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저 멀리 제3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야 마땅했다. 그러나 미국은 실제로 한국 정치의 제3자가 아닌 당사자였다. 여당과 야당 사이, 민주와 독재 사이, 언론인과 정객 사이, 남한과 북한 사이,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는 늘 미국이 있었고, 심지어 이후락과 정일권, 박정희와 김종필 사이에도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양극단 사이에서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속삭였고, 때로는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미국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모든 것을 기록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보관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는 한국 정치의 이면사가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한국 현대사 자료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워싱턴 소재 비영리재단 인터내셔널 센터의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팀은 최근 워싱턴 시내 펜실베이니아 애버뉴와 인근 메릴랜드 주에 있는 제1, 제2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한국 관련 비밀 자료들을 수집, 주제별 분류와 한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 작업은 미국의 정보공개법(FOIA, 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올해 초부터 비밀 해제되기 시작한 1973년 이전의 국무부 자료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가장 최근 비밀 해제된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방대한 비밀 문건(A4 용지 총 1만2000장 가량) 가운데에서 한국의 국내 정치에 관련된 자료를 ‘신동아’가 KISON 프로젝트 팀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
[ 미 국무부의 김대중 비밀 파일 ]
(1970년 12월27일)
1970년 12월27일 윌리엄 포터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은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이른바 ‘개인 파일’이다. ‘김대중 이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전문의 내용은 김 의원의 개인 이력에서부터 정치 경력, 미국에 대한 태도와 주한 미 대사관의 김대중 의원에 대한 평가 등을 담고 있으며, 4개월 남짓 후에 치러질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점이 김대중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것인지를 분석해놓고 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미국관과 주한 미 대사관이 김 후보를 평가한 항목에는 ‘제한 인원만 열람 가능’이라는 비밀 분류 급수가 매겨져 있는데, 이 전문을 작성한 포터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근무한 4명의 요원이 시기별로 김 후보를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에 대한 대사관 평가’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파일에는 4명의 각기 다른 대사관 관리들이 별도의 시기에 작성한 김대중 씨의 성품에 대한 자료가 있다. 첫 번째 것은 1960년도에 작성된 것인데, 그를 ‘유쾌하고 지적이며 솔직하다’고 기술해 놓았다. 두 번째는 1965년에 작성된 것으로 ‘솔직하며 독단적’이라고 평했는데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긴 하지만 대사관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한 대화 비망록에는 ‘긴밀한 접촉이 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 초반에 작성된 평가서에는 그가 ‘진지하고 온건하며 사려 깊은 정치인으로서, 대사관과는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씌어 있다. 가장 최근의 평가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지 일주일 후에 작성된 것인데,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드러내 보이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온건하긴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 전문의 요약문에는 주한 미 대사관이 보관하던 ‘대사관 파일’과 당시 조사 자료를 기초로 김대중 파일이 작성됐다고 밝히고 있는데, 4가지로 분류된 ‘대통령 선거에서의 취약점’이라는 항목에서는 박 정권 때 활동한 김대중 후보의 ‘수입원과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지적해 놓았다.
[ 김대중 후보가 미국에 밝힌 초기 이력 ]
김대중 의원이 신민당의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1970년 9월이었다. 같은 해 12월17일 포터 주한 대사가 국무부에 전송한 ‘김대중 이력’ 보고서에는 다음 해(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분석해놓은 부분이 들어 있다.
‘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됐음. 그러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0년대 후반, 전에 한때 친(親)공산주의자들이었던 멤버들이 조직한 보도연맹를 위해 반 공산주의 연설을 행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대중은 초기 한때 좌파에 경도됐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反)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지적해줌.
10일 전 김대중은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자신의 초기 활동에 대해 말해준 바 있음. 이에 따르면, 해방 후 그는 약 6개월간 좌익 신민당에 관계했으나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에 반대해 당을 떠났음. 김은 또 자신이 1946년 10월 목포 파출소 습격사건에 참가했던 것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는 장남을 출산하는 부인 옆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음.
김은 또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1950년 목포가 공산주의 점령 하에 있을 때 공산당에 의해 감금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음. 그는 공산당 패주로 구출됐음. 미 육군 정보참모부가 한국 정보계통 관리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보계통 인사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상황을 종합해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수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김대중의 출생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시 그는 24세였으나 한국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대중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기피로 불릴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대중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에는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공민 해안경비대는 지역 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인 자원 단체임.
[ 71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 국무부의 판단 ]
”박정희가 이긴다”
70년대 초 한국의 국내 상황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69년 3선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권 대파란의 후유증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10월17일까지 전국 40여 개의 대학이 한 달 넘게 문을 닫고 있었다.
70년대가 열리자마자 정인숙 사건이 터져나온다. 3월 초였다. 정 여인 사건은 정치권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해 11월에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났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좀체 가라앉을 줄 모르고, 정치권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나 야당인 신민당 할 것 없이 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를 향해 줄달음친다. 이러한 혼란과 혼탁의 와중에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국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워싱턴의 국무부와 서울의 미 대사관은 한국 대선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정보력을 다 가동했다. 이미 국무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년여 전부터 한국 정치권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선거 판세 분석을 위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70년도의 국무부 비밀 전문 가운데 최소한 20% 가량이 71년 한국 대통령 선거의 추이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내용이었다.
71년 4월15일 국무부의 유서 깊은 정보 분석 연구팀인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 내놓은 ‘한국: 역대 선거 분석’이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 역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반영하는 문건 가운데 하나다. 이 보고서는 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평가서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박 대통령의 지도 아래 비교적 공정한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만약 매력적인 야당 후보의 활기 찬 선거운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과잉 행동을 보일 경우 분위기는 뒤바뀔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48년 이후 한국의 선거는 부정 부패와 폭력으로 얼룩졌다’며 역대 한국 선거사를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시대, 정치 공백 시대, 박정희 시대의 개막, 1967년 대통령 선거, 1967년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A4 용지 석 장 분량에 각 시대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이 비밀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1971년에 대한 관점’이라는 항목에서 조심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다.
‘김대중 후보의 약진세가 계속될 경우 비교적 공정하고 평화로운 선거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과 그의 측근 추종자들이 패배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과잉 행동을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과 행정부 내의 하급자들이 행정부의 권력과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엉망이 되다시피한 1967년 국회의원 선거의 재판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불행이 겹치는 꼴이 된다. 즉 강력한 힘의 전략은 국내의 안정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박에게 있다. 김대중이 운동가로서 재능이 있긴 하지만, 박이 공정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일을 불과 닷새 앞둔 71년 4월22일. 미 국무부의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 장관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마샬 그린(Marshall Green) 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도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4월22일자로 비밀 분류된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망록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일일 보고를 보내오고 있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60만 명의 청중을 동원하며 정력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 하루 전인 4월26일. 긴장 속에 서울에서 선거전을 지켜본 포터 미 대사는 ‘선거 최종 요약’이라는 제목의 비밀 전문을 워싱턴으로 띄운다. 여야 후보의 마지막날 유세 상황을 주로 담고 있는 이 전문은 ‘선거를 취재한 일본 기자들은 주한 일본 대사관 요원들에게 이번 대선 경쟁은 너무 아슬아슬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번 선거가 내가 후보가 되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박정희 후보의 마지막 유세와 “이번 선거야말로 한국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150만 표 차이로 승리를 장담하는 김대중 후보의 막판 공세 등 최종 유세 상황을 균등하게 다루고 있는 이 전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선거일의 일기 예보는 전국적으로 맑고 따뜻할 것이라 함.’
박정희 후보의 승리였다. 득표 차이는 90만 표였다. 미국이 ‘타고난 캠페이너’라고 평한 김대중 후보의 탁월한 연설 솜씨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후보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박 정권이야말로 꺾기 힘든 상대라는 것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워싱턴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이런 비관론을 펼치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워싱턴에서 국무부 고위 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 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냐?”고 물었던 사람이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국무부의 비밀 문건들은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에 이미 박정희 후보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통령 당선 확정 발표가 있기도 전인 4월28일, 국무부가 백악관 헨리 키신저 보좌관 앞으로 보낸 문서에도 미국의 이런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 박정희 한국 대통령에게 보낼 축하 전문.
박에 대한 신임을 확인한 투표였다는 말 외에는 선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 야당에서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지만,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와 언론 보도에 의하면 차분하고 질서 있는 가운데 치러진, 그런대로 공정한(reasonably fair) 선거였음.’
선거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은 ‘한국: 선거 이후 권력 구조의 새로운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는다. 정치적 유동성이 증대한 상황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정치력 복원, 김대중의 부상 등 3인의 향후 정치적 위상에 초점을 맞춘 이 비밀 보고서는 한국 정치의 미래는 역시 ‘불투명’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다음은 이 비밀 보고서의 내용 중 위 양김씨에 관련된 부분이다.
‘당의 보스이자 정보부장이었고 최근에 총리로 복귀해 장기간에 걸쳐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김종필은 한국의 가장 강인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가장 숙련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한때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지만 1968년 3선 개헌을 둘러싼 갈등의 와중에 권력을 잃었다.
4월의 대통령 선거 직전 그에게 선거 운동의 핵심 역할이 주어졌고, 김은 이 기회를 유효 적절하게 이용해 선거운동 연설가로 대중적 이미지를 굳혔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세 번째 임기가 마지막이며 후계자를 양성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김종필을 박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무총리로서 김의 위상은 취약하다. 정부의 실수에 대한 비난과 불신을 한몸에 받게 되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며, 박 대통령은 다른 국무총리들을 그렇게 해왔듯이 그를 희생양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내에서 김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허락할 것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김은 또 신민당 의원이 의석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상대해야 한다.
선거 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야당 의원 김대중은 대중 앞에 나타나 활기 차고 강도 높은 선거 일정을 잘 소화해냄으로써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달리 김대중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슈를 가지고 선거를 치렀는데, 현상 유지를 반대하고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면서 정부 정책과는 다른 제안을 내세웠다. 이 제안들은 선거판을 휘어잡았고 신민당에 대한 평판은 부쩍 좋아졌다.
김대중은 이제 대통령과 김종필을 제외하고는 어떤 현역 한국 정치인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 뛰어난 대중 연설 기술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할 당내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했는데, 전통적으로 분열 양상을 빚어온 신민당을 1970년 11월 치열한 전당대회에서 하나로 묶어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냈다.’
(71년 1월15일)
1971년 1월15일자 미 국무부의 비밀 대화 비망록은 3개월 후에 치러질 한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국무부 고위 관리들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국과 미 의회의 관계, 정일권의 방문 일정 가운데 하나인 미국 농업용 관개수로 시찰 및 세미나 참석 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명석하고 활력있는 사람으로 평가함. 그러나 김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함. 1950년 한국전 당시에 김대중은 20세였으나 군 복무를 하지 않았음. 한국의 안전은 군에 의지하고 있음. ‘김이 어떻게 그들(군부)을 컨트롤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더욱이 김대중은 학자 같아서 이론과 원칙에만 치중하고 실제에는 취약함. ‘임금은 올리고 세금은 낮추면서 예산을 짜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가?’ 한국은 ‘실무에 밝은 사람’, 즉 박대통령 같은 사람이 필요함. 정일권이 생각하기에 박대통령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
박대통령이 한 번만 더 임기를 채우면 한국은 북한보다 우위에 설 것이며 통일에도 대비할 수 있을 것임. 박대통령의 통일관이 김대중보다 훨씬 나음. 박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도발 행위를 중단하라, 그러면 교류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김대중은 반대로 ‘지금 북한과 서신왕래, 인적 교류 등 모든 것을 열겠다’는 것이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이렇게 평한 다음,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의견을 물어본다. 미국의 대답은 이렇다. “베스트 맨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 김종필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
1969년의 3선개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종필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70년 12월의 일이다. 국무부는 즉각 김종필의 최근 활동 및 정치적 입지, 방미 목적 등을 작성해 키신저에게 보고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좌에 오르게 만든 쿠데타의 설계사 김종필 씨가 현재 개인 업무로 미국을 방문중인 바, 한국 대사관을 통해 키신저 보좌관과의 면담 약속을 신청했음. 김종필 씨는 1963년 언젠가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서 키신저 보좌관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음.
현재는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김은 여전히 한국 정치에서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는 인물임. 그의 비상한 재주(야망이 있고, 아주 지적이며 조리 있음)를 감안할 때, 44세의 나이에 정치 생활에서 영원히 물러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 ]
(70년 2월 20일)
1970년대 초 주한 미 대사관 관리들이 가장 빈번하게 접촉했던 한국 인사 중에는 이후락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교의 신봉자’라 불릴 만큼 권력의 핵심에 속했던 인물인 데다가, 그를 접촉해본 미국측 인사들의 공통된 표현대로 ‘미국인과 아주 잘 어울리고 판세를 잘 읽어내는,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락은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1969년 3선 개헌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나흘 후인 69년 10월21일, 이후락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다. 63년 12월부터 69년 10월까지 6년간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일한 끝이었다. 3선 개헌의 1등 공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김형욱과 함께 박 대통령이 물리친 것이다. 이후락은 아무 말 없이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여기저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 김형욱과는 달랐다. 그리고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채 석 달도 안 된 70년 1월, 이후락은 주일 대사로 임명된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후락 신임 주일 대사의 신상기록과 함께 당시의 활동 상황 등을 미 국무부에 타전한다. 이씨가 주일 대사로 임명된 지 한 달 후인 70년 2월20일이다. 이 비밀 전문은 이후락의 과거 정치적 입지 및 향후 거취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인물평도 덧붙여 놓고 있다.
‘최근 다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이후락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한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되었음. 그 과정에 그는 대통령 측근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치부를 했다는 이유로 많은 적을 만들어냈음.
3선 개헌에 앞장서 박 대통령을 도왔으나 박 대통령은 마침내 이후락을 물리치고 말았음. 그러나 이후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고 있음.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그는 재치 있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 자신이 맡은 업무는 무엇이든 잘 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며,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개인의 이득도 아주 잘 챙기는 것으로 평이 나 있음. 미국인 동료들과 꾸준히 협조하면서 잘 지내고 있음.
대부분의 한국인 정치 관찰자들은 이후락이 곧 주일 대사 자리를 떠나 내년(1971년) 봄에 있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요 직책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음.’
이후락은 이 비밀 전문이 예견한 대로 10개월 후인 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비서실장에서 해임된 지 1년 2개월 만에 권력의 중추로 복귀한 것이다. 그 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유신과 7·4 남북 공동성명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적인 두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이후락의 권력 내부 복귀를 예측했던 70년 2월10일자 주한 미 대사관의 비밀 전문 끝부분에는 이후락의 개인 사정에 대해서도 언급돼 있다.
‘최근 이후락의 부인이 자녀의 가정교사와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후락이 알게 된 다음 남편인 이후락에게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서울에 나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부인도 그와 함께 도쿄로 갔음. 도쿄로 떠나기 직전, 이후락은 자청해서 소문을 부인했음.
이후락은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 미국인과 쉽게 잘 어울리기는 하나 술을 몇 잔 마시고 나면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함. 난 기르기가 취미이며 골프도 즐김. 불교도.’
(70년 12월28일)
1970년 12월 주일 대사에서 신임 중앙정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이후락은 4개월 후에 있을 71년 4월의 7대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대과제를 맡아 또 한번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이 70년 12월28일 작성한 비밀 보고서 ‘정보 노트(Intelligence Note)’에는 신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 대한 평과 함께 그의 정치적 역할을 분석한 보고가 담겨 있다.
‘업무 능력은 뛰어나지만 각종 스캔들로 얼룩진 비도덕적 인물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이 주일 대사로 11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다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이어받아 한국으로 돌아왔음. 김계원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의 대선 상대인 야당 후보 지명에 대한 정지 작업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될 것인지조차 예견하지 못했음.
이후락의 업무 수행 능력은 따라갈 자가 없으며 대통령에게 맞서 고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음. 부패에 연루되어 한때 일본에 보내지긴 했으나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여전히 두텁고, 전투를 방불케 할 내년 봄 선거에 대비해 이미 갑옷을 입고 무장을 끝낸 박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이후락을 지목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평가됨.’
‘박정희, 선거전에 대비해 무장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보고서 서두에는, ‘박 대통령이 71년 봄에 치열하게 전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의 책임자로 임명해 측근 진영(inner circle)에 불러들였으며, 김종필도 박 대통령 팀에 합류시켜 정치 일선에서 활동시키려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어 이 보고서는 ‘이와 동시에 박 대통령은 금년 초 섹스-살인 스캔들(정인숙 사건: 역주)에 이름이 연루된 정일권 국무총리를 교체하고 청와대 참모진을 새로 임명해 행정부의 이미지 쇄신을 꾀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70년 12월26일,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전송한 비밀 전문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63년부터 70년 12월까지 국무총리 역임: 역주)가 미 대사관 요원을 만나 민주공화당의 임박한 당직 개편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정일권은 자신이 김종필과 함께 당 부총재로 임명될 것 같다고 전하면서, 김종필은 당 의장 자리를 원했는데 부총재가 될 것 같아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정일권이 대사관 요원에게 전한 정보 가운데 특기할 만한 부분은 당시 주일 대사로 도쿄에 나가 있던 이후락의 복귀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 당정 개편의 ‘큰 이변’은 이후락 임명인데, ‘대중 이미지’가 큰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찌감치 이 문제가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후락을 도쿄에 그대로 두고 싶어했으며,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마도 이후락이 자신의 거취 문제를 항의하기 위해 12월9일부터 12일까지 서울을 방문했을 때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나쁘긴 하지만 중앙정보부장으로서의 그의 재능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 잠재적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서 ]
(PLBRP)
미 국무부의 정보력은 미 국방정보국(DIA) 및 중앙정보국(CIA)과 더불어 타 정보기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해외 공관을 통해 해당국 유력 인사들의 인사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비밀리에 관리하는 ‘잠재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 프로그램(PLBRP, 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도 국무부가 가동하는 비밀 정보의 파이프라인 가운데 하나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를 포함해 국제 정세의 격변기였던 1970년대 초, 미 국무부는 한국 각계의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PLBRP 리스트를 비밀리에 작성하고 관리했다. 1973년도 국무부의 PLBRP 리스트에는 정계 언론계 학계 및 행정부와 군부 인사 등 84명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군부에서는 육군 공수단의 전두환 준장과 김복동 준장의 이름이 올라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비밀 전문에 따르면, 미 국무부의 이 리스트는 1년 4회 주기로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일종의 개정판인 셈인데, 가장 최근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주한 미 대사관이 차기 작업에 들어가기 전 리스트를 먼저 국무부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되,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관에 특정 조사 대상자의 리스트를 하달하기도 한다.
1971년의 경우,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관에 하달한 비밀 전문을 보면, 대사관에서 119명의 리스트 가운데 22명에 대한 정보와 10명의 사진을 국무부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71년 1월26일 국무부가 초안을 작성해 2월10일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가운데 당시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내용의 일부분이다.
‘알랜 크로스(주한 미 대사관)는 김대중에 대한 아주 훌륭한 신상 보고서(1970년 12월17일 A-506)를 제출했다. 그의 성품, 경력, 개인 이력과 정치관 등 자세한 사항이 담겨 있다. 크로스와 윌리엄 킹스베리, 리처드 피터스 등은 대화 비망록을 통해 김씨에 대한 통찰력 있는 관찰기를 추가로 보고했다.’
대사관이 수행한 PLBRP 작업에 대한 국무부의 평가서이기도 한 이 2월10일자 비밀 전문에는 또한 대사관이 가동시키는 ‘국별 팀(Country Team)’ 멤버들이 이후락 신임 중앙정보부장, 백두진 신임 국무총리 등 행정부나 입법부에서 새로 인사 발령을 받은 인사들에 대해 별도의 개인 정보를 보고한 것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있다.
이 PLBRP 리스트 작성은 작업 효율성을 위해 FS-405라 불리는 국무부의 ‘신상기록 양식’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 별도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상 정보는 따로 초안을 첨부하게끔 되어 있다. 71년도 3차 리스트의 경우 유진산 장덕진 백선엽 이낙선 씨 등의 개인 신상 정보가 별첨으로 처리됐다. 신상 정보를 작성할 때는 우선 순위에 원칙이 있다. 즉 특정인의 최근 활동 및 태도, 조직 내에서 잘 어울리는 사람의 명단 등을 최우선으로 보고하게 되어 있으며, 국무부가 발행한 ‘신상 기록 지침(Biographic Handbook)’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취득한 특정인에 대한 개인 정보도 포함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PLBRP와 관련된 또 하나의 1972년도 평가서(1972년 11월6일 A-10909)에는 ‘한국 내 잠재 지도자들의 새로운 목표 명단(a new target list)이 아직 서울에서 제출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매 주기 혹은 매년 새로운 지도자급 인물을 탐지해 보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리스트 작성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대사관의 풍부하고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마련된 일종의 ‘비공식적인 경험 원칙’이다. 내각에 들어갔거나 이와 유사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은 ‘잠재적 지도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미 정치적 주요 인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연령은 잠재적인 지도자 기준에서 무시된다. 중년이거나 그 이상이라도 여전히 ‘잠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무부가 마련해 대사관에 하달한 기준에 따르면,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같이 당 최고위직에 있는 정치인의 경우에는 이 리스트에서 제외시키도록 되어 있다. 특히 야당의 경우,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당 내에서 상당한 파워를 행사하는 인물은 리스트에 포함시킨다. 군부 인사의 경우, 소장급 이상은 역시 리스트에서 제외한다. 이미 정치적인 영향력이 상당한 인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 군에서 전역을 했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다시 복귀할 것으로 보이는 인사는 리스트에 포함시킨다.
1973년 3월30일자로 국무부가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잠재적 지도자 리스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정치인: 민병기, 장기영, 한병기, 김영도, 김용태, 길전식, 박준규, 이해원, 이병희, 이범준(여, 전 이화여대 정치학과 교수), 소영희(여, 전 경희대 신방과 부교수), 고흥문, 이철승, 김영삼, 엄영달, 조윤형, 김대중, 이중재, 김수한
정부 관리: 노신영, 장상문, 지성구(외무부 아시아국장), 박경원, 조동원, 함병춘, 김정렴, 최광수, 박종규, 홍성철, 김성진, 정소영(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 김만재(KDI 회장), 이재술(경제기획원 부원장), 박필수, 김원기(한국개발은행장), 김용환, 김동수, 김형기, 황병태, 이선기, 한성준(한국과학기술원장), 이건개, 강인덕, 이규현(문공부 차관)
언론계: 박태영(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 심범식(서울신문 사장), 서인석(코리아헤럴드 사장), 박권상(동아일보 편집국장), 남재희(서울신문 편집국장), 신상초(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상만(동아일보 사장), 진철수(동아일보 편집 부국장)
학계: 한배호(고려대 아시아연구센터 정치학과 교수), 한기천(대통령 경제 자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권두영(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김영원(서강대 학장), 이영희(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옥길(이화여대 총장), 이한빈
군부: 서종철 대장(대통령 안보 담당 자문), 채석천 소장(합참 작전계획과장), 강창성(육군 보안대장), 진종채 소장(수방사령관), 최성택 준장(한국대학 ROTC단장), 전두환 준장(육군 공수단), 김복동 준장, 조종성 소장(육군 특전대장)
기타: 이동원(전 외무부 장관), 이범석, 한기수, 이명환, 김말룡, 이종영(대림건설 회장) 박성일(두산개발 회장), 조정식(한일개발 부회장), 정조수(대하실업 회장), 강원용(크리스천 아카데미 목사), 남궁윤(한국조선 회장), 이건희(중앙일보 사장), 정인영(현대건설), 김수한(추기경)
[ 김영삼의 박정희 평가, 미국의 김영삼 평가 ]
(1972년 10월24일)
1972년 10월24일자 비밀 전문은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국무부 마셜 그린(Marshall Green) 차관보와 나눈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이자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한 달 전에 이루어진 만남인 데다가 야당 지도자와 미 고위 정책 입안자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시기적으로나 사안으로나 중요한 때였다.
김영삼 씨도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 만남을 요청했든 주한 미 대사관이나 국무부의 고위 관리들과 자주 접촉하는 주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영삼 의원이 국내 정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부분이나 상대방과 나눈 대화 과정 등 국무부의 비밀 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깊이 있는 정치 분석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용어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거나, 자기 주장을 강변하는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정치권 내의 일반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면서 자신의 심중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것도 특징이며, 간혹 부정확한 예측을 불쑥 거론하기도 한다.
12월30일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김영삼 씨를 만난 후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는 자신의 사적인 견해(comment)를 덧붙인 내용이 있는데, ‘탁월한 야당 지도자라는 김영삼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가 말한 것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다음은 1972년 10월24일자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인데, 김영삼 씨가 7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무부 관리들을 만나 나눈 대화다. 남북한 지도자인 박정희와 김일성을 김영삼 씨 자신의 어휘로 비교한 부분, 헌법 개정안의 핵심적인 성격에 대해 미 국무부 관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장면들이 이채롭다.
‘10월20일 신민당 지도자인 김영삼이 그린 차관보를 방문해 한국의 발전에 대해 토의했다. 그와 그의 가족이 박 정권과의 관계 때문에 묘한 상황에 처해 있는 탓으로 말을 삼가서 하겠으며, 이전과는 달리 이 만남을 전후해 언론과는 접촉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는 무한정한 권력 유지에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 국민 대다수는 지금 계엄령이 남북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박의 강변에 어리벙벙해 있다. 그러나 10월27일 헌법 개헌안이 공고되고 나면 국민들은 뭔가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군부에서도 분노가 확산되고 있다.
김은 또한 남북간의 핵심적인 차이점에 대해서도 느낀 점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권위 독재주의를 구축하면 박과 김일성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마저 부족한 반면 김일성은 최소한 부를 나누어주려고 시도했다. 만약 남북한을 구별짓는 점이 흐릿한 채 오래 지속된다면 북한을 좋게 바라보는 남한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정치 구조가 다른 나라의 정치 구조를 본뜬 것인지를 그린 차관보가 물었다. 김은 프랑스 시스템의 요소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린 차관보는 김영삼에게 프랑스에서는 입법부와 대통령이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고 말해주었다. 한국과장인 레너드(Ranard)는 발의된 헌법 개정안의 특징은 이전에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법적 개정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린 차관보는 헌법 조항을 살펴보니까, 정부가 인권을 제한하기로 판단했을 때를 예외로 하고 인권을 보장한 1889년의 일본 이토 헌법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김영삼이 차관보가 헌법 개정안 전문을 검토해볼 시간이 있다면 검토하고 나서 그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거나 충고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린 차관보는 헌법 개정안을 찬찬히 살펴보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그에 대해 충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발의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계엄령하에서 실시돼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하도록 권고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박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늦어도 2월 전에 실시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점과 관련해 김은 한국 정부의 변화에 대한 미 의회 반응을 주시하면서 의회의 주요 인사들에게 이 점을 설명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의회 주요 인사들이 지금은 모두 선거 때문에 워싱턴에 있지 않으므로 김은 지역구로 몇몇 인사를 찾아갈 계획이다.’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1971년 12월30일자 비밀 전문의 제목은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견해’다. 12월29일 신민당 간부회의가 끝난 직후 하비브 미 대사와 김영삼 씨가 만나 나눈 대화록이다. 국내 정치 상황 전반에 대한 김영삼 의원의 견해가 A4 용지 2쪽 분량으로 기록돼 있는데, 비밀 전문 마지막 부분에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내분과 박정희 대통령의 과도한 음주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김영삼은 또 말하기를 민주공화당에는 세력이 둘로 나뉘어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하나는 이후락과 백남억이 주도하고 또 한 세력은 김종필과 오치송이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김은 또 주장하기를 박 대통령이 최근 들어 늦게까지 과음을 한다고 했다(박 대통령은 원래 과음을 한다. 그러나 본 대사관은 이 점과 관련해 다른 정보원들로부터 특기할 만한 확증적인 징후를 들은 바 없음).
본인의 견해: 탁월한 야당 지도자라는 김영삼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가 말한 내용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
[ 국무부의 개인 기록 비밀 파일들 ]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은 한국의 외무장관, 주미 한국 대사 등 고위직 외교관 면담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통상 및 외교 등 한미 관계, 남북 관계, 유엔을 포함한 한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한국 정부의 의견이 미국 측에 전달된다.
따라서 미국 쪽에서는 한국 외무장관이나 주미 한국 대사 등을 가장 빈번하게 접촉한다. 이들의 개인 이력은 물론 취향이나 성품, 협상 태도, 한국 내에서의 평가 등 모든 것이 국무부의 비밀 파일 속에 기록되어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67년 6월30일부터 1971년 6월3일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미국과 공식 채널을 가동했다. 1971년 4월에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른바 ‘최규하 파일’ 가운데 일부분.
‘최규하: 베테랑 외교관. 1967년 6월부터 외무장관 재직. 언행이 느리고 따분하다는 평을 얻고 있으며, 현직 업무 수행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고 활기차지도 않음. 표면상의 외교 능력은 있는데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 부족으로 유효성에 한계가 있는 듯함.
외형적으로는 협조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자기 자신의 생각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으며, 상황 고려와 의전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함.
최는 풍채가 좋고 옷매무새가 말끔하며 세련됨. 신장은 5피트 10인치로 평균 한국인보다는 큰 편이고, 약간 등이 굽었음. 일어와 중국어가 유창하며, 영어 실력은 좋은 편. 약간의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구사. 정원 가꾸기가 취미.’
최규하 외무장관의 뒤를 이어 71년 6월에 신임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김용식 씨다. 다음은 미 국무부가 비밀 분류해 보관했던 김용식 파일 중에서 학력이나 경력 부분을 제외한 개인평 부분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다.
‘김용식: 58세. 1971년 6월3일 외무부 장관에 임명. 주한 미 대사관 요원에 따르면 김은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하며 극도로 조심스러움. 한국의 외무부 관료들은 김이 유엔에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적절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동료나 하급자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업무 수행을 비판함. 영어와 일어가 아주 뛰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