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주곡(遁走曲) 80년대
1.근년 들어 거주지를 옮길 때, 그가 마지막으로 싸야 하는 이삿짐은 언제나 책과 원고였다. 하지만 책은 서른 이전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때 끌고 다니던 책 보따리에서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고, 살림이 좀 펴면서 장서(藏書) 개념으…
이문열2018년 08월 08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 지난 2년 갑자기 ‘뜬’ 작가가 되어 거의 달마다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게 되면서, 그에게는 서울에만 오면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는 무슨 새로운 버릇 같은 게 생겼다. 그곳이 어디든, 그리고 언제든 그가 들르게 되는 빌딩 모…
이문열2018년 06월 13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 길고 오랜 전화벨 소리에 깨어나 보니 그가 서재로 쓰는 사랑방이었다. 밤샘 치다꺼리를 대강 마친 뒤 식구들을 모두 집에서 내보낸 뒤에야 이부자리에 들면서 다시 내린, 남쪽 창틀 두터운 커튼을 뚫고 가는 햇살이 올올이 다발 지어…
이문열2018년 05월 13일둔주곡 80년대
1.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손 기자였다. “나요. 그냥 듣기만 하시오. 거기 내 책상 서랍에 말이요….” “그렇게 음모적으로 목소리 가라앉히지 마세요. 지금 우리 부서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어요. 또 누가 있다고 해도 선배님과 제…
이문열2018년 03월 11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토요일이라 서둘러 편집을 끝내고 첫 교정지를 내려보내며 퇴근을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 주거래 출판사의 노 부장이었다. “불휴 씨, 긴급이에요. 조용히 듣고 대답만 하세요.” “예?” “사장님 지신데요, 얼른 퇴근해서 …
이문열2018년 02월 11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어떤 기대 또는 선입견 탓이었을까, 새마을 특급열차가 서울역 구내에 들어설 때부터 역 광장 쪽의 무언가 차가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까닭 모를 불안까지 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부러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로 서울역…
이문열2018년 01월 07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일찍 퇴근해 돌아가니 아이 둘과 함께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맞아주었다. 어린이 방송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듯 아이들은 부리부리 박사에 취해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
이문열2017년 12월 10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 시작은 무겁고 깊은 잠이었을 것이다. 전날 저녁 9시 뉴스가 끝나고부터 쓰기 시작한 새 장편 초고가 이튿날 새벽 4시를 넘기면서 한 단락이 마무리되자마자 그는 거의 혼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그 잠의 끝은 가위눌림과도 …
이문열2017년 11월 12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구름 치솟는 어둑한 하늘 높이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지혜의 독수리? 또는 요한계시록에 뜨는 묵시의 독수리? 그의 머릿속은 시사실(試寫室)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에서 쏟아진 흑백의 빛살이 스크린에 영상을 펼쳐…
이문열2017년 10월 15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휴가철이 절정이어서인지 거리는 좀 한가했다. 출근시간 도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도 거리 이쪽저쪽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그쯤에서 ‘공장’ 사람을 한두 명 만나 인사말을 건넸을 만큼 신문사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이문열2017년 09월 10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신문사 소회의실이 마땅치 않아 바깥 다방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차 다시 문화부를 들렀더니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이 작가. 황 기자가 좀 보자는데. 곧 신문사로 돌아온다고. 저를 잠깐 만나주고 가달라나.”…
이문열2017년 08월 13일둔주곡(遁走曲) 80년대
1.말 위에서 한식을 만났는데 (馬上逢寒食)돌아가는 길 벌써 늦은 봄이네. (途中屬暮春)옛 강나루 애틋이 바라봄이여 (可憐江浦望)낙수다리 위에 아는 이 안 보이네. (不見洛橋人) 언제부터인가, 아마…
이문열2017년 0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