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 식객’ 안견이 수양대군 치하에서 목숨 건진 까닭[환상극장]
도화원 화공 안견은 경복궁 우측 가회방에 자리 잡은 자신의 집에서 말년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화공 출신으로선 바라기 힘든 정4품 호군 벼슬까지 하사받았고, 잘 가르친 자식들을 버젓한 양반 신분으로 만들었으니 요족하기 그지없는 삶…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12월 14일‘칸’을 배신한 ‘투명인간’ 고려 노예 [환상극장]
자신의 존재가 남들과 달리 몹시 희미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어린 하윤근은 놀랍다기보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개경 남문 밖에서 대대로 양봉업에 종사하던 집안 막내로 태어난 그는 동무들과 어울려 성안 골목길을 무대로 술래잡기를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11월 17일한평생 이야기를 쫓은 자의 최후 [환상극장]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10월 11일[환상극장] 사랑, 불멸을 건너는 단 하나의 놀이
삶이란 것이 어차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놀음과 같다면 그 무의미한 질곡에서 구태여 발버둥칠 필요가 있을까? 전라도 남원의 만복사 대웅전에 앉아 부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양구령은 그런 질문을 자신을 향해 던져보았다. 깊은 새벽, 아침…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9월 12일[환상극장]길을 잃은 선비, 두타동천에서 사라지다
두타동천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무주암에 귀티 흐르는 젊은 서생이 나타난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강원도 깊은 골짜기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는 개경 부호의 아들 최문해였다. 문해는 자신의 이름조차 숨기고 객방에만 틀…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8월 15일‘악귀’ 선녀를 만난 홍윤성의 선택 [환상극장]
달빛은 파리했다. 수양대군이 거느린 병력은 반역을 도모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책사들의 충고에 따라 그는 우선 경복궁 모든 출입문을 장악한 뒤 봉쇄했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간 상태여서 금군의 경계는 한없이 태만했고, 그 틈이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7월 18일압구정, 조선, 대우주가 일거에 사라진 이유 [환상극장]
한국 국적 비행선 용궁 2호기가 화성 남반구 K구역에 조용히 착륙했다. 화성 개발 총책임자 한선아 박사는 자신이 이룩한 위업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 익숙하고도 낯선 별을 직접 방문했다. 연결 통로를 거쳐 캡슐 모양 궤도열차에 오른…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6월 06일[환상극장]조광조의 비밀과 봄이 두려운 신 대감
꽃이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봄이 되자 차례대로 벙그는 꽃잎은 잔인하게 아름다웠고, 차츰 우거지기 시작한 풀과 나무는 징그럽게 땅 위를 덮어나갔다. 예전엔 화사해 보이기만 하던 봄이 서재 안에까지 밀려들어 마침내 사람 목마저 옥죌 것…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5월 16일박팽년과 성삼문의 은밀한 약속 [환상극장]
꿈이라 여기기엔 머리로 전달되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분명 현실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을 복기해 보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해낼 수 없었다. 눈을 뜨려 노력하던 그는 포기했다. 기괴한 합성음이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4월 11일“그녀를 위해 살아남다” 신라 전쟁영웅 비사(祕史) [환상극장]
고삐를 놓고 말의 갈기를 움켜잡은 설수연은 고개를 숙이고 통곡했다. 바로 눈앞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달릴 길이 더는 없었다. 말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먼동이 터오기만을 기다리며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했다. 아득한 북쪽에서…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3월 13일[환상극장] 운명적 사랑이 만든 기이한 ‘불멸(不滅)’
아내를 의심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려 개경의 선비 이임생은 안절부절못한 채 뜨락을 거닐며 어서 빨리 날이 새기만을 바랐다. 마침내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비쳐들 무렵 피곤한 기색의 아내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비석처…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2월 14일신라 천재 최치원의 금지된 사랑
운하 옆 오층 주루 난간에서 바라다보이는 소주 지역의 밤 풍경은 찬란하고도 위엄 있었다. 등불 밝힌 누각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을 넋 놓고 감상하던 고려 역관 최인량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한시를 조용히 읊조렸다. 그가 …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1년 01월 03일승려와 여인, ‘영원한 꿈’에 살다
야밤을 틈타 낙산사 대웅전에 몰래 들어선 승려 조신은 다짜고짜 두 다리를 쭉 펴고 불상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보시오, 석가모니. 날 알아보시겠소?” 불상은 말없이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조신이 눈물을 흘리며 넋두리하듯…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12월 06일관음보살이 부처가 못 된 까닭
우주는 권태롭고 나른했다. 누군가는 성불해 부처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중생에 머물러 삶의 고해를 끝없이 떠돌아야 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 나름대로 신나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몸으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11월 07일호랑이 여인의 죽음과 화랑의 후손
반월성 북쪽 숲속으로 쫓기던 호랑이 여인은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자신을 추격하는 신라 병사들이 내던 요란한 말발굽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여인이 덤불 아래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자 조금 앞서 달리던 호랑이가 되돌아…
윤채근 단국대 교수2020년 10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