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소설에 관한, 아니 길에 관한 이런 명제가 있다.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되었다.’ 이 명제는 소설을 매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자극해왔다. 길과 여행은 불가분의 관계다. 문맥으로는 전후…
2014032014년 02월 21일힙한 천국 망한 청춘의 우울한 비망록
새해 벽두 김사과의 소설을 읽는다. 이 말은 21세기 한국 젊은 소설의 최전선과 만나는 것, 동시에 10대와 20대의 일상과 세계 인식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또한 21세기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새삼…
2014022014년 01월 22일디어 먼로, 단편소설을 읽는 시간
2013년 8월 파리, 한국어학과가 있는 13구 물랭거리와 동양어대학(INALCO) 부근을 산책하다가 근처 새로이 문을 연 서점 지베르 조젭에 들어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파리 시(市)와 13구가 새로 조성하고 있는 파리 대학 …
2014012013년 12월 19일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진실
대양(大洋)의 나들목인 해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역사는 가까운 만큼 서로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위협적인 양상을 보여왔다. 이런 긴장 관계는 두 나라의 상이한 민족성과 공간성으로부터 첨예하게 갈라지는데, 19세기 산업혁명의 총아…
2013122013년 11월 20일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세상에 소설가는 많으나 이야기에 능한 소설가는 많지 않다. 이야기꾼에게는 대개 ‘천부적’이라는 수사가 부여되는데, 국내 작가로는 황석영 박완서 김소진 성석제, 국외 작가로는 영국의 로알드 달과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
2013112013년 10월 21일이야기, 소설, ‘그리고’의 세계
그리고,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을 말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를 서두에, 그것도 첫 문장의 첫 번째 자리에 놓는 행위는 선(先)역사를 거대한 괄호로 묶는 것, 괄호 안의 세계를 공유한 자들 간의 암묵적인 기호 같은 것. 여기에서 …
2013102013년 09월 24일댈러웨이 부인과 함께하는 런던 장면들
2013년 7월 25일 오전 11시,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피카딜리 서커스를 거쳐 트라팔가 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호선형의 거리 양편에 펼쳐진 상점들 위로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0주년을 알리는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런던의 명물…
2013092013년 08월 22일결혼의 역설 어느 부부의 연대기
맨해튼 42번가 타임스퀘어 광장 뒤쪽으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끝이 까마득한 고층 건물이 창공에 치솟아 있다. 맨해튼 거리를 걷다보면 인간이 개미처럼 작고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비현실적으로 내 …
2013082013년 07월 22일영화 시작 전 세 시간 스마트폰으로 읽는 첫사랑 신화
2013년 5월 24일 오후 1시. 맨해튼 34번가의 상영관(AMC Leuws 34street 14)으로 며칠 전 개봉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러가는 길. 몇 걸음 걷지 않아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도로에 …
2013072013년 06월 20일프랑스에 착륙한 젊은 한국 소설의 표정
2013년 5월 6일,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센 강 기슭 이에나 거리에는 파리에서 좀처럼 접하기 쉽지 않은 두 편의 한국 소설이 작가의 육성으로 울려 퍼졌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천운영과 김언수가 처음으로 …
2013062013년 05월 23일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묘하다. 최근 새로 번역된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 1960년대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 페렉이 ‘대모험(La grande aventure)’이라는 제…
2013052013년 04월 18일일기의 목록, 또는 궁극의 소설
2009년 1월 29일. 밀라노 도착 3일째. 아침식사를 마치고 밀라노 중앙역으로 달려가 볼로냐행 열차를 탔다. 수중에는 유럽에서 3일을 어느 날이나 마음대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유레일 셀렉트 패스가 있었고, 첫 사용처를 ‘장미…
2013042013년 03월 20일인간 본성의 탐구, 소설이라는 식당 또는 역사
소설담론서나 소설작법서를 통해 익히 명성을 접해왔으나 뒤늦게 만나는 작품들이 있다. 번역이 쉽지 않아서, 또는 대중성이 없어서 소설가 지망생이나 연구자, 독자 대중에게 전해지지 못하다가 뒤늦게 번역 출간된 소설들이다. 한 나라 문화…
2013032013년 02월 21일세기의 전설 소설의 세기
파리 마레지구 보주광장 6번지 로앙 귀에메네 대저택 2층, 위고의 집 두 번째 살롱(붉은 방)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 문구가 중앙에 전시되어 있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은 중요한 정점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 주요작이 되든지!…
2013022013년 01월 22일소설, 어떤 무용(無用)의 세계
벌써 10년 전이다. 펜으로 정영문의 작가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 제목을 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가, 아니면 다 그리고 제목을 얹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 작가 초상의 제목은 ‘이것은 정…
2013012012년 12월 26일마들렌 효과 프루스트를 만나는 겨울 오후
무엇보다 홍차를. 그리고 프티 마들렌 한 조각. 겨울로 가는 길목, 10여 년 전 잠시 체류했던 파리의 11월을 회상한다. 박쥐가 검은 두 날개를 펼친 듯 컴컴하고 음울한 11월 오후를 잘 보내기 위해 나는 때로 특별한 티타임을 준…
2012122012년 11월 21일21세기 골목담의 탄생
여담부터 하자면, 나는 골목, 세상의 골목들을 좋아한다. 즐겨 부르는 노래 레퍼토리에는 언제나 김현식의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는 골목으로 시작해 광장으로 끝난다. 그리고…
2012112012년 10월 23일21세기 소설의 지도와 영토의 현상학
지난 8월 4일 자정 무렵 파리에 도착해 날이 밝자마자 달려간 곳은 센 강변 지척의 지베르 조제프라는 단골서점이었다. 프라하에서 파리로 오자마자 곧바로 프랑스 북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랭보의 고향 마을 샤를르빌 메지에르로 향하는 길이…
2012102012년 09월 20일향수, 우회라는 실존의 긴 여정
2012년8월 1일 아침, 체코 프라하에서 브루노로 향한 것은 순전히 밀란 쿤데라 때문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그의 장편소설 ‘향수’의 작가 이력은 딱 두 문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
2012092012년 08월 22일역사, 자전 가족 서사의 한 표정
프랑스의 여성작가 아니 에르노의 출세작 ‘남자의 자리’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리옹의 크루아루스 지역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원 자격 실기 시험을 치렀다.” 이 소설의 원제는 ‘La place’, 한국어로는 ‘…
2012082012년 0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