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조선에는 가망이 없다” 체념에 청년층 공감
한국 위상 상승했지만 “지금이 고점” 우려 확산
저출생·고령화로 경제·문화·국방 전반 무너질 우려
정치, 소멸해 가는 한국을 되살릴 심장제세동기 될까

구독자 2400만 명의 독일 유튜브 채널 ‘쿠르츠게작트’는 4월 2일 “대한민국은 끝났다(South Korea is over)”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은 조회수가 1100만 회를 넘겼다. 유튜브 채널 쿠르츠게작트 갈무리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4월 14일 군의관 후보생 대상 강연에서 했다는 이 말에서는 염증과 환멸이 느껴진다. 여기서 조선은 단순히 국호만을 뜻하지 않는다. 2030세대에서 한국 남자(한남), 한국 여자(한녀)라는 단어는 이성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담고 있듯, ‘조선’이라는 단어에도 때로는 국가를 향한 경멸이 담긴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이 병원장을 비난하지 않은 건 일평생 필수 의료의 최전선에서 헌신한 그의 삶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키려 한 필수 의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모두가 안다. 이른바 ‘이국종 탈조선’ 발언이 논란이라는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틀린 말 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논란이야?”
분노 다음 찾아온 체념
‘탈(脫)조선’은 익히 알려진 대로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다. 2010년대 중반 등장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뜻의 ‘헬(hell)조선’에서 파생됐다. 이 병원장의 탈조선과 10년 전 청년들의 탈조선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 이 병원장은 “입만 터는 문과들이 해먹는” 의료시스템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여기는 듯한데, 체념의 정서마저 느껴진다. 보통 체념은 분노 이후에 찾아온다. 10년 전 청년들은 분노 단계에 있었다. 경쟁은 치열한데 기회는 적은, 그래서 청년들의 열정을 헐값에 착취하는 나라. 실과 바늘처럼 ‘헬조선’이라는 단어 뒤에는 늘 ‘열정페이’가 따라붙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2000년대 뜨거웠던 중국발 호황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게다가 해외 아웃소싱이 보편화하며 일자리는 줄었다. 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대부분은 인문계 구직자였다. 이들은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여남은 양질의 일자리 중 하나였던 공무원에 몰렸다. 2011년엔 9급 공무원 공채 시험 경쟁률이 93.3대 1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해당 시험의 경쟁률은 21.8대 1이었다.
소설가 장강명이 2015년 낸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당시 청년들의 탈조선 열망에 불을 지폈다. 작품은 한국 사회의 이런저런 현실에 회의를 느낀 20대 여성 ‘계나’가 행복을 찾아 호주로 떠나는 이야기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소설의 메시지는 일종의 시대정신이 됐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매년 ‘청년 사회·경제 실태조사’에서 청년들에게 해외 이주 고려 여부를 묻는다. 헬조선 현상과 국정농단 사태 뒤인 2017년 관련 물음에 “해외 이주 의사가 있다”고 답한 20대와 30대는 각각 36.8%, 38.2%에 달했다. 주된 이유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였다.
소설은 9년 후 동명의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10여 년 전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만으로도 큰 공감을 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지옥 같다”고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 앞서 인용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2020년대 들어 해외 이주를 고려했다는 청년은 10%대로 급감했다. 확실히 요즘은 2030세대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열등감보다 긍지가 높다. 대내외 환경이 급변한 결과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15년 모 강연에서 “개발도상국에서 한 달만 지내면 금방 깨닫는 게 국민적 자부심”이라고 말해 청년층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당시 그는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장기 자문단의 일원으로 르완다 등 저개발국 원조 업무에 참여하고 있었다. 2015년에도 한국은 제법 괜찮은 나라이긴 했지만, 그 시절 청년들에겐 남의 나라 형편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만일 요즘 오 시장이 같은 발언을 한다면 공감할 청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위상과 이를 대하는 청년층의 인식이 달라졌다.
‘아시아에서나 잘 먹히는 나라’의 변신
방탄소년단(BTS)과 ‘오징어 게임’으로 상징되는 문화콘텐츠 역량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발달은 불닭볶음면·김밥 등 한국의 상품 및 콘텐츠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재작년 국내에서 유행한 탕후루가 한국 음식이라는 오해가 생길 정도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선 한국 화장품 수출액(17억100만 달러)이 프랑스(12억6300만 달러)를 제쳤다. 얼굴에 직접 바르는 화장품은 스마트폰처럼 기술력만으론 극복할 수 없는 신뢰 자본을 갖춰야 성공할 수 있다. 마치 인공지능(AI) 기술에선 미국과 함께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중국의 부자들이 정작 자기 아이 먹일 분유는 네덜란드산(産)을 선호하는 것과 같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스스로 ‘아시아에서나 잘 먹히는 나라’로 여겼던 한국이 이제는 미국·유럽 등 서구권에서도 인정받는 나라가 됐다.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동안 다른 선진국, 특히 유럽의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미국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2004년 ‘유러피언 드림’이라는 책에서 “치열한 경쟁보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유럽적 가치가 부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샌드위치 먹으며 시간 쪼개 일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반도체와 AI는 물론 전기차, 2차전지, 방산 등 최근 거론된 첨단산업에서 유럽의 이름은 찾기 어렵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역시 센강 수질부터 참가국명 오기(誤記), 메달 부식까지 행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한 난민 위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의 혼란을 가중했다. 10년 전만 해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모범국으로 평가받았던 독일은 극심한 갈등 상황에 놓였다. 난민에서 촉발된 사회갈등에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경제위기가 중첩됐다. 이는 극우 정당 득세라는 정치 위기로 이어졌다. 진보 진영의 이상향과도 같았던 복지 천국 스웨덴이 알바니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된 사실은 낯설다. 강력범죄 발생률은 유럽에서 2위, 1인당 총기 사고 건수는 1위다. 한국이 10년 전보다 성장한 측면도 있지만, 이제는 ‘탈조선’을 한다고 해도 마땅히 갈 나라가 없다.

2030세대 사이에서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학생 수 감소로 서울 소재 일반고 가운데 처음으로 폐교한 도봉고. 뉴스1
이들의 우려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갤럽이 4월 8~10일 전국 성인 남녀 1005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통령 국정 우선 과제’를 묻는 조사(2개까지 자유 응답·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에서 모든 집단이 경제 회복·활성화를 1순위로 꼽았다. 그런데 2~3순위는 세대나 이념에 따라 매우 엇갈렸다. 20대 이하는 14%가 저출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계엄 세력 척결이나 검찰개혁은 각각 2%, 1%에 머물렀다. 30대도 숫자는 조금 달랐으나 방향성은 유사했다. 차기 대통령 국정 우선 과제로 인구 문제가 꼽힌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론은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줄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40~50대의 경우 계엄 세력 척결과 검찰개혁을 국정 우선 과제로 꼽는 여론이 상대적으로 우세했다.
구독자 2400만 명의 독일 유튜브 채널 ‘쿠르츠게작트’는 4월 2일 “대한민국은 끝났다(South Korea is over)”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극단적 저출생·고령화로 한국이 경제·문화·국방 등 사회 전반적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이 영상은 조회수가 1100만 회를 넘겼다. 쿠르츠게작트 측의 주장은 이렇다. 합계출산율이 0.7명대인 채로 4세대가 지나면 100명은 5명이 된다. 즉 2060년 한국은 2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나라가 된다. 경제 활력은 줄어드는 데 부양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회가 지금같이 유지될 수 없다.
청년층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를 전달한 국내 유튜브 채널 ‘슈카월드’의 관련 영상 조회수가 며칠 만에 200만 회를 넘길 정도였다. 영상을 본 시청자들은 “애초에 문제 고칠 시기를 너무 많이 지나왔다” “이런 영상이 올라와도 체념하는 분위기라 더 무섭다” 등의 댓글에 많이 공감했다.
경제·통상·인구 문제에 집중 어려운 정치 상황
대선을 앞둔 후보들은 청년 지지 확보에 분주하다. 그도 그럴 게 2030의 표심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국갤럽의 4월 통합 여론조사에 따르면 ‘장래 정치지도자 선호도’에서 20대 이하의 53%가 의견을 유보했다. 30대는 37%다. 40대와 50대가 각각 21%, 18%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2030에서 표를 확장할 여지가 더 많다.각 후보들은 청년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만 하더라도 5월 6일 청년을 타깃으로 한 공약을 대거 발표했다. 자산 형성 지원, 구직활동 지원, 주거 지원 강화, 생활 안전망 강화 등이 공약의 얼개다. 이 후보는 코인거래소 수수료 인하 유도, 공공임대주택 확대, 전세사기특별법 개정, 공공기관 호봉 및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군복무 기간 반영 등을 통해 이를 실현할 것이라 약속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신입 공채를 진행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공채가 사라지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되고 있는 일자리 시장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는 고졸 이하 청년에 5000만 원 상한의 저리 대출을 지원하는, 이른바 ‘든든출발자금’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대학 비진학자는 학자금 대출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청년 공약은 확실히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그만큼 각 후보자와 캠프가 많이 고민했다는 방증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년 공약은 일자리 몇 개, 주택 몇 호를 공급하겠다는 공수표가 전부였다. 다만 청년층이 얼마나 호응하느냐는 별개다. 여전히 2030세대는 “구조적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당장 민주당만 하더라도 연금개혁 사태 때 청년층의 분노를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라든지 “세대 갈라치기” 등으로 일축하지 않았던가.
암울한 사실은 누가 당선되든 우리 정치가 대내외 경제·통상 문제, 인구 위기 등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서울고등법원이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파기환송심 첫 재판기일을 대선 이후로 미루면서 헌법 제84조 논란 등이 초래할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방어하느라 4년을 허송세월했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검찰을 잡는 데(검수완박)에, 윤석열 정부는 야당 대표를 잡는 데에 혈안이 돼 한국 사회의 ‘골든아워’를 까먹었다. 21대 대통령의 임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는 소멸해 가는 한국을 되살릴 심장제세동기가 될 수 있을까. 그 비전을 제시하는 쪽이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의 표를 가져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