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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한(漢)·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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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연재는 주(周)·진(秦)·한(漢) 당·(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동이족)와 중국(한족)의 접촉면에서 이뤄진 역사를 다룬다. 첫 회는 한족의 탄생. 한족의 나라 한(漢)과 만주-몽골-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흉노(匈奴) 사이에 길고도 거대한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고조선과 부여에도 도전과 변화의 세찬 물결이 밀려드는데….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한나라 주작도와 말 형상. [ 뉴시스] [ 뉴시스]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1982년 이래 영토 및 국민 통합을 위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했다. ‘중국’은 100여 년 전만 해도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부르짖던 한족 유일주의 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국가적 필요에 따라 역사관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한국, 몽골 등을 겨냥해 동북공정(東北工程), 티베트를 겨냥해 서남공정(西南工程), 중국 안의 위구르를 겨냥해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는 역사전쟁을 벌인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과 역사공정은 공격적 현실주의가 발현한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는 물론 몽골, 베트남의 역사 일부가 중국사에 포함됐다. 한때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으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된 티베트와 위구르의 역사도 같은 처지다.

중국의 억지 논리대로라면 당나라 시기 위구르족의 뤄양(洛陽) 대학살이나 여진족 금(金), 몽골족 원(元)의 중원 침공전은 내전으로 성격이 바뀐다. 북송(北宋)의 악비(岳飛)나 남송(南宋)의 맹공(孟珙)은 각기 여진과 몽골의 침공에 저항한 한족의 민족 영웅이 아니라 통일을 방해한 장수로 설명돼야 한다.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이주해 중동-북아프리카 대제국을 건설한 터키의 역사도 산산조각이 난다.

한국이 중국의 억지 논리를 차용하면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 대부분을 영토로 삼은 거란족의 요사(遼史), 여진족의 금사(金史)는 물론, 몽골족의 원사(元史)까지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더구나 거란, 여진, 몽골은 한족 계열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 계열의 민족 아니던가. 특히 금나라는 황족 완안씨(完顔氏)의 핵심 세력이 한반도 출신 김씨이며, 발해 대씨(大氏)가 황비족이었다. 그렇지만 금사, 요사, 원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 요, 원은 우리 민족의 원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화문명의 팽창

한족(漢族)은 인종적 개념이 아니다. 동일한 언어와 문자, 즉 한어(漢語)와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화적 개념이다. 보하이만(渤海灣) 유역의 랴오닝(遼寧)성, 허베이(河北)성, 산둥(山東)성 한족과 창장(長江) 이남 저장(浙江)성, 푸젠(福建)성, 광둥(廣東)성 한족은 혈연적으로는 거의 관계가 없다. 한족 숫자가 12억 명 넘게 늘어난 것은 4000년 중국 역사가 한족과 이민족 간 이질혼합을 통한 팽창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적족(원시 터키족)이 지금의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莊)을 중심으로 중산(中山)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전국시대이던 기원전 3세기 조(趙)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원전 12, 13세기에 시작된 주(周)나라 시기 황허(黃河) 이북 상당 부분은 적(狄), 융(戎), 맥(貊), 원시 선비족(鮮卑族) 등 북방민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즉, 적족이 조와 제(齊), 연(燕) 등 한족 국가 사이에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화하족(한족)이 북방민족이 살던 땅을 야금야금 침탈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중국, 즉 중화문명은 세 갈래 방법으로 팽창했다.

첫째, 주(周) 이후 역대 왕조가 유력한 제후들을 변경에 분봉해 이민족을 정복하게 했다. 이민족 거주 지역에 성읍(城邑)이라는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장해간 것. 지배민족인 한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경제·문화적으로 열등한 주변 민족이 한족에 동화했다. 산둥성의 제와 허베이성의 연이 황해 연안 래이(萊夷)와 원시 선비족 일부를 흡수하고, 산시성의 진(晉)이 적족을 흡수한 것이 이 같은 경우다. 스페인과 루마니아 등을 로마화(라틴화)한 로마인,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아랍화한 메카-메디나의 아랍족도 한족의 경우와 행태가 유사하다.

둘째, 진(秦)이나 초(楚), 오(吳)와 같은 창장 유역의 토착세력이 스스로 한족화했다.

셋째, 진(晉)이나 연과 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한족이 원시 선비족이나 원시 터키족 등 이민족과 섞여 살면서 이들을 동화했다.



國과 家의 탄생

기원전 1052년 산시(陝西)성을 근거로 한 무왕(武王) 희발(姬發)과 군사(軍師) 강상(姜尙)이 지휘하는 주나라와 소방(召方), 강(羌), 촉(蜀), 용(庸), 팽(彭), 미(微) 등의 동맹군 40만 명이 황허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 황허 중류 나루터인 허난(河南)성  맹진(孟津)까지 진출했으나 상(商)나라 군에 패해 회군했다.

소방은 상나라의 침략을 받아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적이 있으며,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칭하이(靑海)성 등에 잔존한 강족은 상나라에 노예로 잡혀 제물이 되곤 하던 부족으로 주나라의 외가였다. 희발의 증조모는 태강(太姜)이라 하는데 강족 출신이다. 시안(西安) 근교 풍(豊)을 수도로 한 주나라는 상나라가 산둥과 화이허(淮河) 유역 등 동방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점을 노렸다. 그러나 주나라 군은 고도로 발전한 청동 무기로 무장한 상나라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나라 군은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050년 오늘날의 후베이(湖北)성과 쓰촨성 지역에서 번성한 삼성퇴·금사(三星堆·金沙) 문화라는 고도의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촉, 용, 팽 등 부족들과의 동맹을 강화해 다시 상나라 정복에 나섰다. 주나라 동맹군 50만은 이번엔 황허 도하에 성공했으며, 허난성 서북부에 자리한 상나라의 수도 은(殷)의 교외 목야(牧野)까지 진격했다.

주나라 동맹군은 목야에서 상나라군 70만과 대회전을 벌여 상나라 군을 대파하고 은을 점령했다. 노예가 대부분이던 상나라 군이 창을 거꾸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나라 왕 주(紂)는 자결했으나, 그의 아들들인 녹보(祿父)와 개(開)는 살아남았으며, 상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도 큰 손실 없이 유지됐다.

주나라는 유력한 동맹 부족들과 함께 상나라라는 대규모 영토를 갑작스럽게 획득했기 때문에 전후 처리를 일방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족이나 상(商)의 후예를 포함한 유력 부족들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른바 봉건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최고통치자인 주나라 왕이 △왕가와의 친밀도 △군공(軍功) △봉지(封地)의 군사전략적 중요성 등을 고려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작위와 봉토를 나눠줬다. 그중 후작이 가장 많았던 까닭에 나중에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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