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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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라군들의 말을 허풍쯤으로 반신반의한 당직 포교는 투덜거리며 말에 올랐다. 그가 문제의 사내를 발견한 건 육조로와 운종가 대로가 만나는 사거리 언저리에서였다. 상대를 간이 부은 좀도둑 정도로 얕본 포교는 쉽게 추포하리라 여겨 말을 몰아 내달렸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포교가 말을 모는 속도에 비례해 사내의 이동 속도도 빨라져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의정부를 훌쩍 지나 좌포청 관할 구역에 들어설 무렵 포교는 말을 멈췄다.
사내의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몸은 비정상적으로 꼬여 있었고 자세히 바라보니 등에 무거운 짐짝 같은 걸 지고 있기까지 했다. 포교는 갑자기 이상한 마음이 들며 소름이 끼쳤다. 천천히 말에서 내린 그는 때마침 구름 밖으로 살짝 비어져 나온 달빛에 의지해 사내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사내가 등에 진 건 아무래도 똥장군 같았다. 몇 발짝 살금살금 앞으로 내딛던 포교가 급작스레 속력을 높여 상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포교는 어영청 본영 앞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저 멀리서 여전히 비틀대며 걷고 있던 똥지게꾼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추격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종묘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섰을 때 그가 두고 왔던 말이 마침내 주인을 찾아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신출귀몰 똥지게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똥지게꾼은 그 후로도 드물지 않게 목격되곤 했다. 몸이 단 좌포청과 우포청이 협력해 동쪽과 서쪽에서 상대를 몰아봤지만 그 또한 허사로 그쳤다. 똥지게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양 포청의 포졸들은 텅 빈 대로에서 서로 마주쳐야만 했다. 흉흉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대간들이 임금에게 이 해괴한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실권이 없던 젊은 왕은 권문세가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바람 앞에 등불 같던 왕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었다. 왕을 조종하던 벌열가 세 가문은 인왕산 아래에서 회동해 의견을 모았고 그 의견은 도승지 김병집을 통해 왕에게 전해졌다.
“전하의 자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저희 안동 김문이 건재하는 한 그러할 것임을 의심치 마소서!”
도승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이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물었다.
“적잖이 안심이 되오. 그럼 그 똥지게꾼은 어쩌기로 하셨소?”
가볍게 한숨을 내쉰 병집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자가 유령이라는 낭설을 퍼뜨리는 자부터 잡아들이기로 했사옵니다. 요즘 같은 태평성대에 불길한 유령이 출몰하다니, 이게 정녕 말이 되옵니까? 필시 나라에 반감을 품은 역도 짓일 게 틀림이 없사옵고, 아울러 요망한 혀를 놀려 소문을 내는 자 역시 한패거리임이 분명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민심을 해치는 그자를 서둘러 추포해야 하겠구려! 비책이라도 있소?”
병집이 눈자위를 떨며 노기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대신들을 불러들여 의금부와 금위영을 동원해 놈을 잡아들이라 명하소서!”
의아한 표정이 된 왕이 거듭 물었다.
“역도 추포에 의금부가 나서는 거야 당연하지만, 금위영은 왜?”
고개를 빳빳이 쳐든 병집이 음산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정말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똥지게꾼은 늘 숭례문에서 흥인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양 방향의 샛길까지 모조리 틀어막고 가운데로 몰아봤건만 놈은 번번이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사라진 지점이 딱 종묘와 창덕궁 근처가 아닙니까?”
말없이 손만 부들부들 떨던 왕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뗐다.
“그렇다면 날 의심하는 것이오? 설마 나를?”
의미심장하게 옅은 미소를 머금은 병집이 대답했다.
“그거야 잡아봐야 알 일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전하께서 벌인 일이 아니더라도, 전하를 위한답시고 궁궐 안 누군가가 벌인 일인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토끼몰이
“나라의 척추와도 같은 저희 집안을 똥으로 욕보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를 놀리고 시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러하니 도성방위군인 금위영을 동원해서라도 궁궐 구석구석까지 살피도록 명하시고, 또 필요하다면 하시라도 의금부 병력을 궐 안으로 들이셔야 할 줄로 압니다.”똥지게꾼이 나타날 걸로 예상된 초저녁부터 한양 사대문 안을 수많은 포졸이 삼엄하게 경비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상대를 역도로 규정한 의금부는 숭례문에서 흥인문에 이르는 모든 골목길 요소마다 각기 다섯 나졸을 거느린 나장들을 배치했다. 이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던지 세도가들은 창덕궁 외곽을 수비하던 금위영 병력을 총동원해 대궐 주변을 촘촘히 에워싸게 했다.
궐내각사에서 숙직하며 임금의 동태를 엿보고 있던 병집은 수시로 금군들을 이끌고 궐 안을 순찰했다.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똥지게꾼은 평범한 인물일 수 없었다. 훈련된 포교가 말을 타고 추적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놀라운 속보 능력을 갖춘 데다, 하필 창덕궁 인근에만 이르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신통술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병집은 상대가 왕과 연루된 인물일 것으로 확신했다.
“침전에도 별다른 기척은 없겠지?”
등롱을 들고 인정전 뜨락에 나타난 금군별장의 전령에게 병집이 매서운 말투로 물었다.
“전혀 미동도 없으십니다. 별장께서 나인들까지 통제하고 계시니 쥐새끼 한 마리도 멋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인 줄 압니다.”
전령이 말을 마치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병집의 기색을 살폈다. 바람에 펄럭이는 등롱 불빛에 언뜻언뜻 음영을 바꾸며 나타나는 도승지의 얼굴은 긴장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
“이게 무슨 해괴하고도 쓸데없는 짓거리란 말이냐! 가만히 용상에 죽치고 앉아 호의호식하면 될 것을! 아직도 자기가 왕인 줄 아는 거라면 이참에 꽉 눌러놔야 한다.”
뒷짐을 진 병집이 인정전 쪽을 바라보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그 자세로 멈춰 서 있던 그가 전령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토끼몰이는 오늘 하루로 끝내야 해. 민심이 흉흉하다. 너도 우리 가문 사람이니 잘 알지?”
숨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전령이 왼손에 쥔 환도 칼집에 힘을 줬다. 빙그레 미소 지은 병집이 덧붙였다.
“똥지게꾼이 궁궐 근처로 오면 금위영 군졸이든 의금부 나졸이든 개의치 말고 궐 안으로 들인다. 임금도 대략 동의했으니 서슴지 말고 대궐 구석구석을 뒤지도록 놔둬라.”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전령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고, 별장께서도 이미 그리 하실 걸로 알고 있습니다.”
궐내각사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병집이 다시 나지막이 속삭였다.
“궐 안의 금군들 속에는 선대왕이 심어놓은 친위대 놈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정조께서 승하하신 지가 언젠데 여태 선왕에 대한 충성이니 뭐니 떠드느냔 말이다. 그 녀석들은 틀림없이 궁궐을 방어하려 의금부에 맞설 게다. 똥지게꾼이 그들 중 하나라면 마침 아주 잘됐고! 이번에 모조리 솎아내 요절을 내버리겠다.”
창덕궁 진입
육조대로에서부터 시작된 몰이꾼들의 함성이 차츰 창덕궁 쪽을 향했다. 말발굽 소리와 횃불 불빛이 동시에 물밀려들자 반대 쪽 흥인문 방향에 매복해 있던 나졸들이 금위영 병력들과 협력해 길고 조밀한 저지선을 만들었다. 똥지게꾼이 귀신이 아닌 한 창덕궁 앞에서 체포돼야 마땅한 상황이었다.의금부 나졸들과 포도청 포졸들로 구성된 몰이꾼들은 창덕궁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창칼과 총포로 무장한 금위영 병력들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맞은편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창덕궁 정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대궐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금군별장이었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똥지게꾼이 오늘도 하필이면 대궐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놈이 궐 안으로 숨어든 게 틀림없다. 말인즉슨 범인이 금군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마주 보고 대치하던 양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별장이 다시 소리쳤다.
“지금부터 권한이 없는 포도청은 모두 물러난다! 대신 금위영이 궐 밖에서 엄호하고 의금부 병력이 궐로 진입해 놈을 이 잡듯이 찾는다!”
그때 의금부 도사가 별장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병조판서 허락이 있었습니까?”
별장이 씩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사가 다시 물었다.
“주상께서도 윤허하신 일입니까? 의금부가 함부로 궐로 진입하면 역적이 됩니다.”
칼집을 만지작거리던 별장이 도사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대답했다.
“난 그렇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주상을 지근거리에서 보위하는 이 금군별장이 금군을 못 믿겠다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
별장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던 도사가 크게 한숨을 몰아쉬더니 뒤돌아서서 나장들을 향해 외쳤다.
“곧 궐 안으로 진입한다. 똥지게꾼이 금군일 수도 있다. 허튼짓을 하는 금군이 있다면 바로 추포해 의금부로 압송할 것이다. 신속히 처리하고 빨리 궐을 벗어나야 할 것이야!”
의금부 나졸들은 인솔하는 나장과 금군 뒤를 따라 창덕궁 안으로 재빠르게 진입했다. 때마침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타난 금위영 도제조를 향해 별장이 급히 입을 뗐다.
“도제조 대감! 진즉 댁에서 쉬시라 연통했사온데 어찌 직접 행차하셨는지요?”
하얗게 센 눈썹을 찌푸리며 도제조가 속삭였다.
“내 아무리 나이가 일흔을 넘겼다지만, 그래도 금위영을 자문하는 도제조로서 나와봐야 마땅하지 않겠소? 한데 말이오. 금위영 병력을 어떻게 쓸 셈인가? 설마하니 여차하면 궁 안에까지 들이려는 건 아니겠지?”
별장이 말없이 딴청을 피우자 도제조가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까짓 똥지게꾼 귀신 하나 잡으려고 이 소란을 벌이나? 쯧쯧. 하긴 속셈이 따로 있겠지? 아무튼 불똥이 우리 가문에 튀지는 않게 깔끔히, 아주 깔끔히 처리하시게.”
마지막 친위대
침전 주변을 둥글게 에워싼 친위 금군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동료 금군들과 의금부 나졸들을 향해 칼과 창을 겨눴다. 그들을 향해 다가선 금부도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무기를 버리고 의금부로 가 조사를 받으시오!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면 전하께서 깨실 것 아니요?”
상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친위대는 진영을 두 겹으로 재정렬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도사가 궐에서 칼을 빼는 것을 망설이자 그 뒤로 다가온 별장이 거침없이 소리쳤다.
“나 금군별장이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해산한다! 나의 명이 곧 주상 전하의 명과 같으니 어서 따르라!”
친위대는 대답 없이 방패를 세워 방어를 견고히 하며 좁게 응축됐다. 방패 사이로부터 궁수들이 화살을 별장을 향해 겨눴다. 별장이 뭐라 입을 떼려 하자 화살 하나가 날아가 그의 투구를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자기 휘하의 금군들이 대응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며 별장이 다시 말했다.
“너희들 정체를 내가 잘 안다. 항상 따로 놀던 친구들이지? 선대왕께서 기른 친위대가 맞지? 그렇다 해도 이젠 다 같은 금군 소속이 아닌가? 살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하길 바란다.”
침묵에 빠져 있던 친위대 가운데에서 한 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진영 밖으로 조심스레 나서며 속삭였다.
“별장은 속셈을 말하라. 주상 전하를 해치려는 거라면 우리 시신을 밟고 가라. 하지만 인정전 뜰을 너희 피로 물들여야 할 것이야.”
허리춤에 두 손을 댄 별장이 상대를 향해 느긋하게 입을 뗐다.
“너희들, 장용영 출신들 맞지? 돌아가신 정조께서 무던히도 아끼셨다고 들었다. 난 너희의 그 뛰어난 무공을 아낀다. 세상은 바뀌었고, 장용영 같은 친위 별동대가 더는 필요 없어졌어! 우리 같은 무부들은 세월에 충성해야지 사람에 충성하면 끝내 단명하게 된다. 의금부로 압송돼도 똥지게꾼과 관련 없다면 바로 방면될 것이다. 그때는 내 밑으로 돌아와라!”
별장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친위대 수장은 말없이 자기 진영 안으로 돌아가 돌격 준비를 명했다. 한숨을 몰아쉰 별장이 급히 의금부 나졸들 뒤로 몸을 숨겼다. 첫 충돌은 싱겁게 친위대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의금부 나졸들의 재래식 검술은 정조가 오랜 세월 훈련한 장용영의 최신 검법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도승지
부상을 당한 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나졸들이 뒤로 물러나자 그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금군들이 친위대를 번갈아 공격하며 힘을 빼기 시작했다. 화살이 떨어진 친위대는 창과 칼로만 대응하다 마침내 지쳐 방패 뒤로 몸을 숨기고 간헐적으로 수세에 몰려야만 했다. 더 길게 이어질 듯하던 공방전은 갑자기 나타난 금위영 군사들이 발포한 총포에 의해 끝나버렸다.침전 앞뜰은 총상을 입고 죽어간 친위대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용포도 걸치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온 왕은 너무 놀라 내시들의 부축으로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무릎 꿇은 금군별장이 뭐라고 길게 설명하고 하교를 청했으나 왕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신이 하나둘 치워지고 금위영 병력이 궐 밖으로 물러나자 그제야 왕이 입을 겨우 뗐다.
“병판은 어디 있느냐? 내 군병의 진입을 허락한 적이 없거늘, 감히 대궐 경내에서 발포하라 명한 건 누구냐?”
궐내각사에서 숙직을 서고 있던 도승지가 병판을 대신해 대답했다.
“병판은 의금부에서 죄인들의 호송을 기다리다 조금 전 소식을 듣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도승지 병집을 노려본 왕이 언성을 높여 물었다.
“죄인? 누가 죄인이냐? 날 호위하던 저들 친위대가 죄인이라고 했느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조아린 병집이 차분하게 다시 대답했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하오나 저들은 금군 소속이면서도 금군별장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했고, 게다가 주상께서 허락하셔서 궐에 진입한 의금부 도사의 명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산 채로 추포하려 했사오나 워낙 사납게 저항하는지라 부득이 금위영 병력이 진입한 줄 압니다.”
멍하니 병집을 바라보던 왕이 흐느끼는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 죄라는 것이, 고작 똥지게꾼을 흉내 내며 저자를 걸어 다녔다는 것 아니더냐? 그게 정녕 금군을 도륙할 명분이 되는 것이냐?”
잠시 침묵하던 도승지가 갑자기 목청을 돋워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전하! 그건 소신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십니다. 과연 똥이 뭐란 말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 똥을 지고 종묘와 대궐 주변을 휘젓고 다닌다면, 그게 뜻하는 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대체 뭘 뜻하오?”
“종묘사직 나아가 지엄한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그건 곧 역모나 다름 없고, 그 일을 획책한 자들은 역도들인 것입니다. 금군 내부에 그런 도당이 숨어 있다면 얼마나 위태로운 일입니까? 전하께선 부디 노여워 마시고 오히려 역도들을 미리 색출해 제거한 일을 백성들과 더불어 기뻐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선왕과 날 목숨 걸고 지키던 자들을 잃었는데, 그걸 기뻐하라?”
대답 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도승지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침전 뜰 저편에서 삐거덕거리는 소음과 더불어 정체불명의 사내가 비틀대며 걸어오는 모습이 뿌연 영상처럼 나타났다. 똥지게꾼이었다.
예덕 선생
똥지게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에 얹은 똥장군 틈에서 오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피비린내 진동하던 뜰은 순식간에 똥냄새로 가득 찼다. 사지를 뒤틀며 간신히 왕 앞에 이른 똥지게꾼이 멍하니 전각들을 응시하다 발을 헛디디며 똥장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사방으로 오물이 튀자 모여 있던 금군들과 신료들이 코를 막고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정신을 차린 궁중 나인들이 옷가지를 풀어 바닥의 오물을 서둘러 닦기 시작했다.“그대는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왕이 물었다.
“쇤네는 탑골 근처 사는 엄행수라 하옵니다.”
기이하게 울림 많은 목소리로 똥지게꾼이 대답했다. 바닥에 한 걸음 내려서며 왕이 다시 물었다.
“너는 분명 사람이로구나! 왜 그리 힘들게 밤마다 돌아다녔느냐?”
서서히 지게를 바닥에 받쳐놓은 엄행수가 왕에게 절을 올린 뒤 대답했다.
“똥을 퍼 나르는 게 쇤네 천직이옵고, 그저 그 일을 쉬지 않고 했을 뿐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똥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지만 실은 저들을 먹여 살리는 게 바로 똥입니다. 똥으로 만든 거름이 없다면 기름진 땅에서 나는 작물을 맛볼 수 없을 것이요, 인류는 끝내 사라질 게 아닙니까? 그러니 똥이야말로 농부의 하늘이요 생명의 끝이자 시작인 셈이지요.”
“생명의 끝이자 시작이라?”
“생명들이 살려고 먹은 것들은 입을 거쳐 똥구멍에서 여정을 마칩니다. 한데 그것들 또한 한때 생명이었던 것들입지요! 자기 생명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고 죽은 것들인데, 그로부터 다시 거름이 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생명의 순환이 이보다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고개를 크게 끄덕인 왕이 속삭이듯 또 물었다.
“일리가 있구나! 그런데 넌 왜 밤중에 한양을 돌아다녀 세상을 이리 소란케 했느냐?”
우두커니 바닥을 내려다보던 행수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쇤네는 선대 임금 시대에 천직을 내려놓고 죽으며 이 긴 노역을 겨우 마쳤구나 생각했더랬습니다. 한데 어느 순간 지게를 다시 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유도 모른 채 다시 한양의 똥을 치우기 시작했을 따름입니다.”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던 왕이 조금 뜸을 들였다 거듭 물었다.
“이미 죽었는데도, 그런데도 여전히 똥을 치우고 있다는 뜻이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행수가 다시 지게를 어깨에 지며 대답했다.
“그게 끝이 없을 쇤네의 일인 모양입니다. 예전 연암 선생이란 분이 절 일컬어 예덕 선생이라 추켜세웠었는데, 아무래도 그 소식이 염라대왕에게까지 전해졌나. 뭐 그리 여기고 있을 뿐입지요.”
행수의 지게 위에 깨진 똥장군을 손수 얹어준 왕이 슬픈 눈빛으로 속삭였다.
“장하구나! 진정 예덕 선생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미천한 고역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그렇다면 요즘 한양의 똥은 너 때문에 많이 줄어들고 있겠구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행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려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 쏟아진 게 아직 똥으로 보이십니까? 요즘 쇤네는 한양의 쓸모없는 것들을 죄 똥으로 여겨 치우고 있습지요. 거름으로라도 쓸 수나 있을지 모르겠나이다. 건물도 사람도 그리고 여타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퍼 날라 버릴 요량입지요. 종당엔 한양이 다 없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입지요.”
말을 마친 행수는 온몸을 비틀며 느릿느릿 침전 뜰을 벗어나더니 대궐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왕이 화급히 도승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이 작품은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