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 초원에서 4
저 노란 꽃들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묻지 않는다얼마나 살았는지도형체도 슬픔도 없다때가 되면 산 것들은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무심히풀씨가 날아와 또 다른 꽃을 터트리는 그 첫 자리한낮의 초원이 뜨거운 숨을 들어올려갓난 구름송이 하나 피…
2004072004년 07월 02일
오래된 미래
바람이 또 산을 깨웁니다 계곡이 불쑥 일어서고 능선이 오래 기우뚱거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산끝이 하늘에 닿을 듯합니다 높은 저것이 정상이라면… 한번도 올라가 본 적 없는 언덕이 물끄러미 산끝을 바라봅니다 오르고 싶은 것에 …
2004062004년 06월 02일
다만 멈칫거릴 뿐
봄이 오는천 리 꽃길을 걷다가목련꽃 그늘 아래 쉬어도나는 아직 목련존자가 아니다꽃샘추위에 멈칫산복사꽃이 피어나고개불알풀꽃 자운영꽃이 피려다다만 멈칫거릴 뿐눈보라도 없이 어찌 봄이랴가고 또 가도손톱 발톱이 자라나니마침내 누구인가를할퀴…
2004052004년 05월 03일
아버지
지난 밤새 먹은 술이른 아침 서부터미널 앞 돼지국밥으로 해장한다속에서 받지 않아 국물만 겨우 몇술 뜨다 고개 드니누리끼리한 돼지 내음 배인 식당벽 거울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나타나셨다술이 덜 깼나고개 돌려 눈 껌뻑이고 다시 보니아버…
2004042004년 03월 31일
겨울 산길을 걸으며
겨울 산길 어린 상수리나무 밑에누가 급히 똥을 누고 밑씻개로 사용한종이 한 장이 버려져 있었다나는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급히 따라가다가무심코 발을 멈추고그 낡은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누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천국…
2004032004년 03월 02일
부부
긴 상이 있다한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2004022004년 01월 30일
세월은 물처럼 흐를 테니까
오늘도 아무 일이 없기를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빌었다.며칠 전 수도관을 매설한 골목길에오늘 또다시 파헤쳐 보도블록 공사를 한다.엎치락뒤치락되는 대로 사는 미친년 같다.누구의 피가 마르는지말라서 쭉정이가 되는지도 아랑곳없이칠하고 벗기고…
2004012003년 12월 30일
벚꽃 동산
마른 잎 떨어지는 황혼은사라져가는 추억을 이야기하고마치 망각을 바라는 듯추워서 떨고 있는 당신은다가오는 암울한 미래에빠른 박동소리로 깨어 있어야 한다.무언가에 상처입고 떠도는 당신하얀 눈을 하고 나에게 밝게 미소짓기를흩날리는 한숨으…
2003122003년 11월 28일
길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길이 되지 않는다노저어 갈삶의 인식이 없어도시간 속에 숨은 시간을찾아야 한다자아가 죽었어도속 깊은 자아가 다 죽었어도꽃은 꽃을 피게 하고바람은 바람을 불게 한다
2003112003년 10월 29일
욕지도의 부표
한 자리만을 고집하는 생에는,섬 마을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그물같이 촘촘하고 질긴섬 마을 사람들의 생을 짊어지고 있다가라앉지도 떠돌아다니지도 못한다몸살 난 젖꼭지 물려 놓고도 보듬는내 어머니같이견디기 힘든 그 자리를 지키고 있…
2003102003년 09월 29일
내 몸엔 저승이 도사려 있다
러닝셔츠를 벗는다 살비듬들,시르르 떨어져 내린다나와 함께 살고 있는 죽음들이다내 몸이 키우고 있는 것들!팬티를 벗는다 몇 가닥 터럭꼬불꼬불 떨어져 내린다마지못해 차마 뱉어내는 죽음들이다내 몸이 가꾸고 있는 것들!뾰쪽뾰쪽 손톱들 자라…
2003092003년 08월 26일
묶인 개가 짖을 때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그대, 은현리*를 지날 때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움찔거리지도, 두려워 물러서지도 마라묶여서 짖는 개를 바라보아라, 개는그대 발자국 소리가 반가워 짖는 것이다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
2003082003년 07월 30일
옆모습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 보면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
2003072003년 06월 26일
집 없는 달팽이
저것도 난세를 사는방법일까어쩌다가 집 없이 사는달팽이가 되어세상을 마음껏 조롱하는가비록 음지나 습한 곳을벗어날 수 없지만,장마가 지면마당 가운데까지 나오던집 없는 달팽이…하늘 아래 어딘들 몸 둘 곳 있다면집이란 사치일지 모른다진작 …
2003062003년 05월 27일
길
어디로가야 길이 보일까우리가 가야 하는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잃고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찾다가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오 그렇구나 그렇구나도시 …
2003052003년 04월 29일
옛집 근처
이젠 낯선, 도심이 된 정든 변두리길 잃고 헤매다 스무 해 전 옛 동네 지나친다신호 기다리며 차창 너머로 문득 보는 골목 깊은한 시절 내 잠자리, 내 방, 우리 집, 우리 동네스무 살 무렵 내 꿈이 술 취해 비틀대던 모퉁이,아직 허…
2003042003년 03월 26일
向日花
向日花-신유식 백승엽씨 부부에게그대를 바라보노라면벚꽃 자욱한 들뜸이 어깨에 인다그대 그리다 보면음성도 모습도 마치꿈결처럼 해설퍼져서는잠자리도 자꾸만 보고 싶어지고그대를 생각하면즐거운 일보다 아픈 쪽만 더욱크게 다가와 허둥거린다그대와…
2003032003년 02월 26일
道界 표지판
겨울의 수요일 아침은 푸르다.약수 뜨러 가는청계산 기슭;한 팔을 못 쓰게 된 자가플라스틱 물통을 들고비탈을 올라오고 있는 동안잠시 비켜선 길이왠지, 저릿저릿, 저리다.한 발, 한 발,우스꽝스럽게 되어버린푸른 수요일 아침은앞으로 남아…
2003022003년 02월 04일
산
산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너도 나처럼 흘러봐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연보라 색 구절초 꽃 곁을 …
2003012003년 01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