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협상 통한 군축’으로 신뢰 쌓아야

  • 지만원 군사평론가

    입력2007-01-11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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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서 냉전 구조를 해체해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우리의 지상 명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위론일 뿐 현실을 구속하는 힘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입으로는 평화 체제 구축을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군축(軍縮)이나 주한미군 지위 변경 같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4월 초에 불거진 주한미군 지위 변경 보도 파문은 ‘냉전의 포로’로 갇혀 있는 보수 세력에게 주한미군의 지위가 여전히 성역(聖域)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군축 반대론자들은 북한이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점을 내세워 신뢰가 형성돼야만 군축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만원 박사(군사평론가)는 군축이 먼저 이루어져야 신뢰가 구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선(先) 신뢰 구축론은 88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일방적 군축 선언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났고, 한반도에서도 94년 10월 미·북한 간의 제네바 협정 사례를 통해 거짓으로 판명 났다는 것이다. 지박사는 “군축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분야가 ‘핵 군축’인데, 신뢰가 군축의 전제 조건이라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 언제 그만한 신뢰가 형성되었던가?”라고 반문한다.

    ‘신뢰 구축의 최면술’을 깨는 지박사의 비판론은 최근 학계의 실증적 군축 이론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철기 교수(동국대 국제관계학)에 따르면 한반도 군축의 장애요인은 ▲남북한의 ‘공세적 전략’에 기초한 군사전략·정책 ▲남북한 군부의 반발 ▲미국의 한반도 정책 및 전략 ▲남한의 군비경쟁 우위 확보 ▲남한 국민의 냉전의식과 보수수구세력의 존재 ▲북한의 대남 불신감과 군사적 위협감 등으로 요약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한 사회에서 군축 논의와 실천을 ‘원천봉쇄’하는 장애물은 이미 고정관념화한 도그마들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이는 북한 붕괴, 북한의 군사적 우위론, 대남 무력 적화통일론, 주한미군 도그마이다.

    그러나 ‘냉전의 섬’ 한반도에도 새천년을 앞두고 변화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특히 97년말 외환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6·25전쟁 이후 최악의 경제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었으며 IMF 체제라는 경제여건의 변화는 그동안 ‘성역’으로 간주해온 국방비를 감축하여 생산적인 경제분야로 돌릴 수 없겠는가에 대한 진지한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이 남북한의 평화공존체제가 확립돼 현 방위비의 24.5%와 군병력의 53%가 줄어들 경우 GNP에 미치는 효과를 시뮬레이션한 결과(‘한반도 군비감축의 경제적 효과’)에 따르면, 군비 감축은 매년 GNP를 1.27~1.56% 정도까지 증가시키는 것으로 분석됐다. GNP 1%의 증가는 4조원이 넘는 규모로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쟁을 잉태한 불안한 평화’로 상징되는 한반도에서 이제 군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새천년을 앞두고 지금 사이버공간에서는 한반도 군축 국제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에 따르면, 군축은 지난 반세기 동안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적대적 관계에서 길들여진 상호불신 및 여기서 잉태된 잠재적 폭력과 전쟁 가능성을 제거하고, 새로운 세기의 한반도에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평화군축은 99년 5월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서 채택된 핵심 의제이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제안으로 2000년 제55차 유엔총회와 더불어 열릴 ‘밀레니엄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1월4일 국가안보회의에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 문제를 거론하며 이것을 한반도 정치의 화두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군축 선언’은 한반도 냉전 구조를 평화 체제로 전환할 가장 바람직한 카드로 관측되고 있다. 협상보다는 국가 지도자들의 통치 철학과 결심에 의해 해결된 과거 미·소나 유럽의 재래식 군축 협상에서 보듯 정상회담을 통한 군축 실현은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해결 방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밀레니엄 정상회의’는 김대통령이 한반도 평화군축을 선언할 절호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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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축은 신뢰의 전제조건이다. 상대방의 군사력이 막강한데 어찌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군축은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신뢰는 그럴 수 없다. 신뢰는 오직 주권 분리와 군축이라는 객관적인 시스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협상을 통해 군축을 이룩하고 군축의 바탕 위에 신뢰를 쌓아야 남북한이 ‘사이 좋은 이웃국가’로 전진할 수 있다. 》

    99년 10월13일자 일본 주간지 ‘SAPIO’에는 북한의 화생방 연구소, 생산기지, 저장소, 유도탄 기지들이 새빨갛게 표시돼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은 휴전선 부근에 스커드 미사일과 대구경 야포를 놀랄 만한 속도로 증강시키고 있다. 한판 벌이겠다는 의도로 여겨진다.

    반면 미국도 신방위전략을 통해 북한과의 일전을 준비해 놓고 명분 쌓기에 들어간 것 같아 보인다. 최근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인들에게 화생방 방어 장구를 제공하고, 유사시 미군 증원계획을 유례없이 상세히 밝힌 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제까지의 전쟁은 북한의 남침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전쟁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다. 북한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자초하게 될 것인가. 필자는 그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서해 교전사태를 통해 김정일은 북한의 재래식 무기가 얼마나 볼품없는 것인가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핵무기 외에는 북한의 안보를 의지할 데가 없다고 재다짐했을 것이다. 미국의 협박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핵무기와 그 운반 수단인 미사일의 개발을 포기하면 미국에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사일과 핵은 북한의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어느 국가가 안보의 유일한 수단을 돈 받고 팔겠는가? 팔 수 없는 것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보면 엄청난 결과가 뒤따르게 된다.

    억제수단 없는 전쟁 시나리오

    필자가 보기엔 미국과 북한은 지금 ‘단선로에서 마주 달리는 두 개의 기차’와 같다. 98년 7월에 나온 럼스필드 보고서는 북한이 5년 이내에 미국을 위협할 탄도탄을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 달 후인 8월31일에 대포동 1호가 일본 상공을 날았다. 긴장한 미국 정부는 북한에 5년 이상의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됐다.

    앞으로 북한은 미국의 눈을 따돌리고 미사일을 개발하려 할 것이고, 미국은 결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어 말하면 북한이 미국에는 무서운 존재로 부각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북한에 그런 무기가 없다면 미국은 북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북한은 40년 세월 동안 미사일과 핵무기에 온갖 정열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바로 ‘고지’를 몇 발짝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영광의 그날을 맞이할 텐데 여기에서 멈출 북한이 아닐 것이다.

    신무기 체계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른데 비해 한국군의 전략 변화 속도는 지난 46년간 변화가 없었다. 한국군은 ‘단 한 치의 땅도 북한군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단선적 사고의 토대 위에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일렬로 주전투 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30여만명의 소총병을 투입하고 있다. 만일 제1방어선인 주전투선(FEBA)이 뚫리면 북한군을 서울 이북에서 격퇴하기 위해 휴전선 남쪽 15km 선에 제2의 방어선을, 그리고 서울 변두리 북방에 제3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군의 군사전략은 이 세 개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서울을 지킨 후 공격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 전략의 열쇠는 제1선에 배치된 30만 보병이다. 바로 여기에서 ‘보병이 왕’이라는 개념이 한국군의 군사 사상을 지배해왔다.

    육군의 포병, 기갑, 공병, 항공 등은 보병을 돕는 보조역이고, 해군과 공군도 보병 작전을 지원하는 보조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는 6·25전쟁 당시에 형성된 이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유지돼왔으며, 현재까지의 전력증강은 이러한 구태의연한 전략적 사고에 따라 몸집만 기형적으로 확대해온 것이다.

    남북한 군사력의 가장 큰 특징은 비대칭성이다. 북한은 수박과 참외를 가진 반면 남한은 참외만 가지고 있다. 북한은 전략무기와 전술무기 모두 가지고 있는데 남한은 오직 전술무기만 보유하고 있다.

    남한이 갖고 있지 못한 전략무기들은 ‘서울 불바다’ 무기,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장거리 유도탄이다. 서울 불바다 무기는 아름드리 굵기의 야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프로그 미사일, 170mm 야포, 한 번 쏘았다 하면 36발이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240mm 구경의 공포의 다연장 로켓들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대구경 포들은 수도권 전역에 분당 1만발 정도의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다.

    재래식 무기는 한국이 우세

    우리 한국군에는 이를 억제할 방법이 아직 없다. 주한 미군에 배치된 최신 패트리어트 미사일도 이를 억제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못 된다. 북한은 사정거리 300km의 스커드B, 500km의 스커드C를 600기나 남한 공격을 위해 배치해놓고 있다고 전해지지만 ‘국방백서’는 이러한 정보를 싣지 않고 있다.

    이들 유도탄의 중량은 500kg으로 한 발을 가지고도 ‘삼풍 참사’를 재현해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유도탄이라면 한국의 어느 도시든 순식간에 초토화할 수 있으며 어느 원자력발전소를 겨냥해 수백대를 집중 사격하면 한국이 체르노빌로 변할 수 있다.

    북한은 남한 인구를 3회 이상 살상할 수 있는 엄청난 화학탄과 생물학 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투발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지만 ‘국방백서’는 수량에 대한 정보를 싣지 않고 있다. 화학무기, 생물학 무기, 유도탄 공격에 대해서도 우리에겐 별다른 대책이 없다. 한국군이 부지런히 사재기하고 있는 신형무기들은 모두 정밀무기이지 대량 살상무기는 아니다.

    서해 사태에서 볼 수 있었듯이 남한 함정 한 척과 북한 함정 한 척의 1 대 1식 전투에서는 북한의 장비가 남한 것을 따를 수 없다. 북한 최고의 전투기인 MIG-29기는 이번 코소보 사태에서 증명됐던 것처럼 F-16기의 ‘밥’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인민군의 재래식 군사력, 즉 대량 살상무기를 제외한 군사력은 남한 군사력에 비해 매우 열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서해 사태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오직 남한 함정 한 척이 북한 함정 한 척보다 철판이 강하고 사격 능력이 더 뛰어난 선진 무기라는 사실밖에 없다.

    전쟁이란 무기 대 무기 간의 1 대 1식 싸움이 아니라 시스템과 시스템 간의 싸움이다.

    이런 시스템 간의 싸움을 보여준 사례는 96년 9월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 해군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군의 대처 능력이 어떤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북한 해군 잠수함이 침투했던 지역은 남한의 핵심 군사시설이 밀집돼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의 직경 15km 이내에는 8개의 값비싼 군사시설이 있다. 2개의 유도탄 부대, 한국군 최전방 비행전투 기지, 2개의 공군 최대의 레이더 기지, 동해를 지키는 1함대 사령부, 8군단 사령부가 오밀조밀하게 밀집돼 있는 곳이다.

    그곳이 점령되면 태백산맥 전체가 간단히 넘어가게 되고 태백산맥이 조기에 함락되면 북한군 기계화부대가 해안선 7번 국도를 타고 부산까지 진격해도 대응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렇듯 중요한 군사 요충지를 북한은 수없이 ‘제집 드나들 듯’했다. 지난번에 들킨 것은 북한이 ‘재수 없게’ 기관 고장이라는 자살골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해군 사령부 기지 물밑을 북한 잠수함이 마음놓고 휘젓고 다닌 것이다.

    전에는 8일 전쟁 시나리오 시대였지만, 지금은 3일 전쟁 시나리오 시대다. 3일 전쟁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전쟁은 일시적 오기나 끓어오르는 사명감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들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시스템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

    인민군의 전략은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 대도시에서의 공포 조성, 한국군 전방 병력의 조기 포위, 전 국토의 동시 전장화 등의 작전으로 전쟁을 3일에서 1주일 이내에 끝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6·25전쟁식 선방어로 대처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에 맞서 보겠다는 무모한 행위다. 6·25 때에 초전 양상은 어떠했는가. 간단한 무기와 장비마저 챙길 틈 없이 맨몸으로 한강을 헤엄치지 않았던가.

    전쟁이 나는 순간 김포와 의정부에는 마치 홍수가 터진 것처럼 인민군이 진격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 병사들이 미처 진지를 점령할 틈도 없이 제1방어선을 유린할 수 있다. 김포와 의정부로 밀어닥치는 두 줄기의 홍수 중 50%는 제1방어선에 있는 우리 병사들을 빠른 속도로 포위할 수 있다. 그중 20%는 서울 북방에 있는 우리 병사들을 포위할 수 있다. 나머지 30%는 한강 이남을 포위할 수 있다. 이것이 6·25 때에 보여준 중공군의 전술이었다.

    우리 병사는 250km에 걸쳐 일렬로 늘어서 있지만 인민군은 몇 군데를 선택해서 집중 공격하기 때문에 공격받은 우리 병사는 대책 없이 무너져내리는 반면, 공격을 받지 않은 대부분의 전선에 고착돼 있는 병사들은 전방만 응시하고 있다가 포위되고 만다.

    남북한간에 긴장을 없애려면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남북한이 평화롭게 같이 살려면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한반도에 두 개의 독립국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평화공존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평화공존을 지지한다. 이들은 평화공존을 ‘통일을 이루기 위한 통과단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평화공존이 통일을 이루기 위한 의 ‘수단’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공존은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논리적 함정이 있다. 평화공존이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라고 정의하는 한 평화공존은 이룩될 수 없다. 한시적인 평화공존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통일로 이어질 테니 양측은 평화공존 기간에 부지런히 자기 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은밀한 경쟁을 추구할 것이다. 평화공존 기간은 바로 은밀한 경쟁을 추구하는 기간이며 따라서 긴장 기간인 것이다. 그러나 평화공존은 그 자체가 목표가 돼야지 통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평화공존은 곧 통일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평화공존에 대해서는 분석되지 못한 시각을, 통일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통일에 대한 정의부터 바꿔야 한다. 한국인들이 바라는 정치적 통일은 긴장을 수반하고 전쟁까지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노선이다. 이러한 통일은 이뤄질 수도 없지만 유익한 것도 아니다.

    한국이 독일식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는 엄청난 긴장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럽식 통일은 긴장도 비용도 수반되지 않는다. 남북한이 유럽대륙의 이웃 국가들처럼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사이좋은 이웃국가’로 공존하면 남북한도 유럽식으로 통일될 수 있다.

    남북한 신뢰의 군사력은 10만

    남북한 주민이 간첩 혐의를 받지 않고도 국경선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 바라는 모든 것이다. 정치적 통일과 다른 점은 오직 평양에 중앙정부가 하나 더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를 통일 대치품(unification equiva lent)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독일식 통일은 불가능하더라도 ‘사이좋은 이웃국가’로 같이 사는 것은 지금이라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평화공존 체제하에서의 군사력과 대결 체제하에서의 군사력은 판이하다. 평화공존은 두 가지 시스템상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현재의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UN 감시하의 상호감군이다. 이는 엄청난 변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를 불신해온 남북한 당국이 이 엄청난 변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UN과 주변국의 중재와 보장이 필요한 것이다.

    평화적으로 공존하려는 남북한에 필요한 군사력은 얼마나 되는가. 각기 10만 정도다. 10만으로는 무슨 장비로 무장한다 해도 상대방을 기습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통일 이후의 군사력이 주변국에 어울릴 만큼 막강해야 하기 때문에 감군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통일 이전의 군사력과 통일 이후의 군사력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군사력과 통일 이후의 군사력은 달라져야 한다.

    통일 이전의 군사력은 통일을 앞당기는 군사력이고, 통일 이후의 군사력은 주변국에 어울리는 군사력이어야 한다. 통일 이전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면 남북한은 각기 상대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지 않을까 긴장하게 된다. 남북한간에 긴장이 흐르는데 어떻게 통일이 오겠는가.

    따라서 통일 이전의 군사력은 상대방을 안심시킬 만큼 작아야 한다. 30만 대군은 상대방을 기습할 수 있는 군사력이다. 20만은 반신반의의 군사력이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상대방을 안심시켜 줄 수 있는 군사력은 10만 정도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남북한이 각기 10만의 군사력만 가지면 남북한 공히 주변 군사대국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지금의 국제 질서하에서는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군사력이 약한 나라를 함부로 빼앗거나 복종시킬 수 없다. 설사 남북한이 모두 무장을 해제했다 해도 한국의 안보는 유지될 수 있다. 어느 주변국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을 다른 주변국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축이 신뢰의 전제조건

    통일 이전의 군사력 문제는 1km 앞의 토끼요, 통일 이후의 군사력 문제는 10km 앞의 토끼다. 누구도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지 못한다. 통일 이후에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면 그때 군사력을 키워도 늦지 않다. 군사력을 줄이기는 어려워도 키우는 것은 매우 쉽다. 통일 이후를 위해, 통일 이전에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면 남북한간에는 불신과 긴장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각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치는 통일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은 신뢰구축이 군축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군축이 신뢰의 전제조건이다. 상대방의 군사력이 막강한데 어찌 그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군축은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신뢰는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없다. 신뢰는 오직 주권 분리와 군축이라는 객관적인 시스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협상을 통해 군축을 이룩하고 군축의 바탕 위에 신뢰를 쌓아야 남북한이 ‘사이 좋은 이웃국가’로 전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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