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4
술에 취한 혜선이 몽롱하게나마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녀는 박혜선과 어깨동무한 채 철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 철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박혜선의 키는 혜선보다 훨씬 컸고 완력도 강했다. 겨우 어깨동무를 풀고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9월 14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3
“여름방학 때 학생회 농활 참가할 거니?” 마주 앉은 지훈을 향해 속삭인 성혜선이 우울한 표정으로 어두운 카페 밖 풍경을 응시했다. 지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선이 다시 물었다. “오늘처럼 거리 투쟁에 계속 참여할 거고?” 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9월 07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2
열차 밖으로 나온 이토는 코코체프의 인도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굼뜬 데다 조슈번 출신 사무라이 특유의 조심성마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긴장의 끈을 놓은 그는 혼잡한 역사 주변을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8월 31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1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는 화가 치밀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일본 관료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열차 안으로 진입했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다는 이토 히로부미 전 일본 총리대신은 두 번째 칸에 비스듬…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8월 24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1-4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말씀하신 건가요? 길가메시 왕에 대한?” 예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닥터Q가 어느덧 다 비운 와인 병을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길가메시 서사시’죠! 후대의 신화에 영감을 제공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8월 17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1-3
“수메르에서 벌어진 인류 최초의 숙주 전쟁이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예림이 닥터Q에게 되물었다. “뭘 놀라십니까? 두 분 모두 이미 겪으셨으면서! 숙주에 숨어서 움직이는 자를 잡으려면 똑같이 육화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8월 10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1-2
시인이기도 한 닥터Q는 특히 신화에 대해 말할 때 유난히 흥분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등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은 신들의 전쟁과 인류 멸망에 대한 신화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형을 찾아 연대기적으로 소급해 올…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8월 03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1-1
“세 종류의 이동자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야외 테라스 난간을 등지고 앉은 닥터Q가 심홍색 노을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선예림이 근무하는 대학 인근 카페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 소음이 닥터Q의 음성을 빨아들여 그 안에…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7월 27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4
그날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민항기 한 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조용히 이륙했다. 안에는 납치된 아이히만과 그를 체포한 모사드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동시에 견제하던 아르헨티나 정부가 알았더라면 절대…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7월 20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3
세자르의 셋방은 꼭대기 층이었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연 순간 인기척을 느낀 세자르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곧이어 방문 옆에서 튀어나온 괴한 둘이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복싱으로 단련된 세자르는 유연한 동작으로 이를 피했…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7월 13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2
추격자가 히펠에게 육화한 건 크림힐트 작전 직전이었다. 숙주인 히펠은 원래 아돌프 아이히만에 육화된 이탈자에게 접근하기 위한 중간 다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바 브라운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히틀러를 만나본 추격자는 생각을 바꿨다. 정…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7월 06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1
베를린 지하에 매설된 폭탄을 터뜨리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하달됐을 때 히펠 소령은 이를 거부했다. 독일군 내에서 암약하던 반(反)나치 조직원인 소령은 기폭장치를 모두 제거한 직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는 패전 직후 미군에 투항해 적극…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6월 29일[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9-4
낄낄대던 요괴가 조롱하듯 외쳤다. “하나의 차원에 동일한 존재가 둘이 될 순 없느니라.” 팔짱을 끼고 고개 숙인 제베가 속삭였다. “알아. 그 순간 차원이 분열하기 시작했겠지.” “멋지도다! 네 녀석 내가 하는 걸 이미 해냈었구나.…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6월 22일[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9-3
헤라트 성곽 위로 떠올랐던 초승달이 지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군막 곳곳에 서 있던 초병이 교대됐고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제베는 우울했다. 요괴의 시도가 성공해 행성의 차원이 파열되고 나면 지구는 미지의 세계로 연결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6월 15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9-2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불만 다루며 사는 거?” 상대의 질문에 타파히는 더듬이를 떨어 신경 쓰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새로 출현한 추격자는 아직 타파히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한 눈치였다. 용융기 앞에 앉은 타파히는 상대를 언제 끊…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6월 08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9-1
꿈이 문제였다. 파동화된 존재에게 잠은 사라졌고 꿈꾸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추격자 타파히 히후 길힐은 그렇지 않았다. 타파히는 꿈을 꿨고 전생을 희미하게 기억해 냈다. 육체를 벗어난 영원의 존재에게 그건 광기가 빚은 악몽이었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6월 01일[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8-4
안식의 성단에 도착한 파동은 곧바로 개체성을 버리고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고단했던 그의 마지막 여정은 그렇게 의미 있게 마감됐지만 대신 새로운 추격자가 된 으름스는 광활한 우주를 떠돌아야 했다. 으름스는 행성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5월 25일[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8-3
비욱의 시신은 급속히 말라갔다. 수액 순환이 멈춘 둥근 눈은 차츰 광채를 잃더니 이내 쪼그라들어 땅 밑으로 사라졌다. 숙주로부터 빠져나온 으름스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파동이 다가와 말했다. “이제 떠나자. 이 행성엔 희망이…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5월 18일[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8-2
낯선 파동이 접근해 으름스 곁에 이르렀을 때 밤의 행성은 두 태양 사이 나선 궤도 안으로 막 진입하고 있었다. 지옥이 시작되는 초입이었다. 파동은 무미건조하게 메시지를 낭독했다. “이탈자에게 경고한다. 즉시 돌아가라. 이동은 금지됐…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5월 11일[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8-1
차원 이동이 금지됐다는 소식은 빛의 속도로 전파됐다. 우주 전체로 퍼져나갔던 이동자들은 ‘안식의 성단’으로 불린 고향 은하로 돌아가 영원한 적멸에 들었다. 밤의 행성에서 머물고 있던 이동자 으름스 르므 으함은 이탈자가 되고 싶진 않…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05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