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와인보다 맥주! 위기의 프랑스…美 관세 공격에 타격

[조은아의 유로프리즘] 붉은 와인 낭자한 ‘보르도 대학살’

  • 조은아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입력2025-06-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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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35세 미만 절반 “와인 마시지 않는다”

    • 와인 종주국 프랑스, 최대 소비 주류는 맥주

    • 건강 중시·핵가족화·경기침체로 와인 소비 감소

    • 20% 관세로 대미 수출길도 막혀

    • 와인 본고장 보르도, 포도밭 갈아엎기도

    프랑스 부르고뉴 샤블리 지역에서 포도 농장 인부들이 포도를 선별하고 있다. AP뉴시스

    프랑스 부르고뉴 샤블리 지역에서 포도 농장 인부들이 포도를 선별하고 있다. AP뉴시스

    “맥주 팝니다.”

    최근 프랑스 파리의 거리를 지나다가 이런 문구의 안내문을 내건 매장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그런데 맥주 전문점도, 일반 주류점도 아닌 와인 전문 매장인 경우가 적지 않다. 파리는 역사적으로 골목마다 와인 전문 매장이 흔한데 요즘은 이렇게 와인이 아닌 맥주를 홍보하는 곳이 늘었다. 203년 역사의 프랑스 와인 전문점 ‘니콜라’도 건물 외벽에 “여기서 맥주도 팝니다”란 공지를 내걸었다. 간판은 와인 전문점이지만 쇼윈도엔 맥주가 진열돼 있는 곳이 많다. 

    와인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프랑스에서 와인 대신 맥주를 앞세우는 매장은 드물었다. 원래 프랑스인은 대낮에도 식전, 식중, 식후를 나눠 다양한 와인을 마시는 와인 애호가들 아니던가. 실제 점심시간에 파리 곳곳 식당에선 여전히 와인도 눈에 띄지만 맥주도 부쩍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인의 와인 사랑이 과거보다 시들해진 탓이다. 프랑스 매체 ‘프랑스 앵포’에 따르면 프랑스의 와인 소비량은 1960년대에 1인당 연간 평균 120L였지만 최근엔 약 40L로 줄었다. 약 60년 새 70%가량 줄어든 셈이다. 

    르누아르, 보들레르가 사랑한 ‘와인’

    프랑스인의 와인 사랑은 전통이 깊다. 프랑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600년경 남부 마르세유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포카이아인들이 정착하며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 방식을 알렸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인들이 프랑스를 정복한 뒤 와인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중세 시기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와인이 만들어졌다. ‘와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종교 문화와 결합하며 더욱 번성했다. 



    프랑스는 와인 제조에 최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다. 토양, 날씨, 지형 등 자연적 요소와 수세기 동안 빚어진 양조 기술 등의 요소가 두루 갖춰졌다. 와인의 특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를 ‘테루아(Terroir)’라고 한다. 테루아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전통 와인 생산국들의 자부심이다. 

    와인 애호가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 뉴시스

    와인 애호가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 뉴시스

    프랑스인의 와인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지 명화나 고전 속에서도 와인은 꾸준히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선상 파티의 오찬’에서 포도와 와인은 주인공처럼 정중앙에 등장한다. 그림 속 와인 잔은 프랑스적인 삶의 즐거움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상파 거장 폴 세잔(1839∼1906)도 와인 병과 포도를 정물화로 자주 표현했다.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의 와인 사랑도 유명하다. 그는 시집 ‘악의 꽃’에 담긴 ‘와인의 영혼’이란 시에서 “어느 날 저녁, 와인의 영혼이 병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노래한다. 그의 우울을 달랜 보르도 와인 ‘샤토 샤스 스플린’은 보들레르 덕에 유명해졌다. 샤스 스플린(Chasse-Spleen)은 ‘슬픔이여 안녕’이란 뜻이다.

    최근까지도 프랑스는 대표적인 와인 소비 국가였다. 데이터 분석 웹사이트 세계인구분석에 따르면 연간 와인 소비량은 2022년 기준 프랑스가 2766L로, 미국(3138L)에 이어 세계 2위였다. 프랑스에 이어 이탈리아(2317L)가 3위, 중국(2151L)이 4위를 차지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와인 소비 최대 국가인 셈이다. 

    하지만 와인 소비가 부쩍 줄고 있다. 르누아르도, 보들레르도 살아 있다면 당황할 법한 상황이 됐다. 프랑스 농수산업진흥공사가 2022년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매일 혹은 거의 매일 와인을 마시는 사람’은 11%에 불과했다. 직전 조사 연도인 2015년에 비해 5%포인트 하락한 수준이다. 특히 젊은 층의 소비 감소세가 확연했다. 50세 이상 중 ‘매일 와인을 마신다’고 답한 비율은 18%였다. 20대나 30대에선 이 비율이 10%에 미치지 못했다. 35세 미만에서는 2명 중 1명꼴로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고 답했다. 

    가족과 와인 한잔 어려워져

    와인 소비가 감소한 주된 이유로는 젊은 층이 건강을 중시하며 음주를 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과거 프랑스에서 와인은 아동도 마실 수 있는 건강한 음료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유력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1947년 한 연구에서 프랑스인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와인이 건강에 좋다고 확신했다. 1950년대 초 기록에선 8세 아동이 학교에서 점심과 함께 와인을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풍토를 바꾼 인물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1907~1982) 전 국무장관이다. 그는 1954년 의회 의장과 국무장관을 맡았을 때 식당에서 14세 미만 아동의 음주를 금지하는 회람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대통령 집권기에 와인이 고교 식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건강을 중시하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음주를 멀리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3년 “술은 단 한 잔이라도 건강에 해롭다”며 술을 ‘1군 발암물질’로 지정하면서 와인 판매도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의 형태와 문화가 바뀐 영향도 있다. 저출산으로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한부모 가정이 늘며 와인이 함께하는 가족 식사가 줄어든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노년층은 와인 363개의 명칭과 다양한 풍토를 갖춰 문화유산으로 격상된 와인 생산지를 자랑스러워하며 와인을 소비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며 “이제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레드 와인 한 병을 곁들이는 전통은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도 와인 소비 추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40년간 프랑스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이후 회복기를 제외하면 거의 0~1%대였다. 저성장이 고착화된 셈이다.

    경기가 안 좋으니 와인에 돈을 쓸 여력이 없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2023년 6월 기준 프랑스의 식품 소비는 2021년 12월 대비 10% 감소했다. 이는 INSEE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80년 이후 처음으로 가정의 식품 소비가 감소한 사례다.

    주류 선택지가 늘어난 점도 와인의 인기를 추락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고급술은 와인’이란 인식이 워낙 강했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인들도 다양한 외국 식문화에 노출되며 여러 국가의 술이 많이 팔린다. 특히 넷플릭스를 타고 번진 한·일 콘텐츠의 인기로 한국 소주, 일본 사케 등도 더 주목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날씨가 더워진 점도 맥주 선호도를 높였다. 맥주가 청량감이 강하고 시원하게 쭉 들이켜기 좋기 때문. 주류 시장조사기관 소와인(SOWINE)에 따르면 2022년 프랑스인이 가장 선호하는 주류는 맥주였다. 2011년부터 매해 실시된 이 조사에서 맥주가 와인을 앞선 것은 처음이었다. 

    와인 소비가 줄어 와인이 남아돌게 되자 프랑스 정부는 급기야 포도 농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포도 및 와인 공급량을 줄여 가격 하락을 방지하고 농가를 보호하려는 취지다. 프랑스 농업부는 지난해 9월 1억2000만 유로(약 1940억 원) 규모의 포도 농가 지원 방안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프랑스 정부는 농가가 포도나무를 자진해서 뽑을 경우 1㏊당 최대 4000유로(약 650만 원)의 보조금으로 지급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 정책으로 최대 약 3만㏊의 포도밭을 갈아엎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축구장 4만2000여 개 규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표적 와인 산지인 보르도에선 피가 아닌 붉은 와인이 낭자한 ‘보르도 대학살’이 벌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와인을 더욱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정부가 EU에 20%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기 때문. 프랑스 와인·증류주 수출업체 연합(FEVS)은 4월 2일 보도자료를 내고 이에 대해 “프랑스와 유럽의 와인 및 주류 부문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프랑스의 (와인과 주류) 수출액이 약 8억 유로(약 1조3000억 원) 감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프랑스 와인·브랜디 생산자 연합(CNAOC)도 미국의 이번 관세 부과로 업계에 수억 유로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2일(현지 시간) 백악관 경내 로즈가든에서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라는 행사를 열고 국가별 상호 관세를 발표하고 있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2일(현지 시간) 백악관 경내 로즈가든에서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라는 행사를 열고 국가별 상호 관세를 발표하고 있다. AP뉴시스

    와인 농가 위기 타개책 마련

    와인에 자부심이 강했던 와인 농가들은 이제 자존심을 버리고 위기 타개책을 마련하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프랑스 와인 업계는 2월 파리 농업 박람회에서 ‘와인 회복정책(Cap Vins)’을 발표했다. 목표는 와인에 대한 신비감과 어려움을 없애고 즐겁고 유쾌한 순간 와인을 마시도록 장려하자는 것. 보통 고급 와인은 종류와 특징이 워낙 다양해 ‘공부를 하고 마셔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이제 이런 이미지를 뒤집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포장을 개선하고 무알코올 와인을 개발하는 등 혁신 방안이 거론됐다. 

    프랑스 남서부 루아르주의 앙주에선 이미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와이너리 외에 색다른 관광상품을 개발해 와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그 중심에 지하 와인 저장고가 있다. 이 지역은 여름철 와이너리 등 외부보다 지하 와인 저장고가 시원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관광객을 시원하게 맞기 위해 저장고 투어를 개발했다. 원래 1811년 옛 석회암 채석장에 세워진 저장고는 1985년 이후 거의 폐쇄된 상태였다. 그러다 2007년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시원한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에이커맨의 와인 관광 및 이벤트 매니저인 저스틴 하넬은 프랑스앵포에 “예술 작품이 와인 저장고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저장고가 예술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도 한다”며 “이런 시설은 다른 스파클링 와인 생산업체와 차별화가 된다”고 설명했다. 

    무알코올 와인은 젊은 세대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과거 와인업자들이 와인으로 취급하지 않던 ‘무알코올 와인’이 침체된 와인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저온 진공 증류법으로 무알코올 와인을 제조하거나 알코올 제거 과정에서 날아간 와인의 향을 포집해 무알코올 와인에 다시 주입하는 새로운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보르도의 생테밀리옹 지역 포도원인 ‘클로 드 부아드’는 매출의 3분의 1가량이 무알코올 와인에서 발생할 정도다. 보르도의 와인 전문가 프레데릭 브로셰는 BBC에 “예전에는 와인을 숙성시키는 배럴이나 코르크 마개, 포도 품종이 혁신이었듯이 이제는 무알코올이 혁신”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주간지 ‘르푸앙’에 따르면 무알코올 와인 시장규모는 2030년 100억 유로(약 16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인 보르도 지역에선 기존 와인을 변형해 젊은 취향의 맛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르몽드에 따르면 와인의 맛을 변형하는 대안적 아이디어가 확산되고 있다. 이 지역 와인 생산자들은 달콤한 와인 소테른과 진, 아르마냑 등을 섞고 레몬이나 오렌지 향을 첨가해 식전주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혁신은 큰 저항을 맞기도 한다. BBC에 따르면 기존 생산 방식을 정통이라며 고집하는 와인업자들은 클로 드 부아드 측에 ‘업계를 망치고 있다’는 취지의 항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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