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 먹던 것을 먹고 하던 일을 하고
며칠째 호우가 계속되었다이따금 창틈으로 물이 새 휴지를 덕지덕지 붙여두고 자야 했다꿈에서는 뭉뚱그려진 사람의 뒤통수가 나왔다 뒤따라 걷다 보면 제법 큰 물웅덩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힘껏 뛰어도 반대편 땅에 닿지 않을 것 같아 매번 …
류휘석2023년 08월 17일[시마당] 산책과 대화
거위가 목놓아 울고 있다사육장에서전쟁을 원하는 자는 따로 있어북쪽에는북쪽 정서가 있고사람들이 기웃대고 있다근린공원 입구에경찰이통제선을 치고 있다이곳을 지날 때면언제나널 떠올렸어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별나다 이상하다 난 내…
최지인2023년 06월 19일[시마당] 화음 넣기
주말 오후마다 모여 합주를 했다 공연 계획도 없이 매주 연습곡이 늘어나고 있었다 기타 두 명 베이스 한 명 드럼 한 명에 보컬은 따로 없었다 밴드를 결성할 때부터 넷의 노래 실력이 비슷비슷했다 곡이 정해지면 자원을 하거나 돌아가며 …
곽문영2023년 05월 17일[시마당] 나의 믿음
나무를 다 가지면내 주변에서시원한트럭이 가고나무 위의 침팬지가떨어져 내리고잔디를 깎던 사람의 휘둥그런 안경에나무를 가진 내가풀로 날리고상상이 이토록 푸르고개도 가고상상이 짖고 물고 달려가나를 넘어뜨리고나는 내 몸의 뼈를 다 버려보기…
유이우2023년 04월 18일[시마당] 영화처럼
내 삶은어떤 지망생이 연출한 영화일까지나치게 허술한데때로 너무 완전한영화의 주제가 슬픔이라면나의 고요는반지하 화장실에 오래 놔둔 살구 비누이기를더운물에 불려서꼭 필요한 일에만 녹여서 쓰는살구가 아니라살구를 가까스로 따라 한 냄새따라…
변윤제2023년 03월 16일[시마당] 너무 많은 나무
나의 착하고 불성실한 친구 장은 죽어서도 공방에 간다실은 별로 안 착하고 꽤 성실한 것 같기도 하다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그래서 나무가 된 거야?죽은 장이 비웃는다 나무가 된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무가 되어서도 여전히 숨…
한재범2023년 02월 16일[시마당] 일정한 모형
내 손에 바구니가 있다 갈색의 커다란 바구니다 내가 주워 담아왔던 것들이 전부 이곳에 들어있다 깨진 액자와 식칼과 책과 문장과 사랑과 너와 우리가 한데 엉켜있다 나는 아주 열심히 바구니를 채웠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싶은 마음을 웃…
김상희2023년 01월 10일[시마당] 축적과 이동
오늘 네게 닿지 않고 떨어진 눈이 다시 눈으로 돌아올 겨울의 미래남극에 내리는 눈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새로운 속성으로 발견되었다. 고래와 갓난아이에게서도공통적으로 흩날리는 흰 눈과 공장처럼 이동하는 너의 미래 …
남현지2022년 12월 19일자카르타
내 지난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진심으로 바랍니다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계절은 한 개의 여름이 전부인 곳에서상대에게 인사로 전하는 말그 나라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대당신의 몸이 만드는 그늘 안에아름아름 누워서 배웠다귀여워해 …
전욱진2022년 11월 07일아름다운 새를 위한 시간
시작에 외눈박이 물고기가 있었다. 당신은 종종 그의 비늘에 입을 맞추고는 했다. 입술을 가져다 댈 때 그는 지느러미를 흔들어 보였다. 물고기는 다 자라 예쁜 새가 되었다. 새는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의 끝은 구슬이었다.그 새는 줄에 …
유혜빈2022년 09월 28일여름 휴가
한적한 곳을 찾아연잎이 마련해준 물방울 방에 묵었어요또르르륵 또르륵,마음 가는 대로 마음을 굴리다가쌓여 있는 물결을 뒤적이기도 했어요매번 바람에 흩어지는 이야기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을 땐 밖으로 나와푸른 잎 테두리를 느긋이 걸었어요잎…
길상호2022년 09월 15일물의 언어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수의를 입은 눈보라 물가에는 종려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록이 초록을풍경이색채를간밤 …
장혜령2022년 08월 15일서머 에비뉴에서의 다짐
지난봄 그대에게 쓴 나의 글자들은끝내 뜻을 만들지 못하고 구름이 되었다나를 따라 여름에까지 이르러서는간밤에 마저 내리는 비가 되었다비 갠 이튿날은 늘 별 뜻 없이 맑고손잡은 가로수들을 따라 집을 나서면걸음은 서머 에비뉴 끝의 가을로…
심재휘2022년 07월 14일은월
마스크는 표정의 속옷질문을 던지고 재빨리 훔쳐봤지흐려지는 옆얼굴을물그릇에 손을 담그면 반쯤은 젖은 기분반쯤은 말라가는 기분불분명한 미소의 이음새를 따라투명한 점선을 그렸다.감춰진 마음의 각도를 만져보려고흰 장막을 들춰 밤의 안쪽을 …
이혜미2022년 06월 10일비보이
비보이컵밥이 좋아,자판기가 던져주는 하루가가볍게 음미하는 삶에 오우, 소리 질러버튼을 누르면 위이잉 쏟아져 나오는바코드 찍혀 있는 하늘 바다 들판뜨거운 물 부어서2분 30초 기다렸다가 먹는어디까지 날아오를까.동전 하나로 되살아나는 …
김유섭2022년 04월 11일낮을 위한 밤, 밤을 위한 낮
어느 날 이마 위에서두 별이 동시에 떠 있었다하나는 낮이고하나는 밤이었다낮을 위한 밤밤을 위한 낮이었다‘위한’이란 말이바이올린처럼 보였다
임선기2022년 02월 15일황색선을 넘나들며
빨간 벨 위에 모포를 깔고선잠을 청한다가느다란 수화기에숨 가쁜황색선을 넘나들며검붉은 안개 속으로가냘픈 수관(水管)에 호흡을 기댄 채작다란 신음 속으로 몸을 던져축 처진 숯덩이 위에허기진 가슴 속으로새벽의 허허(虛虛)름이 스며들어텅 …
민병문 소방위2022년 01월 13일거울 앞에서[시마당]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하루 종일 만지는 사람이 듣는 누군가의 비밀들거울과 거울의 대화라는 착각이 길어질수록머리카락은 다만 잘려나간다사실 비밀은 없다아니 비밀이 아닌 것이다다만 거울 앞에서 비밀이 되는 것이다들은 자가 거울 속에 갇혀 …
박세미2021년 12월 15일방법의 숲[시마당]
잠시 방향을 잃은 거라고 한다. 조만간 다시 방향을 찾게 된다는 얘기일까. 나는 배낭을 벗어 바닥에 놓아두고. 정류장은 온통 수풀투성이야. 잠시 잃은 거라고 해. 그런 말들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이쪽으로 오라는 말이 들리는 것…
윤은성2021년 11월 06일[시마당]형태를 완성하기
이응을 연습합니다.이응 이응 이응 이응굶지 않고 잠 잘 자고 입추 아침 바람 입안에 넣고이응 다음 넘어가면미음 미음 미음 미음이응에 못을 네 개 이응 안에 박고 멀어져라 멀어져 미음을 만들 겁니다.나의 단단한 못물려받은 뼈를 사용할…
김복희2021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