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견고하게 진행되는 그의 행마엔 섣불리 중원으로 진출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둑판 중앙에 함정을 파두고 현란하게 상대를 유인하던 개로왕은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9월 16일모리스 쿠랑傳 ❷
드 플랑시 공사는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질 무렵에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쿠랑 통역관. 이건 우리 프랑스와 일본 정부 사이의 문제일세. 조선인 몇 명이 죽었다고 해서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어…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8월 10일모리스 쿠랑傳 ❶
쿠랑이 한양 명례방 언덕에 위치한 뮈텔 주교의 저택 문을 다급히 두드린 건 깊은 새벽이었다. 그가 프랑스 외교관의 특권을 내세워 야행까지 결심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건 지금 그를 휩싸고 있는 의혹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7월 09일낙랑공주傳
낙랑국 공주인 나 최이란은 고구려의 왕자 호동에게 이 답신으로 영결을 고한다. 왕자는 이 글을 다 읽기 전 한 번은 기쁠 것이며 다른 한 번은 슬플 것이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이 왕자가 자초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대는 끝내 내 시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6월 10일단군왕검傳
절크장 톡토가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카르하미르강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검은 용’이라는 뜻의 카르하미르강 위로 마지막 노을이 장엄하게 지고 있었다. 부하들과 임시 막사를 세워 야영 준비를 마친 그는 부대 전체의 화살통을…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5월 08일원효대사傳
남양만에서 당나라로 향하는 배가 천천히 출항했다.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용왕님께 바친 젯밥을 노리던 갈매기 떼가 포구로 어지럽게 날아 앉았다. 배웅하던 사람이 하나둘 사라지고 갈매기마저 죄 흩어졌지만 원효는 의상을 싣고 서해 저편으…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4월 07일선화공주傳
홀몸으로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젊은 왕비는 바로 사비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절에서 며칠 더 묵었다. 주지에게 부탁해 승사 한 채를 통째로 빌린 그녀는 자신을 찾는 금마 땅 백제 백성들을 일일이 친견하며 복을 빌고 상을 내렸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3월 13일평강공주傳
홀몸으로 성밖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평강은 쉼 없이 눈물 흘리며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비단이나 모직물로 된 화려한 의상에 익숙했던 그녀 눈에 칡으로 만든 갈옷을 걸친 평민의 세계는 무채색이었다. 색이 사라진 세상 안에서 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2월 13일을지문덕傳
남쪽 방향으로 날린 요맥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맥은 오랜 세월 아르막 너케르와 함께 초원을 누빈 동료이자 언젠가 너케르의 혼을 천신(天神) 탕게르에게 인도해줄 용감한 매였다. 바람을 등진 너케르가 머리털을 뽑아 하늘에 날리며 세 번…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9년 01월 13일정의공주傳
공주로 살아온 나의 파란만장한 삶도 머잖아 작은 봉분으로 남겠구나. 막내아들 빈세(貧世)야. 오래전 세상을 뜬 너의 아비이자 나의 남편 안맹담(安孟聃)이 네 이름을 왜 그리 지었는지 아니? 부처님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 가…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11월 28일소리꾼 송실솔傳
기름 먹인 우의를 걸치고 머리엔 갈모까지 쓴 송실솔(宋)이 폭우를 헤치고 절에 도착하자 어린 사미승이 유령을 본 듯 얼어붙었다. 턱 끈을 풀어 갈모를 벗은 실솔이 속삭였다. “놀라지 마. 사람을 찾고 있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11월 07일가수재(賈秀才)의 유랑
경기도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부임한 두 달 뒤 심재필은 왕의 밀지를 받았다. 젊은 왕은 허수아비이니 안동 김문이나 반남 박문이 보낸 것으로 보는 게 옳았다. 그 내용이 수상해 인근 고을 원들에게 알아보니 모두 같은 밀지를 받아놓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10월 10일여름 여자, 황진이 가을이 오기 전 떠난 이유
“나의 여름이 끝났구나.”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속삭인 황진이는 손가락으로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녀를 시종하던 어린 관기 초옥은 상자를 가져다 그녀 옆에 놓았다. 늦여름 매미 소리가 영통사(靈通…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9월 02일‘戰神’ 이순신을 흠모한 왜장 와키자카의 독백
누군가를 나만큼 미워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만큼 누군가를 미워하며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증오로 치를 떨다가도 말할 수 없는 흠모의 기분에 빠져 차 마시는 기쁨조차 잊을 수 있을까? 일흔두 살이 된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8월 08일‘나는 거지로소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양성 전체가 나의 집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열광했고 내 손을 잡아보고 싶어 안달했으며 내가 부르는 노래에 덩실덩실 춤췄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연암 아우는 이야기의 힘이라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7월 08일임진왜란과 허균
왜란 발발 직전 임진년, 조선의 봄은 불온했다. 무능한 왕은 조정 안에 똬리를 튼 당파 싸움을 다스리지 못했고 명종 때부터 전국에 암약하던 화적 떼는 점점 조직화돼 관가까지 습격하곤 했다. 야금을 어기고 한양 도성의 밤을 지배한 주…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6월 06일‘김유신’이라는 이름의 영생 찰나를 산 필부의 유쾌함
이조판서에 올라 인사권을 틀어쥔 큰형은 집안의 골칫거리였던 날 진천현감으로 내려보냈다. 한양 사대문 밖을 나가본 적 없던 난 낯선 충청도 풍광에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권문세가의 막내가 원으로 왔다는 소문에 인근 고을 수령들이…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5월 06일조선 화가 최북傳
그림에도 운명이란 게 있을까? 조선의 떠돌이 화가 최북(崔北)은 오사카 도톤보리(道頓堀) 운하 옆 유곽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해가 지며 켜지기 시작한 청등과 홍등들로 물빛이 화려하게 번져갈 무렵, 포근한 4월의 봄바람이 나…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4월 01일평양 사내 이충백傳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고니시 부대가 물러간 뒤 평양에서 임진년 전쟁이 끝났다. 성엔 평화가 찾아왔다. 1601년생인 이충백(李忠伯)에게 전쟁은 낯선 과거여서 잠자리에서 듣는 무서운 얘기로 여겨질 뿐이었다. 평양성을 차지하고 조선 백성들을 주륙했다는 왜군…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3월 01일불과 모래의 기억
651년 가을밤 샤아드 앗 살림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를 만난 건 기적이었다. 이제 그 기적이 낳은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 당시 부왕 야즈데게르드 3세가 이슬람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18년 0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