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위의 정의를 꿈꾸며
이번 달까지 꼬박 2년간 ‘신동아’에 리걸 에세이를 연재했다. 2년 전 어느 가을날 ‘신동아’의 한 기자에게서 일회성 에세이 한 편을 써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마감 기한이 짧았다. 아마도 기존에 쓰기로 한 필자가 약속을 어…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9월 30일선고일 법정 풍경
처벌은 판사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나는 때로 법정에서 산타클로스 판사가 되고 싶다. 산타 검사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기소하면,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법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은 착한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다. 징역형이나 벌…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9월 09일주관적 구성요건의 판단
‘정의(正義)’라고 하면 정당의 권력투쟁이나 정치권력의 권한 남용을 쉽게 떠올리지만 사실 판사가 다루는 정의는 일상의 작은 것들이다. 그것은 국민이 부딪히는 정의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문제는 ‘일…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8월 12일법관 경력 늘수록 형량 줄어드는 이유
변론이 종결되고 나면 판사는 사무실로 들어와서 판결 선고일까지 기록을 다시 보면서 판결문을 쓰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판사 생활이다. 책상 앞에 두꺼운 기록물을 쌓아놓고 골무를 낀 손으로 뒤적거리다가, 연필로 메모지에 메모를 하다…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7월 04일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
결코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다. 판사라고 왜 소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소회나 감정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밝히게 되면 판결 전에 판사의 예단이 드러날 수 있다. 게다가 다음 선고기일에 피고인에게 엄한 형을 선고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판사…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6월 04일선처 호소, 억울함 토로, 긴 침묵…
피고인 최후진술의 첫째 유형은 피고인이 반성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다. 흔히 피고인이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고 선처해주십시오”라는…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5월 06일‘사실상’ 처벌이 된 구속 무죄추정원칙은 어디로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그때 좀 더 잘할 걸’ 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구속영장 발부를 조금 더 엄격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피의자나 피고인을 구속하는 이유는 도망을 가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4월 08일판사에게 형량이란
형사재판에서 증거조사 절차가 끝나면 검사와 변호인이 차례로 마지막 변론을 하는데 이를 ‘최후변론’이라 한다. 검사가 먼저 한다. 검사는 다른 때에는 변론을 앉아서 하더라도 최후변론만큼은 서서 한다. 보통은 짧게 구형만 한다. “피고…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3월 04일위안부 문제의 국제법 쟁점
판사 시절 성폭력 사건을 재판하면서 애로가 있었다. 남성 판사로서 여성 피해자의 상처를 가슴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피해자의 떨림과 눈물에 비추어 그동안 내가 당한 그 어떤 폭력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일 것이라고 머릿속…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8년 01월 21일구속영장, 발부와 기각 사이
쌀쌀한 초겨울 오전이었다. 나는 휴가를 내고 구치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가까운 지인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내비게이션에는 구치소 이름이 나오지 않아 인근의 다른 건물을 입력해야 했다.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가니 긴 계단 위에 터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7년 12월 24일‘좋은 재판’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 9월 25일 취임하면서 ‘좋은 재판’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좋은 재판이 무엇인지는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는 재판”이라 정의했다.이 정의를 이…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2017년 11월 05일방청석에서 바라본 재판
얼마 전 고소를 당해서 형사법정에 선 친척 어른을 위해 법정 방청을 했다. 고소된 사람들 중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어른의 성품과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무죄라고 믿고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다.어른도 결백을 주…
201710012017년 10월 15일‘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
‘어떤 일이 있었다’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확신을 가지고 하기가 쉬운 말이 아니다. 칸트는 인간이 사건의 실체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그저 자신의 감각기관에 비친 제한된 현상만을…
201709012017년 09월 10일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영국 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아들과 딸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둘이서 누가 먼저 젓가락으로 메뉴판을 들어올리느냐는 시합에서 동생이 오빠를 이긴 모양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 중인 딸 옆에서 …
201708012017년 08월 13일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이 글은 주말 오전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북카페 유리벽 앞에 앉아서 쓰고 있다. 이곳은 나를 늘 행복하게 만든다. 마음속으로 내 아지트라 찜해둔 곳이다. 눈앞에는 싱그러운 연초록 나무들로 둘러싸인 농구장 안에서 어린아이와 …
201707012017년 06월 21일자백이냐, 부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지난해 어느 오후 텅 빈 법정에 들어가 피고인석에 앉아보았다. 판사직을 그만두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인디언 부족의 경구는 …
201706012017년 05월 18일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정재민의 리·걸·에·세·이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정재민|전 판사·소설가|형사재판에서 재판장이 피고인 신원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이 끝나면 검사의 ‘모두(冒頭)진술’이 시작된다. 모두진술은 검사가 공소장을 낭독하는 절차다. 가령 이렇게…
201705012017년 05월 11일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지난 2월 법복을 벗었다. 11년 법관 생활을 마감했다. 법과대학, 사법연수원, 법무관, 판사까지 20여 년 법률가 생활도 일단락 지었다. 곧이어 방위사업청 팀장으로서 행정관료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이 지면에서 판사의 일을 소개…
201704012017년 03월 24일소통할 수 없는 누군가와 공존하는 법
“지금부터 형사O단독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법대 앞에 앉으면 마이크에 대고 처음 하는 말이다. 개정 선언이라 한다. 영화감독의 큐 사인같이 이 말에 판사, 검사, 변호인, 참여관, 경위, 교도관이 각자 역할을 하기 시작…
201703012017년 02월 28일국민의 뜻은 神과 같다
시국이 엄혹하니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주로 형사재판에 대해서 말하는 이 글도 민주주의와 헌법 이야기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근대 형사재판제도도 민주주의라는 아버지의 씨를 받아 헌법이라는 어머니가 잉태한 자식이기 때문…
201702012017년 02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