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마녀사냥은 있었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11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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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년 1월18일 밤 10시. 술에 잔뜩 취한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다짜고짜 욕부터 해댔다. 다혈질인 김총장은 평소 화가 나면 육두문자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야, 이 개XX야. 내가 그래도 일국의 검찰총장이야. 니들이 일국의 검찰총장 부인을 멋대로 조사해, 이 개XX야. 니 형수 어딨어, 이 OO놈아. 당장 보내.”

    청와대의 내사 움직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직동팀이 설마 그렇게까지 조사할 줄은 몰랐던 김총장의 울분이 폭발한 것이었다. 해명서 정도만 쓰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뭔가 음모가 벌어지는 듯싶었다. 더욱이 박주선이 누구던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로 친형제 같은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 XX가 지 형수한테 이럴 수 있나’ ‘감히 경찰 조직이 검찰총장 부인을 건드려?’ 김총장은 모욕감에 부르르 떨었다. 박비서관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사과했지만 그의 귀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각 그의 부인 연정희씨는 의상실 라스포사에서 12시간째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당히 강도 높은 조사였다. 오전 10시께 시작된 조사는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씨가 귀가한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다. 이날 강인덕 당시 통일원장관 부인 배정숙씨는 조사를 받다 밤 1시30분께 각혈을 하고 쓰러졌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배씨를 병원으로 옮기고 조사를 중단했다.

    이날 일은 옷사건이라는 연극의 서막이었고 장차 다가올 태풍의 전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 부부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사직동팀 조사로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연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연극의 주연으로 발탁된 상태였다. 불똥은 남편에게 튀었다. 99년 6월 김태정씨는 법무장관에 취임한 지 보름 만에 옷을 벗었다. 겉으로 드러난 해임 사유는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대한 지휘책임이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옷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것을.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9년 12월4일. 장관직에서 물러나서도 옷사건에 시달리던 김태정씨는 끝내 파편을 맞고 구속됐다.



    “옷사건은 매우 간단한 사건이다. 유언비어를 방어하려다 보니 옷을 안 샀다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 거짓말을 그대로 유지하려다 보니 문건 조작이 필요했다.”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의 변호인 윤전 변호사는 옷사건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지었다. 특검 수사 결과 그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단순한 구조였던 이 사건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변질된 것은 한 여인의 어리석음과 눈가림 탓이었다. 그리고 그 죄값을 짊어진 이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최순영 신동아그룹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연씨에게 옷으로 로비를 했는지, 또는 연씨가 그것을 빌미로 이씨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는지 여부. 수사결과를 보면 연씨가 옷값 대납 요구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일순씨 및 배정숙씨의 혐의와는 별개 사안이다. 이형자씨 주장대로 두 사람이 옷값 대납을 요구한 게 사실이더라도 연씨에 대한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옷값 안 내 구속(?)

    그렇다면 이제 이 사건을 정리하는 마당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마녀사냥’이 있었는지 여부다. 이형자씨는 “옷값 대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최회장이 구속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검증하느라 정치권 언론 검찰이 1년 동안 정력을 소진했다.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안 대줬다는 이유로 재벌회장을 구속한다?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아주 간단히 해답을 찾는 경우가 있다. 이씨의 주장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최회장은 애초 그 혐의의 중대성에 비춰 사법처리 대상이었다. 다만 외자유치 명분으로 그 집행을 보류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최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보류되자 98년 10월 그를 외화도피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일부 언론 역시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던 터였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른 데는 물론 연씨의 책임도 크다. 스스로 마녀사냥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직동팀이 고관 부인들의 사치행각을 조사하는 줄 알고 ‘손을 썼다’. 윤전 변호사의 말마따나 ‘오해의 소지’를 아예 없애려고 거짓말(고의든 실수든)을 했고 그후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것이 언론의 집요한 공격을 불렀다.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그렇긴 해도 그녀는 이 사건의 피해자다. 한 예를 들면 그녀에게 혹독한 자백을 강요했던 호피무늬 코트의 반납시기만 하더라도 그 옷이 이형자씨의 로비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눈을 부라릴 일이 아니었다. 사직동팀의 내사정보를 사전에 알았는지 여부도 마찬가지다. 사전인지가 사실이라도 해도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 경우 남편 몰래 고가의 옷을 구입했다가 그 옷이 자신을 음해하는 유언비어에 등장한 사실을 알고 ‘도덕적인 비난’이 두려워, 그리고 남편에게 누를 끼칠까봐 부랴부랴 반납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옷값대납 요구를 거절해 최회장이 구속됐다”는 취지의 이형자씨 주장을 바꿔 말하면 옷값을 대납했다면 최회장 구속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언론은 이 비합리적인 주장의 허구성을 짚지 않았다. 그에 반해 연씨는 비록 거짓말로 화를 자초하긴 했지만, 로비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는 죄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언론은 진작 이씨의 주장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옳았다. 예컨대 연씨는 문제가 된 ‘최회장 사법처리 가능성 언급’에 대해 배정숙씨에게 “외자 유치가 안 되면 어렵지 않겠냐”는, 상식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며 결백을 호소했다. 그런데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연씨가 옷을 얻어 입기 위해 배씨를 통해 이씨를 협박했다는 쪽으로. 그 전에 전복과 그림을 거절한 것은 더 큰 뇌물, 곧 라스포사 옷을 입기 위한 고단수 작전이었다고….

    김태정 혐의 논란

    김태정씨의 죄에 대해서도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에게 원죄처럼 따라붙는 ‘정치 검사’라는 혐의에 대한 비난과 법적인 책임은 구별돼야 한다. 그의 구속사유엔 법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그에게 적용된 공무상비밀누설 혐의와 공문서변조 혐의에 대해 상당수 법조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영장을 발부한 판사조차 법정에서 논란이 되리라는 점을 인정할 정도였다. 정치 검사란 오명을 쓰고 정치인 사정수사의 사령탑이었던 그가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옷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불거진 배경엔 분명 정치적 이유가 있다. 옷사건의 표면적 공격 대상은 연정희씨였지만 그 칼끝은 김태정씨를 겨누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부인네들이 아니었다. 거짓말로 화를 자초한 아내 못지 않게 분별력을 잃었던 남편, 바로 김태정씨였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망칠까 두려워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고 여론의 비판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겨 결과적으로 더 큰 화를 불러들였다. 그의 죄는 아내에 대한 조사 결과가 담긴 문건을 건네 받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엉뚱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배경에 김씨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현 정부의 실세 중 김태정씨만큼 적이 많았던 사람도 드물다. DJ비자금 사건 수사 유보와 세풍 북풍 총풍 등 정치권 사정을 주도하는 과정에 야당의 극심한 반발과 원한을 샀다. 그가 대전법조비리사건 처리과정에 터져 나온 ‘심재륜 항명파동’과 소장 검사들의 집단서명파동 때 물러났다면 옷사건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거나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론의 사퇴압력 공세에 꿋꿋하게 버텼다. 그의 정치적 야심이 큰 탓도 있었지만 김대통령에게 그의 충성심이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그에 대한 대통령의 지나친 신임은 점차 정권에 부담이 됐다. 정치적 라이벌들의 견제심리도 커졌다. 옷사건은 출발 당시부터 권력의 암투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옷사건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선 먼저 이 사건의 외곽구도를 살펴봐야 한다. 옷사건은 재벌총수와 검찰총장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특별부록처럼 끼여든 사건이다. 양측의 전쟁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초기엔 정치권에 대한 신동아측의 로비와 검찰의 수사 보류로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다 98년 12월 최순영 회장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감에 따라 최회장측의 패배로 끝나는 듯싶었다.

    그때 최회장측이 뽑아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옷사건이었다. 소문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나갔고 마침내 사직동팀의 내사가 시작됐다. 최회장측에 유리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내사결과는 최회장에게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의 역공은 무서웠다. 99년 2월 최순영 회장은 구속됐다. 김태정씨의 KO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또다른 시작이었다.

    박시언-김태정의 비밀

    99년 5월 김태정씨가 법무부장관이 되자마자 최회장측은 벼르고 벼르던 ‘물귀신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옷사건을 언론을 통해 폭로한 것. 전황은 급전했다. 검찰수사가 벌어지고 김씨는 궁지에 몰렸다. 김씨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 및 시민단체의 누적된 반감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결국 김씨는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어야 했다. 어찌 보면 이제 양측은 더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관성이 붙은 옷사건의 바퀴는 멈출 줄 몰랐다. 검찰이 사건 전모를 제대로 밝히는 일보다 ‘장관 사모님’인 연씨를 감싸는 일에 더 골몰한 결과였다. 언론과 정치권이 부지런히 사건의 바퀴를 굴려 갔다. 청문회에 이은 특검수사. 사방에서 두들겨 맞은 김태정씨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여기에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신동아 부회장 박시언씨가 사직동팀 최종보고서를 공개한 것. 치명타를 맞은 김태정씨는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막판 대역전극이었다. 이것으로써 재벌과 ‘일국의 검찰총장’의 ‘죽고 죽이는’ 전쟁은 끝이 났다.

    막판에 최순영 회장 부부의 대리인으로 나서 김태정씨를 거꾸러뜨린 ‘용병’ 박시언씨. 두 사람은 과연 어떤 관계인가. 김태정씨는 왜 그에게 문건을 보여줘 화를 자초했을까. 두 사람 관계의 비밀을 풀면 양측의 ‘최후의 승부’가 전개된 배경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또 수사유보에서 사법처리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옷사건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옷값 대납 요구와 최회장 구속을 연결시키는 이형자씨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검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먼저 박씨의 정체를 살펴보자. 미국 시민권자인 그가 신동아그룹에서 맡은 일은 로비였다. 최순영 회장이 그를 신동아 부회장으로 영입한 것은 98년 6월. 정식 직책은 신동아그룹 비상근총괄부회장 겸 대한생명 고문. 신동아그룹의 경영부실과 최순영 회장 개인비리에 대한 검찰 내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박씨는 병역을 마친 뒤 미국으로 이민갔다. 뉴포트 대학 졸업 후 시민권을 얻었고, 건설업으로 돈을 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김태정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93년께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씨는 대검 중수부장으로 YS 정부 사정수사의 실무책임자였다. 그의 지휘를 받던 대검 중수부3과는 그해 한화 김승연 회장을 사법처리한 바 있다. 그때 3과장이 박주선씨였다. 옷사건에 관련된 한 변호사는 “박시언씨는 김회장 사법처리에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박씨의 동생이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었는데 수사팀이 그를 통해 김회장의 미국 내 별장구입 계약서를 입수했다는 것. 반면 박주선씨는 “박씨 동생을 만나긴 했지만 크게 도움이 안 됐다”고 말한다.

    박씨는 김대중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그가 김대통령을 알게 된 것은 김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이때 P씨 등 현 정부의 실세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재정지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미주지역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90년대 초 미국 상·하원의원 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특히 97년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클린턴 대통령의 동생인 로저 클린턴의 만남을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정씨 주변에 따르면 98년 6월께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박씨가 느닷없이 김씨의 검찰총장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신동아그룹 부회장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는 기자실에 엠바고(보도통제)를 요청해놓은 상태에서 신동아그룹의 경영부실과 최순영 회장의 개인비리 혐의를 추적하고 있었다. 최회장은 이미 두 번이나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터였다.

    김씨의 한 측근에 따르면 그날 김씨는 박씨가 신동아 명함을 내밀자 표정이 바뀌었다고 한다. “당신이 언제부터 신동아를 잘 알았냐”고 면박을 주며 “당장 집어치워라. 저의가 뻔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나를 얼마나 팔았냐”고 모욕을 줬다. 김씨 측근에 따르면 박씨는 이때부터 김씨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고 한다. 그가 99년 12월1일 대검 기자실에 들러 “문건 공개는 김태정과 박주선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털어놓은 데는 바로 그런 사정이 있다는 것.

    이 측근에 따르면 그후 김씨는 박씨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고 한다. 김씨측에 따르면 전엔 집무실에서 몇 차례 만났지만 박씨가 ‘그쪽 사람’이 된 걸 알고는 전화가 와도 잘 받지 않고 면담 신청도 번번이 거절했다는 것. 박씨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옷사건에 대한 사직동팀 내사가 벌어질 즈음. 김씨측은 박씨가 폭로광고 계획 등 최회장 쪽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척하며 은근히 협박을 했다고 주장한다. 김씨가 구속된 후 부인 연씨와 변호인 임운희 변호사는 신동아의 협박 사실을 폭로했다. 하지만 신동아측은 협박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피의자 주제에 검찰총장을 협박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입 닫고 있으라’고 협박 당했다”고 주장한다.

    98년 12월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회장은 해가 바뀌기 전 사법처리될 전망이었다. 검찰의 수사유보 명분은 신동아측이 약속한 외자유치가 계속 늦춰지고 시민단체의 최회장 고발 등으로 점차 힘을 잃고 있었다. 12월23일 MBC는 검찰 고위층의 언급이라며 최회장의 연내 구속방침을 보도했다. 이에 대해 이형자씨는 99년 5월25일 언론사에 돌린 진정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그날 저녁 MBC 뉴스에 ‘최회장을 구속수사하겠다’고 또 내보냈습니다… 총장 부인의 옷값을 치르지 않자 이러한 협박과 불이익을 당한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연씨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른바 사직동팀 최초보고서에 담긴 ‘검찰총장 부인 관련 유언비어’에 따르면 연씨는 ▲98년 12월 앙드레김 의상실에서 옷 두 벌을 2200만원에 맞췄다. ▲그후 라스포사 의상실에서 밍크코트를 3500만원에 맞췄다. ▲대금은 일행 중 1명이 지불키로 했다. 또한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는 ▲김총장 부인이 옷대금을 지불할 사람으로 지명해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옷값 3500만원을 달라고 했다. ▲상대방이 “나는 앙드레김 의상실 옷값만 책임지기로 했을 뿐 라스포사 옷값은 낼 수 없다”고 하자 ▲김총장 부인에게 “옷값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문의했다. ▲말썽이 날 것을 우려한 김총장 부인이 라스포사 옷값 3500만원을 지불했다.

    위 유언비어 중 연씨가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사실관계가 왜곡된 것으로 드러났다. 2200만원에 옷을 맞춘 적도 없으며 특히 3500만원짜리 밍크코트를 산 사람은 연씨가 아닌 이형자씨였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유언비어는 이씨가 원장으로 있는 횃불선교원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고 기독교 인맥을 통해 영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김씨가 박시언씨를 검찰총장 집무실에서 다시 만난 것은 99년 2월 하순. 그에 앞서 최회장은 2월11일 구속된 상태였다.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에 따르면 김씨는 박주선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옷사건 내사 종결 여부를 확인한 후 내사보고서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피내사자로서 조사 결과가 궁금하다. 더구나 이 일을 5대 일간지에 광고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고 있으니 보고서를 보내주면 이형자에게 내 처가 결백하다는 사정을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주선씨가 보고서를 보내주자 김씨는 박시언씨에게 전화를 걸어 집무실로 오게 했다. “회개하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박씨에게 보고서를 내던지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청와대 사직동팀에서 조사한 결과야. 이형자에게 쓸 데 없는 짓 말라고 전해달라. 앞으로 계속 협박한다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이날 그가 박씨에게 건네준 옷사건 내사보고서는 10개월 후 김씨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됐다. 이에 대해 김씨의 측근은 “당시 김총장이 흥분해 분별력을 잃은 게 화근이었다”고 말한다.

    최회장의 외화도피 혐의를 수사했던 검찰의 한 간부는 “당시 수사를 강행했다면 이토록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옷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또 “당시 수사팀은 신동아측의 10억달러 외자유치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다”며 “그때 수뇌부에서 제대로 판단했더라면…” 하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순용 당시 서울지검장(현 검찰총장)은 수사팀을 불러 직접 수사유보 지시를 내렸다. 명분은 신동아측의 외자유치 협상. 위 검찰 간부는 “수사 욕심은 있었지만 당시 경제상황 때문에 그 명분에는 누구도 맞설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에 덧붙여 “일부 언론 보도와는 달리 수뇌부와 수사팀 간 의견 대립이 있었던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검찰 주변에선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수사팀을 직접 불러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최회장 비자금이나 사생활을 너무 파헤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있다.

    수사유보 결정이 검찰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한 가지 확인되는 것은 박시언씨가 최회장 구명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수사팀도 박씨의 움직임을 간파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위 검찰 간부는 “박시언이라는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의 로비로 수사가 유보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P씨를 잡았다”

    박시언씨는 여권 실세들과 친한 것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반면 이름이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은 펄쩍 뛰고 있다. 하나같이 국민회의쪽 사람들이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것은 정일순씨의 발언. 정씨는 특검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지난 11월16일 법원 영장실질심사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얘기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형자씨가 내게 ‘박시언을 영입해 P씨를 잡았다. 정치권 로비에 100억원이 들었다. 이제 걱정 없다’고 하기에 내가 ‘잘 됐다’고 말해줬다.”

    P씨는 박시언씨의 로비의혹에 관련돼 이름이 오르내리는 여권 실세다. 정씨 발언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렵다. 신동아측이 정치권 로비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검찰의 수사유보 결정과 신동아의 정치권 로비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수사유보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신동아의 외자유치 협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라는 게 검찰 주변의 지배적 시각이다.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는 것. 그것은 물론 신동아 수사에 대한 정치권의 압력을 뜻한다.

    김태정씨는 99년 11월24일 특검에 출두하면서 ‘김태정의 고백’이라는 자료를 통해 “검찰총장으로서 최회장의 외화도피 사건을 보고받은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최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말들이 있었다”고 말해 이른바 외압설을 처음 제기했다. 그는 그러나 외압 주체에 대해선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라고 입을 다물었다.

    김씨가 이처럼 운만 뗀 데 대해 검찰 주변에선 자신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 경우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수감된 김씨를 면회하고 있는 임운희 변호사에 따르면 김씨는 더 이상은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임변호사는 “몸이 갇힌 상태에서 전선 확대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신동아의 정치권 로비에 대해 전면수사를 펼칠 의지가 있다면 외압설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의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옷사건이 김씨 구속으로 사실상 마무리된 데다 섣불리 건드릴 경우 총선을 앞둔 여권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신동아에 대한 보복수사로 비칠 수 있다는 점도 수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김태정씨는 신동아 수사 당시 사석에서 “신동아 수사는 내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외자 유치를 하겠다는데 검찰이 재를 뿌릴 순 없지 않으냐”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또 구속되기 직전엔 “‘정책결정 과정’에 원칙대로 최회장을 구속하자고 고집해 관철시킨 사람은 나와 박주선뿐이었다”는 말도 했다. 그의 말은 박시언씨의 발언, 곧 “최종보고서 공개는 김태정과 박주선을 겨냥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법처리는 대한생명 회생의 시작이다”는 얘기와 맞아떨어진다. 신동아측이 김태정씨와 박주선씨를 최회장 구속의 원흉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동아측은 두 사람이 ‘강경파’라는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을까. 신동아측에 그런 언질을 준 사람이 바로 외압의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

    “김태정 때문에 안 된다”

    한 가지 단서는 김씨의 얘기 중 ‘정책결정 과정’이라는 표현이다. 재벌에 대한 검찰수사 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급 인사는 그리 많지 않다. 정일순씨의 증언도 시사하는 바 크다. 정씨에 따르면 이형자씨는 여러 차례 ‘김태정의 낙마’를 언급했다고 한다. 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어떤 날엔 “이제 다 됐다”며 희망 섞인 얘기를 하다가도 또 다른 날엔 “김태정 때문에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

    이씨에게 정치권 및 검찰의 동향을 귀띔해준 사람은 박시언씨로 보인다. 그렇다면 박씨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어쨌든 신동사 수사를 유보하고 최회장 사법처리를 미룬 것은 김태정씨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그러잖아도 검찰 안팎에서 ‘정치 검사’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터였다. 시민단체와 언론은 검찰과 정치권 또는 재벌회장과 검찰총수의 유착의혹을 제기했다. 99년 1월말에 일어난 ‘심재륜 항명파동’은 젊은 검사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2월2일 검찰 개혁 방안을 두고 평검사들과 검찰 수뇌부의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한 평검사가 최회장 사법처리 유보결정에 대해 ‘정치권 및 재벌과의 유착’이라며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태정씨는 99년 9월초 옷로비 청문회가 끝난 후 사석에서 최회장 사법처리 유보에 대해 “나도 기독교인인데 내 손으로 장로를 구속하고 싶진 않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또 “지금 와선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쪽에서 계속 ‘곧 외자유치가 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해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억울할 만도 하다. 정치권 외압 여부를 떠나 신동아의 외자유치를 위해 수사 보류를 지시하긴 했지만 나중엔 원칙대로 사법처리를 했는데도 온갖 의혹과 비난을 혼자 뒤집어썼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회장 구속시기에 대해선 검찰 안팎에서 여전히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 사정과 관련한 편파수사 시비, 항명파동에 이은 소장 검사들의 검찰 개혁 요구, 시민단체의 퇴진 압력 등으로 검찰총장 취임 후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김씨가 ‘국면 돌파’를 위해 최회장을 전격구속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매우 그럴 듯한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이는 외자유치 명분으로 사법처리가 유보됐다는 점을 놓친 측면이 있다. 그보다는 최고위층과의 교감으로 결정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 단서는 옷사건에 대한 사직동팀의 최종보고서. 박주선씨가 김대통령에게 이 보고서를 올린 것은 99년 2월10일. 최회장이 구속되기 하루 전이었다. 사직동팀 최종보고서엔 다음의 ‘건의사항’이 있었다.

    “내 손으로 장로를…”

    ‘최순영 회장 사건은 미화 1억6500만 달러의 재산 해외도피, 수출금융 1억8500만달러의 편취행위로서 사안이 중대한 점, 공범인 사장 김종은이 구속된 점, 사건처리를 둘러싼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돼 있는 점 등을 종합하건대 최순영의 구속으로 사건의 신속한 종결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이런 점에 비춰 최회장 사법처리는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씨가 주도하긴 했지만 독자적인 결정은 아닐 개연성이 높다. 이와 관련,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증언이 있다. 김씨 측근은 최근 “김총장이 99년 들어서도 최회장의 사법처리를 결정하지 못하고 미적거린 것은 옷사건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고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김씨는 자신의 아내와 관련된 음해성 소문이 도는 걸 알았으며 그 와중에 최씨를 구속하면 ‘보복’이라는 오해를 살까봐 사법처리를 자꾸 늦추게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직동팀의 내사결과 아내의 ‘누명’이 벗겨지자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 검찰총수에 대한 ‘협박용’이었던 옷사건이 재벌회장에게 부메랑으로 날아간 셈이다.

    김씨는 언젠가 사석에서 옷사건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옷사건과 최회장 구속의 연관성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럼. 화가 나 구속해버렸지. 누구라도 안 그렇겠나. 명색 기독교 장로라는 사람이 자기 살겠다고 어떻게 그리 남을 모함할 수 있나. 외자유치한다는 거짓말로 시간이나 벌려 들고.”

    최회장 구속 결정에 김씨 개인의 감정도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얘기다.

    99년 12월3일 김씨는 집에서 한 원로목사의 기도를 받았다. 바로 CCC(한국대학생선교회) 명예총재로서 한국 기독교계의 정신적 지주인 김준곤 목사였다. 김목사는, 최회장의 동서로 기독교계의 최회장 구명 로비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하용조 목사의 신앙적 은사이기도 하다. 김목사는 김씨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다. “옷사건은 하나님이 한국 기독교계의 교만과 타락을 꾸짖고 깨우치게 하려고….” 김씨 부부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다음날 김씨는 구속됐다. 그가 구속된 후 신동아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의 한 간부는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무서워서 재벌 수사 못한다.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가진 재벌이 보복하려 들면 어느 검사가 배겨날 수 있겠나.”

    “영부인에게 목사들 얘기 전하고 확인해보라 말씀드렸다.”

    정일순씨에 따르면 이형자씨는 김태정씨의 낙마를 확신하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일요신문’이 특종보도한 정씨의 편지(99년 1월17일 김씨에게 보낸 편지. 인편 전달)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날도 와서 저한테 청와대 사정에 영부인께서 비밀리에 총장 부인을 내사시켰다고, 곧 있으면 자기네는 무혐의로 떨어지고 (검찰총장 임기가) 6개월밖에 안 남았다며 참 하나님 역사를 보라며, 투서가 김태정씨는 여기저기 많이 들어온다더라며, 우린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구속시킬 수 없다며 큰소리 치기에…’.

    이형자씨는 과연 무엇을 믿고 이런 얘기를 했을까. 이씨에게 ‘김태정이 곧 낙마하고 최순영은 무혐의 처리된다’는 확신을 심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또 어떤 근거로 이씨는 영부인이 내사를 지시했다고 믿었을까. 교계 주변에선 황장로라는 사람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황장로는 마사회 상임감사인 황용배씨를 말한다. 그는 기독교계에서 영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연결되는 직접 통로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창천교회 장로다. 주변에 따르면 황씨는 이 여사의 오랜 신앙동지이며 민주화투쟁 시절 동고동락한 사이다. 그는 역대 대선 때 기독교계에서 DJ 지지표를 모으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을 지내던 그는 정권교체 후 마사회로 갔다.

    황씨는 영부인에게 목사들의 얘기를 전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형자씨를 만난 적은 없다며 이씨와 아무 관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증언은 최순영 회장 사건 및 옷사건에 대한 기독교계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 이형자씨와 만난 적이 있는가.

    “잘못 알려졌다. 난 이씨를 만난 적이 없다. 하용조 목사(최순영회장 동서)도 잘 모른다.”

    ─ 옷 사건과 관련해 목사들이 찾아갔다는데.

    “98년 12월 하순이었다. 목사들이 찾아와 하는 얘기가 ‘최순영 장로가 이러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교계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김홍도 목사와 MBC의 싸움으로 교계가 한 차례 엄청난 시련을 겪었는데 또 이런 일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외화도피 혐의가 있으면 잡아가든가, 잡지는 않고 엉뚱한 루머만 나오니까 교계 사람들은 뭔가 뒷거래가 잘못된 탓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아세아방송과 극동방송 이사장인 최장로는 당시 기독교 TV를 설립하려 했다. 목사들은 최장로가 교계에 상당히 기여한 훌륭한 기업인인데 정권이 바뀐 뒤 뭔가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협조를 잘 안 하니까 외화도피로 몰고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천사 같은 사람인 최장로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대통령이 배려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방법으로 탄원서를 만들어 목사 2000명의 서명을 받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대통령 내외를 지근에서 모셔봤으니 나보고 탄원서를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 실제 연판장을 갖고 왔나.

    “서명작업중이어서 갖고 오진 않았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말해줬다.”

    ─ 영부인에게 목사들의 뜻을 전했나.

    “청와대에 들어간 기회에 말씀드렸다. 기독교계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돌고 있다며 세 가지를 말씀드렸다. 첫째 ‘최순영씨가 외화를 도피했다고 하는데 범법이라면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직 조사중이라면, 잡아넣는다느니 안 잡아넣는다느니 자꾸 얘기해서 기독교계에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문만 무성하니까 기독교계에서 오해를 하고 있다. 목사들은 최회장이 단돈 1원도 빼돌린 적이 없다고 한 이형자씨의 말을 믿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둘째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등 고위층 부인들이 옷을 사러 가 이형자씨에게 옷값을 대신 내라고 해 이씨가 한 번인가 옷값을 내줬는데 또 요구해 거절했다고 한다. 이씨는 ‘남편이 범죄사실이 없지만 예의로 한 번 옷값을 냈는데 자꾸 옷을 가져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돈을 더 못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한번 확인해보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영부인은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최회장이 상당한 액수의 외화를 도피시킨 일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하고 있으니 법대로 처리해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또 옷사건에 대해선 ‘개혁의 선봉장인 검찰총장의 부인 등 고위층 부인들이 설마 그런 짓을 하겠느냐.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소문이 기독교계에 퍼진다는 것은 상당히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셋째 연판장 문제를 말씀드리니 ‘정부에서 법을 집행하는 일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이 법 이전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복스러운 일이 아니다. 목사들이 길게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 영부인과의 면담 내용을 이형자씨 쪽에 전달했나.

    “이씨에게 전한 게 아니고 목사들에게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순영 이형자씨 내외가 상당히 급박한 사정이었던 것 같다.”

    ─ 그 일과 관련해 모처로부터 경고를 받지 않았나.

    “모 기관으로부터 너무 개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은 건 사실이다. 그 기관은 내가 비공식 채널로 영부인에게 시중 여론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듯 싶었다.”


    김중권 옷사건 지시의혹

    사직동팀의 옷사건 내사는 이형자씨측에 마지막 희망이었다. 사건 관련 유언비어가 처음 나돈 것은 연정희씨가 라스포사에서 호피무늬 반코트를 가져간 98년 12월19일 직후였다. 내사가 진행되기까지 20여일의 공백이 있었다.

    내사에 들어간 것 자체가 김태정씨에겐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렇다면 옷사건 내사는 누가 지시한 것인가. 이제껏 알려진 바로는 그 주인공은 박주선 전청와대 법무비서관이다. 박 전비서관이 청와대 자체 정보망을 통해 첩보를 듣고 사직동팀에 지시했다는 것. 그러나 내사지시 주체를 놓고 계속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총장 부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장관 부인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 비서관 선에서 내사를 지시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다.

    그에 따라 내사 지시의 주체로 의심받는 인물이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김씨 주도설이 제기되는 것은 그가 신학박사에 장로로 평소 기독교계 유력 목사들과 친분이 깊은데다 박전비서관의 직속상관이며 사실상 청와대 사정라인의 최고 윗선이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최근 어느 자리에서 “청와대에 찾아온 목사들의 얘기를 듣고 내사를 시켰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그의 지시를 받은 박주선씨는 “그게 사실이면 검찰총장 부인이라도 구속시키겠다”고 다짐하며 내사에 착수했다는 것.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옷사건 내사가 최순영 회장 구명운동을 하던 유력 목사들의 영향력으로 진행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 김씨측은 “박씨로부터 첩보 보고를 받고 내사를 지시했다”는 기존 주장을 고수했다. 박씨의 보고를 받은 김씨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이다.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 또 목사들이 최회장 구명 관련 탄원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한 시기는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과는 달리 내사가 종결된 후인 1월말 내지 2월초라고 밝혔다. 당시 김씨를 찾아온 목사는 모두 7명이었으며 그중엔 누구라면 다 알 만한 유명 목사가 끼여 있었고 그가 최회장의 동서인 하용조 목사를 김씨에게 인사시켰다고 한다. 김씨는 목사 수백 명의 서명이 담긴 이 탄원서를 김대통령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김씨는 박주선씨가 보고할 당시 이미 옷사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한 측근은 “(옷사건 관련) 첩보가 한두 군데서 더 올라왔다”고 밝혔다. 그런 점에 비춰 김씨는 옷사건 내사 지시 및 진행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건 김태정씨측의 시각. 김태정씨측은 ‘김중권 지시설’을 확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측은 김전실장이 이형자씨와 가까운 목사들의 일방적인 얘기를 듣고 자신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내사를 지시한 것으로 믿고 있다. 김씨는 사석에서 “그런 XX가 대통령 옆에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라며 김전비서실장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구속 직전 “최회장 사법처리를 끝까지 주장한 사람은 나와 박주선뿐이었다”고 말한 것은 다분히 김중권씨를 겨냥한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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