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 선(線)의 미학
하늘과 땅의 접지에 지평선이 누워 있다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선의 비의(秘意)찔레의 5월은 벌떼 붕붕대는 평원지평선의 시간은 정지에 가깝다아무도 그은 적 없는 선누구도 의심한 적 없는 선없으면서 있는 존재의 이름을누가 맨 처음 발설…
김추인2024년 11월 12일[시마당] 눈물은 공평하다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눈물 흘렸다.땀으로 얼룩진 표정을 닦는 척, 수건에 감정을 파묻고 꾹꾹,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눌렀다.양팔을 높이 쳐든 승자는 메달을 가져갔지만 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 메달은 있…
강영은2024년 10월 15일[시마당] 우리는 구름을 함께 올려다 본 사람들
“구름은 우리가 한 번쯤 잃어버린 것의 모양을 닮았어”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누구였지“저기 강아지와 양과 고래를 닮은 구름이 있어” 말하면하늘에도 마당과 초원과 해안이 생기고구름은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네우리가 구름을 보기 …
강우근2024년 08월 14일[시마당] 견본
아버지 새치 염색 필요해 보인다빨래 더미 속에서 꺼내는 형광 조끼커터칼 가져와서 현장에서 딸려 나온 거스러미 자른다발코니로 가면 실내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둔 작업용 카모 바지코를 틀어막고 창문을 활짝 연다아버지 내일도 대교를 지으러…
이기리2024년 07월 18일[시마당]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서영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꽃의 음악이 무더기로 시들고 있다거나서랍에 차곡차곡 쌓이는 알약들의 색깔.한밤중에 쏟아지는 폭설을 바라보는 시간과이제 그만 죽고 싶은 이야기가 이어졌다.진심이니.햇빛이 두 눈을 조각내도 괜찮겠냐고.서영은…
양안다2024년 06월 18일[시마당] 안개가 짙은 겨울 아침에는 목욕탕에 가야 한다
뜨거운 물에 쪼그라드는 것은 스웨터뿐만이 아니지나는 까슬까슬한 영혼을 가지고 싶다반죽처럼 조금만 떼어 너의 등에 몰래 붙이고 싶다잘 익은 영혼이 물 위로 둥실둥실떠오르겠네그런데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면?모르는 아주머니가 이렇게 …
고선경2024년 05월 16일[시마당] 열쇠
세상은 딱 맞춰 구획된 것이 아니란다. 어떤 날 꿈에서 신은 그의 손을 내 목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가 내게서 뭔가 꺼내려고 했을 때멈췄다. 나른한 베개. 나는 벼락처럼 은총을 입었고친구와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다. 화분 밑…
이정화2024년 04월 26일[시마당] 먹던 것을 먹고 하던 일을 하고
며칠째 호우가 계속되었다이따금 창틈으로 물이 새 휴지를 덕지덕지 붙여두고 자야 했다꿈에서는 뭉뚱그려진 사람의 뒤통수가 나왔다 뒤따라 걷다 보면 제법 큰 물웅덩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힘껏 뛰어도 반대편 땅에 닿지 않을 것 같아 매번 …
류휘석2023년 08월 17일[시마당] 산책과 대화
거위가 목놓아 울고 있다사육장에서전쟁을 원하는 자는 따로 있어북쪽에는북쪽 정서가 있고사람들이 기웃대고 있다근린공원 입구에경찰이통제선을 치고 있다이곳을 지날 때면언제나널 떠올렸어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별나다 이상하다 난 내…
최지인2023년 06월 19일[시마당] 화음 넣기
주말 오후마다 모여 합주를 했다 공연 계획도 없이 매주 연습곡이 늘어나고 있었다 기타 두 명 베이스 한 명 드럼 한 명에 보컬은 따로 없었다 밴드를 결성할 때부터 넷의 노래 실력이 비슷비슷했다 곡이 정해지면 자원을 하거나 돌아가며 …
곽문영2023년 05월 17일[시마당] 나의 믿음
나무를 다 가지면내 주변에서시원한트럭이 가고나무 위의 침팬지가떨어져 내리고잔디를 깎던 사람의 휘둥그런 안경에나무를 가진 내가풀로 날리고상상이 이토록 푸르고개도 가고상상이 짖고 물고 달려가나를 넘어뜨리고나는 내 몸의 뼈를 다 버려보기…
유이우2023년 04월 18일[시마당] 영화처럼
내 삶은어떤 지망생이 연출한 영화일까지나치게 허술한데때로 너무 완전한영화의 주제가 슬픔이라면나의 고요는반지하 화장실에 오래 놔둔 살구 비누이기를더운물에 불려서꼭 필요한 일에만 녹여서 쓰는살구가 아니라살구를 가까스로 따라 한 냄새따라…
변윤제2023년 03월 16일[시마당] 너무 많은 나무
나의 착하고 불성실한 친구 장은 죽어서도 공방에 간다실은 별로 안 착하고 꽤 성실한 것 같기도 하다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그래서 나무가 된 거야?죽은 장이 비웃는다 나무가 된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무가 되어서도 여전히 숨…
한재범2023년 02월 16일[시마당] 일정한 모형
내 손에 바구니가 있다 갈색의 커다란 바구니다 내가 주워 담아왔던 것들이 전부 이곳에 들어있다 깨진 액자와 식칼과 책과 문장과 사랑과 너와 우리가 한데 엉켜있다 나는 아주 열심히 바구니를 채웠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싶은 마음을 웃…
김상희2023년 01월 10일[시마당] 축적과 이동
오늘 네게 닿지 않고 떨어진 눈이 다시 눈으로 돌아올 겨울의 미래남극에 내리는 눈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새로운 속성으로 발견되었다. 고래와 갓난아이에게서도공통적으로 흩날리는 흰 눈과 공장처럼 이동하는 너의 미래 …
남현지2022년 12월 19일자카르타
내 지난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진심으로 바랍니다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계절은 한 개의 여름이 전부인 곳에서상대에게 인사로 전하는 말그 나라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대당신의 몸이 만드는 그늘 안에아름아름 누워서 배웠다귀여워해 …
전욱진2022년 11월 07일아름다운 새를 위한 시간
시작에 외눈박이 물고기가 있었다. 당신은 종종 그의 비늘에 입을 맞추고는 했다. 입술을 가져다 댈 때 그는 지느러미를 흔들어 보였다. 물고기는 다 자라 예쁜 새가 되었다. 새는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의 끝은 구슬이었다.그 새는 줄에 …
유혜빈2022년 09월 28일여름 휴가
한적한 곳을 찾아연잎이 마련해준 물방울 방에 묵었어요또르르륵 또르륵,마음 가는 대로 마음을 굴리다가쌓여 있는 물결을 뒤적이기도 했어요매번 바람에 흩어지는 이야기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을 땐 밖으로 나와푸른 잎 테두리를 느긋이 걸었어요잎…
길상호2022년 09월 15일물의 언어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수의를 입은 눈보라 물가에는 종려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록이 초록을풍경이색채를간밤 …
장혜령2022년 08월 15일서머 에비뉴에서의 다짐
지난봄 그대에게 쓴 나의 글자들은끝내 뜻을 만들지 못하고 구름이 되었다나를 따라 여름에까지 이르러서는간밤에 마저 내리는 비가 되었다비 갠 이튿날은 늘 별 뜻 없이 맑고손잡은 가로수들을 따라 집을 나서면걸음은 서머 에비뉴 끝의 가을로…
심재휘2022년 07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