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낯선 산과 어우르다
우리나라 어디든 낯선 곳에 가더라도눈 들어 바라보면 어디서 본 듯한 산들이 있어가슴 설레고 발걸음 항상 가볍습니다처음 본 산들은 낯선 사람처럼 마음을 닫다가도그 산에 들어가기만 하면몇 마디 주고받는 말에 임의로워져서곧 나와 한몸이 …
2006052006년 05월 02일귀
바람소리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물소리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귀는 얼마나 많이 들어버렸는가사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세상소리 더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귀는 얼마나 많이 잘못 들어버렸는가
2006042006년 03월 29일밤참
기름 치고 밥을 비벼먹습니다동치미 국물은 없고그냥 따듯한 물 마시며그런데 잠 일찍 깬 쥐가춥고 배고팠던지천장을 울리며 덜덜덜 달려옵니다아니 아니 시집 못 간 처녀 쥐가아래층 총각 혼자 밥 먹는다고나무 조각 물고 와뜨득 뜨드득 소리를…
2006032006년 03월 07일귀에 걸린 입
안온한 그 어머니의그 품속, 유년기를나이 먹는 재미로 산 듯겁 없는 그 흰소리그대로관객 없는 무대 위.스카라무슈 이 희화.소명을 거스른 오도(誤導),가슴 죈 강물 앞에두려움의 띠를 매고경건히 머리 숙이면보이리,뿌린 씨앗 웃자라그 실…
2006022006년 02월 02일꽃의 날개
1.만일 꽃이라면꽃씨라면단숨에 날아바다를안으리.소금기 밴 어시장(魚市場)에 앉아우우우흐느끼리.갈매기 떼지어 날 적에나도 따라길을 뜨리.2.두어 모금 술에 취(醉)해찾아든선창(船艙)이거든별빛도속삭임도말끔히 담아 두리저녁이 물러갈 쯤이…
2006012006년 01월 13일이빨 한 쪽
지난 여름 금강산에 묻은 내 이빨은지금 어떤 싹을 틔우고 있을까서서히 금강석이 되어가고 있을까그때 지구촌 곳곳에서 온 시인들과“평화”를 주제로 함께 시를 낭송하며북녘 땅을 처음 밟았을 때금강산 자락에 묻고 온 내 이빨 한 쪽기러기 …
2005122005년 11월 30일비둘기
아주 잘 생긴 장갑 한 짝떨어져 있다집었더니목 없는 비둘기였다무엇을 잡으려는데,감쪽같이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손가락 쫙 벌리다 멈춘 비둘기 꼬리세상 떠나며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저런 손자국 같은 것인가?
2005112005년 10월 26일부석사(浮石寺)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면오랫동안 세속에 젖은 비루한 삶도영혼이 밤하늘의 별처럼순결해진다.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적막하고느린 가을 햇살은 맹렬하게주변의 사과나무에 내려온통 붉은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리는데,부석사 올라가는 은행나무 …
2005102005년 09월 30일오래된 선풍기
얼마 전부터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고양이 울음소리인가도 싶다누가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하다알고 보니 선풍기 삐걱대는 소리다결혼하면서 장만하여아이들보다 나이 많은 선풍기천천히 돌면 힘이 덜 들 터인데치매라도 걸렸는지덜덜거리며 …
2005092005년 08월 25일뾰족구두
그건 모험이야그 나이에 이젠 굽 낮은평화가 좋지 않느냐고나는 충고하지만아내는 요지부동 뾰족구두다좀 위태위태하지만몇 센티만 높아도 얼마나 더 커 보이는데오늘도 딱-딱-딱-딱-평화보다 모험을 택한 아내가조금 낮추더라도 평화롭기를 바라는…
2005082005년 07월 28일소만과 망종 즈음의 바깥
소만과 망종 즈음의 바깥비 오는 아침 바지 밑단 하나 걷고 나가도홀가분한데 마음속 그리던 약속이라면날아가겠지, 새콤한 양념이 혀 밑에 스미듯저절로 상체가 기우뚱거리고가끔 듣던 대로 라디오 틀어놓고별 차림 없이 요 앞 가게를 다녀갔다…
2005072005년 07월 11일화분한테 미안함을 말함
다음해 다시 봄날이 오면너를 쉽게 사지 않겠다 다짐했다눈으로만 환히 보리라 다짐했다이 봄에도 여전히 황사를뚫고꽃가게에 도로 갓길 트럭에 쟁여와초록눈을 반짝이는 신생아다섯 잎 열 잎 초록 손가락을 모아 쥐고커피잔만한 요람에서 물결 같…
2005062005년 05월 24일무릉원 풍경구
천자산에 천풍이 부네구름이 표류하고 청거북들 뭍으로 기어 나오네아기물고기가 우네 햇빛 푸르스름 하네강이 흐르고 대숲 기울어졌네몇 번 안개가 걷히네바다였던 것이 땅 위로 떠오르네상황천자 운단에 앉아 늙은 아내 부르네붉은 털실 같은 바…
2005052005년 04월 25일진달래
한 가지에서 피었다 졌으나꽃은 잎새를 모르고잎새는 꽃을 모른다한 가지에서앞서거니 뒷서거니 피고 진꽃과 잎새,어쩌다 동기간의그리움과 질투마저 남기지 못했을까찬바람 몰아치는 언덕에 서면빈 가지만 망연해 한다
2005042005년 03월 24일꽃눈들
고실고실 촉촉한한껏 물이 오른아프겠다,터질 듯 부푼저 탱탱한 젖꼭지들천 개의 바알간 젖꼭지를 가지신꽃나무 관음 아래 누우니마른 천지 가득해 오는젖 빠는 소리 들린다
2005032005년 02월 23일물방울 셋이
물방울 셋이 만났다, 물방울 셋이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한다, 물방울 셋이 서로 몸에 힘을 준다, 물방울 셋은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물방울 하나가 되었다,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깨어져서 더 큰 하나가 …
2005022005년 01월 25일첫눈 엽서
골고루 가볍게조심조심내리는 눈고요하고 순결한첫눈의 기침소리에온 세상이 놀라네첫 마음 첫 설렘잃지 말고 살라고오늘은 사랑처럼첫눈이 내리네욕심을 버린 가벼움으로행복해지라고자유로워지라고오늘은 기도처럼첫눈이 내리네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으로하…
2005012004년 12월 27일겨울 들판으로
水車는 보이지 않는데빈 들판에는 소금이 하얗게 빛난다고요히 엎드린 볏단들 사이로종종거리는 새들밤마다 누가 와서 水車를 밟다 가는가어둠과 바람이 빚어낸 밤의 소금,다들 바가지 하나씩 들고겨울 들판으로 간다한 됫박의 시린 소금을 얻으러…
2004122004년 11월 24일비로소 길
새것은 어느 사이 헌것이 되어버린다슬그머니 바래지거나 꼴불견이 된다소위 새로운 시라는 것도 흐지부지안개 속에 황사 바람 속에 떠돌다가다음날 아침의 명징! 온데간데가 없다그러므로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나는 사십 년 전에 읽은 시가 지…
2004112004년 10월 26일죽로차 -- 서산 부석사 성전 스님에게
지난 겨울 찬바람이서산 서남 들녘과 바다를 밀물처럼 하얗게 덮을 때바람의 이랑 내려다뵈는 조비산(鳥飛山) 허리에서우연히 만나부드런 죽로차 마시며 담소한 일이 벌써 반년이군요.선물로 주신 차,물 끓이고 70도 언저리로 내릴 때까지 기…
2004102004년 0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