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춤추는 금 다시 전성시대는 오는가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17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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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값이 요동친다. 석 달 간격으로 최저치와 최고치를 오르내린다. ‘금의 침묵’은 왜 깨졌을까. 지금 나라 안팎의 금 시장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
    99년 10월 대신증권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99년 3/4분기 중 각종 투자상품의 수익률을 비교했더니 금이 23.4%를 기록, 주식 채권 예금 등을 제치고 수위를 차지했다는 것. 7월1일 1돈쭝(3.75g)에 3만9700원이었던 국내 순금 도매가가 9월30일에는 4만9000원으로 뛰어올랐다.

    같은 기간 국제 금값도 큰 폭으로 올랐다. 7월까지만 해도 1온스(31.1g)에 252달러로 최근 20년 사이에 최저치를 기록했다가 이후 상승세로 돌아서 10월 초에는 325달러까지 치솟았다. 11월 이후 다시 290달러대로 내려갔지만, 조만간 400달러를 넘어서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금값은 2차 오일쇼크 여파로 1980년 1월21일 온스당 838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등락을 거듭하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려왔다. 금이 지닌 국제 통화 기능이 약화된데다 투자수단으로도 매력이 떨어져 금에 대한 각국 중앙은행과 투자자들의 관심이 낮아진 게 주원인으로 분석됐다.

    그랬던 금이 왜 갑작스럽게 ‘부활’을 노래하고 있을까. 몇 달 사이에 이렇게 금값이 요동을 친 배경은 무엇일까. 국제 금 시장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금은 과연 또 한 차례 전성시대를 맞게 될 것인가.

    효과적인 포트폴리오 수단



    우선 금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부터 살펴보자. 하고많은 광물 중에서 왜 금이 값비싼 실물자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금은 다른 금속에 비해 대단히 우수한 물리적·화학적·기계적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어느 금속보다도 탁월해 성냥골만한 1g의 순금을 두드려 펴면 3km 길이로 늘일 수 있다. 색깔이 아름답고 잘 변색되지 않으며 산(酸)에도 부식되지 않는다.

    이런 성질 때문에 금은 다양한 형태의 장신구나 치아 등 의료용재로 가공할 수 있다. 사람의 몸에 부착했을 때 다른 금속에 비해 피부 알러지 반응이 적은 것도 장점.

    또한 금은 산업용으로도 널리 활용된다. 어떤 금속과도 잘 화합하므로 합금 가공하기 쉬우며, 전기 전도성이 뛰어나 반도체 등 전자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부품 재료가 된다(한국은 일본 미국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 5위의 전자산업용 금 소비국이다).

    98년 세계의 금 수요량은 4124t. 이 가운데 세공용에 쓰인 금이 3709t, 금괴로 만들어진 금이 155t, 투자용으로 퇴장(退藏)된 금이 260t이었다. 세공에 소비된 금 중 장신구를 만드는 데 쓰인 금이 3145t으로 전체 금 수요의 85%를 차지했고, 564t이 산업용이었다.

    금의 가치를 높이는 결정적인 요인은 탁월한 환금성이다. 화폐 발행량을 금 보유고와 연동시켜 금의 태환을 보장했던 금본위제도는 막을 내렸지만, 금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결제수단의 하나로 화폐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금은 금괴든 장신구든 어떤 형태로 갖고 있더라도 당장 현금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주요 금 시장에서는 하루 24시간 내내 금 거래가 이뤄진다.

    화폐보다 더 안정적인 측면도 있다. 달러 엔 마르크 같은 통화는 사실상 발행 국가의 부채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한국이 미화 50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면 미국이 한국에 500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통화로 보유한 자산은 통화 발행 국가에 의해 동결될 수도 있고 회수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으나, 금으로 보유한 자산은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동결될 우려가 없다.

    더욱이 화폐 자산은 그 화폐가 평가절하될 경우 손실을 입게 되지만, 금은 비교적 안정적인 국제가격에 따라 움직이므로 그럴 위험성이 낮다. 금이 투자자들에게 일정한 비율의 포트폴리오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는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금에 대한 투자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가격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주식이나 채권, 외환 등 다른 투자상품의 리스크 헤지 기능을 했다.

    재고 금 수급량이 금값 좌우

    금은 일단 채굴되면 부식하거나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금은 소량의 소모분을 제외하면 인류 역사 이래 생산된 금(약 12만5000t)이 그대로, 혹은 형태만 바뀐 채 유통되거나 퇴장된 것이다. 엊그제 아기 돌 선물로 받은 금반지가 고대 이집트나 신라시대에 채굴된 금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재고 금의 양은 매년 세계 전역의 광산에서 생산되는 금(약 2300t)의 50배가 넘기 때문에 재고 금이 금 시장에 얼마나 쏟아져 나오느냐에 따라 금의 수급량과 가격이 좌우된다.

    금의 수급은 여러 가지 경제적·비경제적 요인에 영향받는다. 금값과 주요 경제 요소들 간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먼저 물가. 금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헤지수단으로 활용되므로 물가 상승기에는 매입수요가 늘어 금값이 오르고, 물가 안정기에는 내린다. 역사적으로 금값은 미국의 소비자 물가지수와 정비례했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면 투자자들은 금이 다른 상품보다 고유 가치의 보전 기능이 크다고 판단, 더 많은 금을 사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금값 상승률은 인플레이션 증가율을 상회하는 경우가 많다.

    금리와 금 가격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금리가 오르면 금을 보유한 데 따른 기회비용이 커진다. 즉 높은 금리를 주는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게 금에 투자하는 것보다 유리하므로 금 매입수요가 감소한다.

    달러화 가치도 금 가격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 금값은 하락한다. 금 가격은 달러화로 표시되는데,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 엔화나 마르크화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금 매입수요가 감소한다. 금 보유량을 줄이는 대신 평가절상된 달러를 보유하려고 하는 것. 반대로 달러화가 약세일 때는 달러 자산을 매각하고, 달러에 비해 가치가 상승한 자국 통화로 금을 매입한다.

    각국 중앙은행들과 IMF(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금융기구의 동향도 주목 대상이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 무려 3만4000t으로 세계 재고 금 보유량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이 금을 매입하거나 매각할 경우 거래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국제 금 시장은 늘 이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은 금값에 영향을 주는 비경제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이든 전문적인 투자자든 이런 요인 때문에 자신의 자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판단되면 ‘안전한 투자대상’인 금을 사들인다.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사건, 레이건 미 대통령 피격사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 국제적으로 긴장이 고조됐던 시기에는 금 수요가 늘면서 금값이 뛰었다. 구 소련이 붕괴됐을 때는 일시적으로 200t의 금이 구 소련 지역에서 서방세계로 유입되면서 금값이 폭락하기도 했다.

    중앙은행들의 금 매각 바람

    96년 이후 국제 금 가격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그 배경으로는 우선 90년대 들어 두드러진 주요국 중앙은행들과 IMF의 금 매각 붐을 들 수 있다.

    벨기에는 89년부터 96년까지 847t의 금을 내다팔았고, 네덜란드는 93년과 97년에 700t, 호주는 97년에 167t을 매각했다. 99년 5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715t의 금 중 415t을 2001년까지 매각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2590t의 금을 보유한 스위스도 향후 장기적으로 1300t의 금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스위스 헌법은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을 매각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99년 4월 헌법을 개정해 1년 후인 2000년 3월부터 금 매각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중앙은행들은 금을 팔고 난 후에 매각 사실을 공표하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영란은행과 스위스 중앙은행이 이처럼 경매를 통한 금 매각 의사를 미리 밝힌 것은 금 딜러들의 눈길을 끌 만했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금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국제 금 시장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지 몰라도 당장은 국제 금 가격의 급락으로 이어졌다.

    99년 6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서방 선진 7개국(G7)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에서는 외채 과다 빈곤국(HIPC·Highly-indebted poor countries)의 부채 삭감을 지원하기 위해 IMF가 보유하고 있는 금(3000t) 가운데 10%를 적절한 시기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금 매각 대열에 합류한 것은 막대한 양의 금을 보유하는 데 따르는 기회비용이 크다는 판단 때문. 수익성이 낮은 금(중앙은행이 금을 빌려주고 얹어 받는 리스 금리는 연 1∼2%에 지나지 않는다)보다는 채권이나 외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유럽통화연맹(EMU)과 함께 지역내 단일 통화인 유로화가 출범하면서 유럽 각국이 환율안정 수단으로 선호했던 금의 가치가 퇴색했다.

    물론 지금껏 중앙은행들이 수익을 기대하고 금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단으로 금을 활용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억제정책을 시행한 결과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수축됐다. 오히려 일부 선진국에서는 경기침체에 따른 디플레이션 조짐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화폐가치 하락에 대비한 헤지 수단으로 금이 갖는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금 가격과 역상관관계를 보이는 미 달러화가 꾸준히 강세를 유지해온 것도 금 매입수요를 떨어뜨려 금값 하락을 초래한 요인이다. 또한 금 생산업자들은 금값 하락에 따른 마진 축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용절감과 신기술 도입, 새로운 금광 발굴 등을 통해 금 생산을 늘리고 금의 생산원가를 지속적으로 낮춰왔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노력이 금값의 추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값의 발목을 잡는 이런 사정에 큰 변화가 없는데도 99년 가을 금값이 갑작스레 뛰어오른 것은 왜일까.

    이것 역시 유럽 중앙은행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9월26일 유럽 15개 중앙은행이 금의 대량 매각을 자제하기로 했다는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향후 5년 동안 매각할 금의 양을 총 2000t 이하로 제한하고, 연간 판매량은 400t을 넘기지 않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이 기간에 중앙은행들이 리스나 선물, 옵션으로 활용하는 금의 양도 더 늘리지 않기로 했다.

    자신들의 금 매각 방침 발표와 함께 국제 금 가격이 폭락을 거듭하자 서둘러 불 끄기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과거 금본위제 시절에 세계 경제를 주도한 나라들인지라 지금도 각자 수백t에 달하는 금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 금 가격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자국 대외준비자산의 가치도 함께 하락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금을 지니고 있자니 부담스러운 ‘그림에 떡’이고, 내다팔자니 ‘헐값 처분’으로 국부의 손실을 감수해야 된다는 데 이들의 고민이 있다.

    어쨌든 이들이 금 매각을 자제하겠다고 발표한 지 하루만에 국제 금 가격은 18%나 치솟았다.

    IMF도 당초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국제 금 공급업계 조직인 월드 골드 카운실(WGC) 등이 “IMF가 빈곤국들을 돕기 위해 보유 금을 매각한다면 국제 금 가격이 폭락해 금 수출국인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최빈국들이 피해를 본다”며 비난하고 나서자 IMF는 9월30일 이사회를 열고 매각 방침을 철회했다.

    IMF는 최대 435t의 금을 금 시장이 아닌 장외(off-market)에서 중앙은행들에 매각함으로써 국제 금 가격에 충격을 주지 않기로 했다. 중앙은행들이 IMF로부터 현시세대로 금을 매입하되, 필요시 이를 IMF에 대한 지급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IMF가 보유한 금의 장부가격은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금 거래는 결국 IMF 보유 금의 가치를 평가절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IMF는 이렇게 조달한 자금 일부를 최빈국 부채 탕감 등을 위해 쓰겠다는 것.

    사실 IMF의 금 매각 계획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의심됐다. G7 국가 중 독일과 프랑스가 금 매각에 소극적인데다, 미국도 정부는 매각에 적극적이었지만 의회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네바다주 등 금 생산지역 출신 의원들은 IMF의 금 매각방안에 대한 거부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IMF가 금을 매각하려면 이사회 회원국 의결권 지분 중 85%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미국은 의결권 지분의 17.5%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 정부가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IMF의 금 매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모처럼 찾아온 금값 상승세가 앞으로도 지속될지, 아니면 ‘반짝이’에 그치고 말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가격상승 전망에 회의적인 시각은 ‘대세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나 달러화 약세 조짐이 보이지 않는데다, 새로 생산되는 금이 늘고 있으며, 냉전체제의 종식과 국제적 긴장의 완화로 금이 지닌 도피수단(escape money)으로서의 가치도 빛이 바랬다는 것.

    금, 부활이냐 퇴역이냐

    또한 유럽 중앙은행들이 금 매각 자제에 합의하긴 했지만, 기왕 잡혀 있던 매각일정은 그대로 추진되기 때문에 상당량의 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산 운용 수익을 높이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금을 팔려고 안달해온 중앙은행들이 과연 합의를 제대로 지킬지부터 의문시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을 시장에 내다팔려는 계획은 일단 무산됐지만, IMF가 금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 자체가 대외준비자산으로서의 금의 입지를 축소하려는 ‘시그널’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유럽 중앙은행들의 매각 자제 발표 후 상승세를 타던 국제 금 가격은 열흘 만인 10월5일 온스당 325달러 50센트(런던 금 시장 기준)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하락세로 돌아섰고, 10월29일 이후로는 하루도 300달러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12월13일 현재 가격은 279달러 50센트.

    금값이 장기적으로 다시 상승곡선을 그릴 것이라는 전망은 보유 금을 팔려야 팔 수 없는 중앙은행들과 IMF의 딜레마에 우선 근거를 둔다. 설령 IMF가 300t의 금을 시장에 내놓는다 해도 이는 연간 세계 금 생산량의 12∼13%에 불과하고, 게다가 여러 차례에 나눠 매각할 것이기 때문에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 하락폭은 크지 않으리라고 내다본다.

    9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로버트 먼델 교수는 “현재 2조달러에 달하는 각국 중앙은행의 대외준비자산은 향후 12년 동안 두 배로 증가할 것이며, 증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달러화가 아니라 유로화와 금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중앙은행들이 보유한 금의 양은 그대로겠지만, 대외준비자산 증가율이 지금처럼 6%를 유지하고 달러화와 유로화의 교환비율이 유지된다면 2010년 금값은 온스당 600달러대로 오를 전망이며, 이에 따라 중앙은행들이 보유한 금의 가치가 지금의 두 배로 뛰어오르리라는 것.

    WGC는 최근의 금 수요 증가세도 ‘금의 부활’을 예고한다고 주장한다. 99년 3/4분기 세계의 금 수요는 98년 같은 기간보다 장신구 부문에서 22%, 투자 부문에서 19%의 급성장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파키스탄(102%), 동남아 및 한국(70%), 일본(64%), 인도(38%) 등 아시아 지역의 금 수요 증가율이 높았다. 전통적으로 금을 선호해온 이들 국가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금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WGC의 조사에 따르면 금값에 대한 금 구매량의 탄력도는 -0.8이라고 한다. 금값이 1% 오르면 금 구매량은 0.8% 떨어진다는 것. 그런데 소득에 대한 금 구매량의 탄력도는 +2.0이라고 한다. 즉 소득이 1% 증가하면 금 구매량은 2% 증가한다는 것이다. 금 구매량은 금값보다 소득에 더 예민하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소득이 늘면 금값이 올라도 적극적으로 금을 사들인다는 얘기다.

    ‘고위험 고수익’ 투자상품

    금 수요의 85%를 차지하는 장신구 부문에서 순금(24K) 보다 가공하기 쉬운 18K(금의 순도가 24분의 18, 즉 75%의 순금에 은 동 아연 등을 섞어 합금한 것)나 14K를 선호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산업 부문에서도 값비싼 금을 대체할 수 있는 소재가 속속 개발됨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금 수요가 감소하리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WGC 이규현 한국지사장은 의견을 달리 한다.

    “24K는 대개 퇴장용이다. 돈이 필요하면 장롱에서 꺼내 팔기 때문에 시장에서 돌고 돈다. 그러나 18K, 14K는 재산이라기보다 패션 소비재에 가깝다. 한 번 팔면 여간해선 다시 공급자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순도가 낮아 제 값 받고 되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18K, 14K 장신구는 유행과 계절에 따라 디자인이 다양하게 바뀐다. 그래서 24K 장신구 한 개 살 사람도 18K, 14K는 여러 개 장만한다. 금 장신구의 순도가 낮아지면 오히려 금 수요가 늘게 되는 셈이다.

    또한 산업용 금 대체재의 개발 속도는 금을 필요로 하는 첨단산업의 확산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금을 재료로 사용하는 산업이 늘고 있고, 이런 산업이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때 일본이 주도했던 전자산업이 한국을 거쳐 이제 중국과 동남아에 상륙하지 않았나. 그러니 산업용 금 수요도 계속 증가하게 마련이다.”

    금값이 더 오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예측하는 데는 이렇듯 수많은 변수가 고려돼야 한다. ‘통화로는 지위를 잃었지만, 실물 자산으로는 가치가 여전하다’는 정도가 양측의 공박을 피할 수 있는 중립적 표현이 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금을 과거처럼 ‘가장 안정된 자산’이라고 말하긴 어렵게 됐다는 사실이다. 갖가지 변수 때문에 웬만한 투자수단 못지 않게 가격 변동폭이 큰 ‘고위험 고수익’ 상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 하나. 한국은행의 금 보유고는 99년 4월 현재 14t쯤 된다. 외환보유고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0.2%로 미국 영국 일본 등 전통적인 금 부국은 물론, 세계 중앙은행 평균(4%)에도 훨씬 못 미친다. 한국은행 외화자금실 이문형 조사역은 “금은 가격변동 위험이 커 국가 예산으로 함부로 사고 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최소한의 준비자산으로만 금을 보유할 뿐 수익성 제고를 위해 매입·매각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한다.

    경희대 김신 교수(국제경영학부)도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 경우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는 적지만, 금 선호 관습 때문에 민간의 금 보유량은 꽤 많은 편이다. 금 매장량도 적지 않다. ‘비상상황’이 닥치면 금 모으기 운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당한 양의 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 굳이 한국은행이 리스크 비용까지 들여가며 금을 보유할 필요가 있겠는가.”

    금 밀수 부추기는 부가세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은 연 15t 안팎. 그러나 이는 동을 제련하는 과정에 부산물로 생산되는 금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상당한 양의 금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98년에 4kg의 금을 캐낸 것을 마지막으로 금 생산이 중단됐다. 97년까지는 무극광산에서 연 1t 정도의 금을 생산했지만 매장량이 고갈된 것. 해마다 더 깊이 파내려가다 보니 경제성이 맞지 않아 광산을 임시 폐쇄했다.

    1910년대만 해도 극히 원시적인 채광기술로 남한에서만 10t 남짓한 금을 생산했으나, 일제가 전쟁 수요를 충족시킬 철광석 등을 우선적으로 파내느라 금 채광을 금지하면서 많은 금광이 폐쇄됐다. 광복 후에도 채광비용이 많이 드는 금 대신 철 아연 중석 석회석 위주의 광업정책을 펴는 바람에 금광에 대한 탐사와 채광 여건이 열악했다.

    광업진흥공사 장병두 자원탐사처장은 “자료가 확보돼 있는 기존 광산 등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남한지역의 금광석 매장량은 약 550만t으로 추정된다”며 “금광석 1t에 평균 7.4g의 금이 함유돼 있기 때문에 순수한 금 매장량은 41t쯤 된다”고 밝혔다.

    아직 조사된 적이 없는 지역까지 포함하면 매장된 금의 추정치는 그 몇 배에 달한다는 것. 광업진흥공사는 99년 6월 경북 성주군 수륜면에서 금광석 가채매장량 184만t 규모의 금광맥을 발견, 경제성 검토를 거쳐 2001년부터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우리나라의 금 수급상황은 기형적이다. 금의 수요는 연 120∼140t으로 추정된다. 세계 10위권 규모의 금 시장이다. 이 중 100t 정도가 장신구 소재로 쓰인다.

    수요를 연 120t으로 잡고 국내에서 15t의 금이 생산된다면, 나머지 105t은 약간의 고금(古金) 거래분 외에는 모두 해외에서 수입되는 금이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수입되는 금은 한 해 20t 남짓하다. 수요의 약 70%를 차지하는 이 ‘베일 속의 금’은 다름아닌 밀수 금이다. 한국은 오래 전부터 금 밀수 천국으로 오명을 떨쳐왔다.

    그 배경은 불합리한 세금체계에 있다.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수입된 금에 대해 3%의 관세와 10%의 부가가치세를 부과한다. 관세에 대해서도 별도의 부가세가 붙어 전체 세 부담은 13.3%가 된다. 즉 국제 시세가 100원인 금을 수입할 경우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113.3원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금을 밀수로 들여온다면 리스크 비용을 붙여도 108원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 금 가공업자와 도·산매상들이 값비싼 정식 수입 금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밀수 금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WGC 이규현 지사장은 “원자재이자 화폐나 다름없는 금괴(地金)에 아무런 부가가치도 창출되지 않은 수입단계에서부터 부가세를 부과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고 지적한다.

    금은 가격에 비해 부피가 작고 변질 우려가 없어 밀수품목으로 적격이다. 밀수에는 주로 선박이 이용되는데, 배에는 철제 구조물이 많아 금괴를 숨길 곳도 많다. 기둥 안쪽이나 선창(船倉) 밑바닥, 기름탱크 등에 금괴를 넣고 바깥에서 용접하면 감쪽같다. 금괴를 녹여 선체 일부로 치장하는 경우도 있다. X레이 투시기에 걸려들지 않는 은괴 안에 금을 집어넣고 은괴를 수입하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금을 가루 낸 뒤 진흙과 섞어 들여오기도 한다.

    밀수 금을 적발하기 위해 배를 해체하려면 척당 25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이만한 돈을 들여 배를 뜯었는데 금이 나오지 않으면 담당 세관직원은 문책을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누가 어디서 얼마만큼의 금을 사서 어느 배에 실었다’는 확실한 제보를 얻지 않고서는 금 밀수를 적발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이렇듯 밀수가 판을 치면 무자료 거래가 성행하고 세수(稅收)에는 구멍이 뚫리게 마련이다. 서울시립대 박정수 교수(행정학과)에 따르면 금의 연간 유통규모는 120t, 거래규모는 1조6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되나 귀금속상의 매출액은 5161억원(97년)으로 과표현실화율은 32.3%에 불과했다.

    부가가치세 징수실적은 47억3000만원으로 실효세율이 매출신고대비 0.9%, 매출추정규모대비 0.3%에 그쳤다. 더구나 정상적으로 수입돼 부가세가 과세되는 금은 가공된 후 대부분 수출되기 때문에 부가세를 환급해줘야 한다.

    서울 강동세무서 상담실 박인근 계장은 “금괴 수입단계의 부가가치세를 없애 금 밀수를 정상 수입으로 유도하면 관세 징수실적만 해도 현재 부가세 징수실적의 수십 배에 달할 것”이라며 “겨우 47억원의 부가세를 못 걷을까봐 막대한 세원(稅源)을 땅 밑에 묻어두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부가세 면세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많다. 종합상사가 수입한 금을 국내 업체에 수출용 원자재로 팔 경우(로컬 구매) 부가세가 면세되는데, 이를 탈세 기회로 삼는 것이 전형적이다.

    예컨대 A라는 도매상이 은행에서 외화획득용 원료구매 승인서를 받거나 L/C를 열고 종합상사에 금 로컬 구매를 신청하면 종합상사는 부가세를 붙이지 않고 A사에 금을 내준다. 그런데 A사는 이 금을 가공해 수출하지 않고 부가세를 붙여 내수용으로 판매한다. 원래 마진에다 판매가의 10%인 부가세를 추가 마진으로 붙여 폭리를 취하는 것.

    수출이행실적은 1년 안에 은행에 신고하면 되기 때문에 몇 달씩 이런 거래를 하다가 종적을 감추면 그만이다. A사 같은 도매상이 직접 이런 짓을 할 때도 있지만, 꼬리를 밟힐 것 같으면 속칭 ‘바지’라 불리는 유령회사를 내세워 치고 빠진다. IMF체제 이후 금 밀수가 주춤하면서 이런 수법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한 귀금속 가공업자는 “한 해 5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내가 한 달에 40∼50kg의 금을 가져다 쓰는데, 이런 업자들은 변변한 공장도 없으면서 하루에 50kg씩 가져 간다”며 “밤 새워 가며 일해봐야 손에 쥐는 건 얼마 안 되고 걸핏하면 세무조사나 받는데, 이럴 바에야 눈 딱 감고 한 탕 해서 몇십억 챙겨 튀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며 한숨을 내쉰다.

    재경부, 형평성 들어 난색

    금을 수입하는 종합상사들은 부가세 때문에 내수용으로는 금을 팔기가 어렵기 때문에 재수출할 목적으로 금을 수입하기도 한다. 외국 중앙은행이나 금융기관이 운용하는 금을 신용으로 수입, 이를 곧장 제3국에 수출하면 달러화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자금을 차입하는 효과가 있다. 수입은 신용으로 했기 때문에 대금을 당장 결제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출대금은 현금으로 들어오기 때문. 그 시차를 이용해 금리부담을 줄인다.

    외국 금융기관이 한국 기업에 신용으로 수출한 금을 다시 수입하기도 한다. 한국 기업은 차입 효과에, 외국 금융기관은 돈놀이에 목적을 두는 것.

    자금난에 허덕이던 D그룹은 기상천외의 금 거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그룹 계열 종합상사는 해외 금융기관에서 12kg짜리 금괴들을 수입했는데, 이를 가공하지 않고 원래 상태로 수출하려면 30일 이내에 수출해야 했다. 그래서 이 금괴들을 얇은 플레이트로 만들어 시간을 벌었는데, 이것을 재수입한 금융기관은 이를 다시 금괴로 만들었다. 플레이트 형태로는 국제적으로 유통되지 않기 때문.

    결국 D그룹은 수입한 금에 자기 돈을 들여 가치를 낮추고, 수출할 때는 낮아진 금 가치 때문에 돈을 덜 받는 이중의 피해를 봤지만, 달리 외화를 끌어들일 방법이 없었다.

    99년 4월 부산에서 출범한 금 선물거래소도 부가세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 금의 현물 시장이 비정상적이다 보니 선물 시장의 운용이 어려운 실정이다. 현물 시장에서 108원에 살 수 있는 금을 선물 시장에서 113.3원에 사서 투자수익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융계에서는 금 선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부가세 면세가 전제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대통령의 부산 방문에 맞춰 선물거래소를 서둘러 열다 보니 준비없는 출발이 되고 말았다.

    삼성물산 금속사업부 손성호 과장은 “4월부터 10월까지는 거의 거래가 없다가 11월에 1kg짜리 바 1500개가 거래됐는데, 이는 금 선물 시장에 참여하는 각 업체 실무자들이 시장의 소멸을 우려, 거래실적을 만들기 위해 서로 내부 거래를 한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금 선물 시장은 금을 원자재로 쓰는 산업체 등에 효과적인 가격변동 헤지 기회를 줄 수 있는데 부가세 장벽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 했다.

    귀금속가공업협동조합연합회 강문희 회장은 “우리나라 금 장신구 기술자들은 국제 기능올림픽 금 세공분야에서 5연패 하는 등 탁월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으나, 부가세 장벽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사업 여건을 못 견뎌 2000여명의 일류 기능인들이 일본에 밀입국해 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99년 5월 국회 재경위 김민석 의원(국민회의) 등은 이와 같은 의견들을 수렴, 수입 지금에 대한 부가세 면세를 골자로 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법률안을 제안했으나 주무부서인 재경부가 ‘금에 대한 부가세만 면세하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결국 폐기됐다.

    재정경제부 허영석 소비세제과장은 “법안 폐기와 상관없이 지금도 실무자들이 부가세 면세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어 현재로선 분명한 방침을 밝히기 어렵다”며 “다만 면세를 검토한다면 형평성 차원에서 금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 등 다른 귀금속류도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밝혔다.

    세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에 ‘금 전성시대’가 도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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