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Placard(캐비닛)<br>김언수, Ginkgo, 2013, Paris
형이 내 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형의 목에서는 쇠톱 소리가 났다. (…) 쇠톱 소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골라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나뿐이었다. 내가 형을 데리고 이곳 중국으로 맞선여행을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형의 목소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겠지만, 형의 신붓감을 구해줄 수는 있었다. 우리는 삼박사일 동안 예닐곱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커스와 관광은 덤이었다.
-천운영 ‘잘 가라, 서커스’ 중에서
이 캐비닛의 이름은 ‘13호 캐비닛’이다.
그러나 ‘1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것은 그저 이 캐비닛이 왼쪽에서 열세 번째에 놓여 있다는 뜻일 뿐이다.
뭔가 근사한 이름이 있었다면 소개하기가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비닛 따위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김언수 ‘캐비닛’ 중에서
이번 행사는 2009년 황석영, 신경숙, 김영하 작가의 프랑스 독자와의 만남에 이어 젊은 작가로는 지난해 10월 문인클럽(Societe des gens de lettre)에서 열린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의 한국 젊은 작가 프랑스 포럼에 이어 두 번째. 천운영과 김언수는 2000년대 한국 소설의 지형도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새로운 세대의 소설을 대표해왔다.
내성적 감수성 교란한 ‘바늘’
천운영은 날카로운 ‘바늘’ 하나로 1990년대 한국 소설의 내성적 감수성을 통렬하게 교란시키며 2000년대 벽두에 등장했고, 김언수는 정체불명의 ‘캐비닛’으로 2000년대 한국 소설의 혼종적 물결을 타넘으며 곧바로 중심으로 진입했다. ‘바늘’의 위력이 어찌나 깊고 강렬했던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소설계는 단연 천운영의 문체와 서사에 뜨겁게 반응했다. 작가의 재능은 무엇보다 소재를 선택하는 감각과 그것을 서사화하는 지력(智力)과 인내력에 있다. 이전 작가들이 주로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를 선택해 완전히 체득할 때까지 취재하고, 삶에 아로새긴 뒤에 뽑아내는 천운영의 문장에 누구라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게 두 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빠져들어갈 것 같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천운영 ‘바늘’ 중에서
이번에 파리에서 번역 출간된 ‘잘 가라, 서커스’는 천운영의 첫 장편소설.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의 일단이 낭독됐고, 이어 전문 낭독가에 의해 프랑스어 번역문으로 낭독됐다. 나는 눈을 감고 작가의 음성에 실려 전달되는 문장들을 흡수하듯 감상했다. 그런데 같은 문장임에도 프랑스 전문 낭독자가 읽은 프랑스어 문장들이 이질적으로 들렸다. 2주 전, 파리의 국립고등사범학교에서 장 에쉬노즈라는 작가를 대상으로 열렸던 심포지엄의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주제가 새삼 환기됐다.
이 심포지엄에서 제기된 몇몇 논의 중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은 ‘작가가 소설에 사용하는 고유명(propre name)들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번역은 반역인가?
1990년대 중반 나는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가 완간된 직후, 프랑스어 번역 사업에 잠깐 말단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이때 번역자에게 가장 문제적으로 대두된 사안이 한국의 토속어들을 어떻게 프랑스 독자들에게 전달할 것인가였다. ‘토지’야말로 한국어로 쓰였으되 한국어 독자들을 위한 ‘소설 토지 사전’이 필요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안타깝게도 ‘토지’는 영어나 프랑스어 번역본이 초반 일부만 출간돼 있는 실정이다. 내가 천운영, 김언수를 선두로 파리에 소개되는 한국의 젊은 소설들의 동향을 주목하는 것은 위의 맥락과 관계가 있다.
‘맨해튼 컨설팅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식수나 음료수 대용으로 휘발유를 마시는 사람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무려 천사백 명이 넘는다. (…) 그들은 주로 런던, 파리, 뉴욕 같은 거대도시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한 사람들이며 게다가 회계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피곤하고 지쳤을 때 드링크제처럼 휘발유를 마시는 것은 물론 요리재료로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정의가 학계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symptomer)’라고 부른다. 심토머들은 생물학과 인류학이 규정한 인간의 정의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그들은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쩌면 최후의 인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다.
-김언수 ‘캐비닛’ 중에서
위의 인용에서 보듯,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김언수의 ‘캐비닛’의 경우, 국가나 대륙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2000년대 보르헤스적인 세계 소설, 또는 혼종적인 환상성(판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유명의 속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변두리(경계), 연변 조선족들의 신산한 삶을 구체적으로 서사화한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의 경우, 국지적이고 민족적인 특수성 때문에 고유명의 세계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작품 전반을 감싸는 정조(情調)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곧 인물들의 대사, 그들이 뿌리내리고 산 고장의 삶의 언어인 사투리의 보장과 복원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여자는 아주 작고 마른 여자였다. 서류에는 스물다섯 살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어설픈 얼굴 화장 뒤에는 피곤한 기색이 깊게 스며 있었다. (…) 형은 여전히 냅킨을 접고 있었다. (…) 형은 네 개의 냅킨을 이어놓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광대였다. (…) 나는 종이광대를 슬쩍 보고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한국에 시집오려 해요”
“….”
(…)
“말 못해요?”
“마흔 시간이나 차를 타고 왔슴다. 여기 오느라 직장도 그만두었에요.”
내내 말이 없던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천운영 ‘잘 가라, 서커스’ 중에서
혼종적인 판타지
천운영과 김언수는 1970년대 초에 태어나 2000년대에 활동하고 있지만 소설 세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소설이라는 종자가 갖는 특수성인데, 소설은 작가의 이름과 얼굴만큼이나 다른 언어, 곧 작가 고유의 언어를 구사한다. ‘잘 가라, 서커스’를 쓰기 위해 작가는 연변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현지어를 익히고, 현지 사람들과 살 비비며 살았다. 작가에게 어느 작품인들 산고(産苦)가 없으랴마는, 힘겹게 녹여낸 현지어와 고유명을 번역어로 살려내지 못하고 지워질 수밖에 없는 점을 작가는 번역의 아쉬움으로 꼽았다.
프랑스에 한국 소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한국문예진흥원의 지원 아래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공동 번역 형태로, 파리가 아닌 남프랑스 아를에 있는 악트 쉬드 출판사가 근거지였다. 이청준, 조세희, 이문열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의 중편들이 문고판 형식으로 고급스럽게 출간됐다.
2000년대 전후에는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 지원 중심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영미권이나 독일에 비해 활발한 편은 아니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해외의 경우 한국 소설의 번역 출간은 물론, 출간 즈음 한국 작가 현지 파견 행사에 이들 기관의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세계 독자와 소통하는 경우는 김영하, 신경숙 이외에 드물다. 천운영과 김언수의 소설이 프랑스 파리에 착륙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만나기 위해 모인 파리지앵들 틈에서 지금까지 국가와 문화기관이 꾸준히 지원해온 한국문학의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토를 개척하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