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기계 류광억의 존엄한 죽음
근자에 한양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대신 써주고 돈을 버는 글쟁이를 거벽(巨擘)이라 부른다. 독자 제위들께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큰 성취를 이룬 대가라는 뜻의 이 단어는 실은 반어로서 지독한 조롱의 뜻을 담고 있으렷다. 세상에 사고…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10월 08일누구나 마음속엔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남쪽 바닷가 김해에서 벌어진 이 사소한 사건이 어쩌다 나라님 귀에까지 들어가 조정에 큰 사달을 일으켰는지 미천하기 짝이 없는 이년으로선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고을 수령 어른께 저간의 모든 사정을 이실직고하라는 추상같은 분…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9월 12일조선 여인 초옥의 사랑 없는 인생
양노파라 불린 한 조선 여인의 기묘했던 일생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건 식민지 조선 경성시의 경부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염탐하고 묘사하기를 즐겼던 비밀스러운 문학도로서 나 하라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7월 26일계집종 순매가 벌인 슬픈 유희
상공과 헤어져 만나지 못한 지 어언 한 해가 지났어요. 다시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운종가의 풍류선비 이정하. 비천한 계집종 주제에 감히 양반 이름 석 자를 또다시 입에 담아버리고 말았어요. 지난 묵은 인연들이 파도처럼 물밀려들어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6월 14일평양 기녀 오유란이 살아남은 법
나 오유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기녀들의 전쟁터로 불리던 평양성에서 나이 어린 동기 중 으뜸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그로부터 어언 사십여 년이 훌쩍 흘러 이젠 퇴기 신분으로 죽을 날만 받아놓은 신세이건…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5월 21일시인 이언진의 유언
한어 역관이던 이언진이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의 죽음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한양 문단으로 퍼져나갔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하던 그가 갑자기 한양을 떠나 경기도에 칩거한 과정도 의문이었지만,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원고를…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4월 19일돈이 능력인 세상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 가회방 집에 도착하고 보니 마당에서 닭을 삶고 있던 계집종 말년이가 태연스레 싱긋 웃더니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또 속으셨습니까?”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3월 17일호랑이가 가르쳐준 겸손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2월 15일유령 똥지게꾼, 한양을 퍼 나르다
깊은 밤 괴상하게 비틀린 몸으로 한양 육조로를 향해 걷는 사내를 멀리서 발견한 숭례문 순라군들은 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붙으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추격을 포기한 순라군들은 가까운 우포청…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3년 01월 13일[환상극장] 양반에 관한 우아하지 못한 농담
사촌형 박명원이 서안에 기댄 채 졸고 있던 박지원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지원아, 눈 좀 떠봐라. 나 명원이 형이다.”눈을 비비며 뚱뚱한 몸을 천천히 일으킨 지원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명원을 멀뚱히 바라봤다. 빙그레 미소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12월 15일[환상극장] 연암과 미치광이 송욱, 더불어 세상을 논하다
“송욱이 도대체 누군가?”벗이 찾아와 박지원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송욱이야말로 이 시대의 현자지. 공자를 나무랐다던 저 옛날의 장저와 걸닉을 떠올려보시게나.”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지원이 대답하자 벗이 볼멘 표정으로 다시 물…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11월 10일박지원과 민옹(閔翁), 어두운 도시의 산책자
간들거리며 흔들리는 호롱불을 훅 불어 끈 늙은 이야기꾼 민옹(閔翁)이 여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갓 열여덟 살이 된 박지원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검푸른 밤하늘을 수많은 별이 수놓고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10월 11일최후의 날, 허균이 남긴 미래 책
낙엽이 한양 이화방 골목길을 이리저리 쓸며 구르던 가을, 그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낯선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이화방 구석에 자리 잡은 허균의 외손 이필진의 집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한 치…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9월 15일詩에 홀린 자, 그의 이름은 이달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8월 15일기축년의 사나이, 요술사 장도령
요술사 장도령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향실은 정신없이 우포청을 향해 내달렸다. 운종가 대로를 어찌나 빠른 속도로 주파했던지 향실을 알아보고 인사하려던 몇몇 상인은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손짓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7월 13일도술사 장한웅과 오니(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6월 08일신선이 되고자 한 살인자, 남궁두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따분한가? 안 그런가?”느닷없이 나타나 허락도 없이 옆자리에 앉은 사내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는 계속 뭐라고 속삭였지만 목소리는 저물녘 바람에 실려 멀리 변산 앞바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고요히 바닷가 풍경…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5월 12일근심의 성에 숨어버린 은둔자
율곡 이이가 사망한 직후 조정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 곳이 돼버렸다. 정신적 지도자를 잃은 서인들은 더욱 긴밀히 결집해 나갔고, 동인들은 권력의 공백을 틈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인도 서인도 아니었던 승정원 주서 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4월 14일[환상극장] 베트남 호이안 항구의 슬픈 기적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2월 08일[환상극장] 광해군을 압도한 明나라 역관의 실체
한양 돈의문 서북쪽 모화관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단은 마치 도둑처럼 숨죽인 채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그들은 조선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조선 왕이 보낸 영접사는 저물녘이 돼서야 겨우 나타나 명나라 역관 주융기를 몰래 불러냈다.“주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2년 0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