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줄리언 반스의 신작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펼치면서 깜짝 놀랐다. 누군가의 음성, 음성의 분위기, 분위기의 수위가 고스란히 떠올라 읽는 내내 메아리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너무 많은 소설을 읽어온 탓인지,…
2012072012년 06월 20일소년, 반쯤 열린 문 안쪽의 세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아름다운 소년 이야기 ‘보이(The Boy)’라는 화집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기분을. 206개의 도판과 177개의 컬러 화보를 거느린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 책이 ‘보이-아름다운 소년’(새물결,…
2012062012년 05월 22일파리, 플로베르의 스타일을 만나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 도시 트루빌은 지난해 여름 열흘간의 프랑스 순례 중 마지막 행로의 출발지였다. 도빌과 트루빌을 여정에 넣은 것은 그곳이 영화제의 도시이고, 실제 영화 ‘남과 여’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심장하…
2012052012년 04월 20일코히마르, 노인과 바다를 찾아서
코히마르, ‘전망 좋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어촌마을을 찾아간 것은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 지 이틀째 점심 무렵이었다. 차는 아바나 만을 건너 카리브해 연안을 20여 분 달린 후, 헤밍웨이의 단골 식당이었던 라 테라사 앞에 정차했다.…
2012042012년 03월 21일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오랜만에 윤성희의 단편소설을 읽는다. 아니,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늘, 아니 매일, 어쩌면 하루에 한 편 이상, 소설들, 그중에는 반드시 한 편 이상의 한국 소설을 읽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윤성희…
2012032012년 02월 21일외로운 남자의 유년 풍경
완만한 구릉의 언덕길을 오르자 성당 첨탑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마을 진입로에 들어서니 20~30호의 집이 성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프랑스의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이곳은 프랑스 북서부 라발 인…
2012022012년 01월 19일21세기 환상의 출처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기억에서 출발해 망각을 향해 간다. 망각, 또는 죽음. 언젠가는 모두 죽게 마련인 인간이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가 이야기인 만큼 인류는 끊임없이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을 갱신해왔다. 고대 그…
2012012011년 12월 21일카뮈를 만나는 깊은 겨울밤
2011년1월27일 정오 무렵. 2차선의 D27 국도 중의 소로(小路). 아를에서 생-레미 프로방스를 지나 뤼베롱 산간의 고원(高原) 지대를 달려온 자동차는 루르마랭이라는 푯말이 나타나면서 속도를 낮추었다. 산골의 작은 마을이니 묘…
2011122011년 11월 23일새롭고도 친숙한 모험의 세계
그러고 보니, 어느덧, 2011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길을 걷다가, 발밑에 와 부딪치는 낙엽들을 처음 본 것인 양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뒤를 돌아본다. 도대체, 언제, 2000년대란 것이 되었던가, 지금 내가 서 있는 …
2011112011년 10월 19일벨아미, 어떤 타락한 청년의 초상
여기 또, 한 청년이 있다. 또, 라고 글의 운을 떼는 것은 이미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쥘리앵 소렐이라는 ‘문제적’ 청년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동아’ 2010년 8월). 나는 이 청년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 7월 프랑스 중동…
2011102011년 09월 20일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를 찾아서
마침내 나는 서가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었다. 독자여, 이제야 불멸의 자유인 ‘조르바’를 소개함을 용서하시라. 굳이 이유를 밝히자면, 나는 그리스로 향하지 않고는 조르바를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7월14일 오후 9시…
2011092011년 08월 19일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한여름 밤, 늦도록 바닷가 모래밭을 배회하다 서재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는다. 걸음걸음 밀려왔다 밀려가던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 둘씩 셋씩, 그 이상 무리지어 뛰고, 걷고, 앉아 있던 이방인들의 말소리가 여전히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2011082011년 07월 20일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소설을 읽는 것은 새로운 인간을 만난다는 설렘과 황홀을 전제로 한다. 구스타프 플로베르가 창조한 ‘마담 보바리’(1857)의 엠마 보바리, 프란츠 카프카가 창조한 ‘변신’(1916)의 그레고르 잠자, 그리고 알베르 카뮈가 창조한 ‘…
2011072011년 06월 21일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때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침대에 잠시 그대로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곳은 아주 먼 곳, 아니 아주 오래전, 보름달 형상의 창문이 있던 생 미셀의 고미다락방은 아닌가. 때로 잠이 들려고 할 때면, 찰나적으로, 어…
2011062011년 05월 19일쾌락, 소설, 그리고 ‘옛날’에 대하여
마침내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지막 왕국이라 불리는 소설적인 곳, 철학과 문학의 경계, 시와 산문의 경계, 자아와 일상의 경계, 광대무변한 ‘옛날’의 우주로. 아니다, 첫 문장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마침내 우리는 20세기…
2011052011년 04월 21일우연의 실체와 환상 사이
나는 파리에 도착할 때면 잠시 체류했던 청춘시절 이래 여장(旅裝)을 풀기도 전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달려가곤 한다. 1000년 가까이 창공을 향해 고딕식 쌍 탑을 우뚝 세우고 있는 견고한 석조 예술품 앞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파…
2011042011년 03월 22일만보객(漫步客)이 되어 2011년 서울의 청계천변을 걸어보자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한복판에 가면 한 남자가 낮이나 밤이나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형상으로 서 있다. 마른 체구의 그는 중절모를 쓰고, 현미경 렌즈와 같은 둥근 안경을 끼고 짐짓 도도하게 치켜든 턱이며 걸음걸이가…
2011032011년 02월 22일허기(虛飢), 어머니를 그리는 한 형식
2011년 1월, 남프랑스 니스로 향하면서 비행기 티켓과 함께 가방에 세 권의 소설책을 넣었다. 니스 출신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조서(調書)’ ‘아프리카人’ 그리고 ‘허기의 간주곡’. 마치 르 클레지오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레고…
2011022011년 01월 20일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여기 42편의 자전소설이 있다. 소설가 42명의 이른바 ‘자전소설’이 빚어내는 세계란 희귀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라는 말은 하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 개성만큼 …
2011012010년 12월 21일페루, 소설의 다른 이름
독자에게, 아니 여행자에게 ‘페루’라는 이름은 특별한 여운을 준다. 특별함이란 ‘페루’가 남반구, 라틴아메리카의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국가의 이름으로 다가오기 이전, 프랑스 작가가 쓴 한 편의 단편 소설에 의해 형성되고 전파되는바…
2010122010년 12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