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고객 취향만 따르다가는 망한다

  • 홍성태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경영학

    입력2007-01-17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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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꾼들이 하는 말 가운데 “장사가 재미있다”는 것은 곧 “장사가 잘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장사가 잘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틀을 잡아가면서 마케팅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마케팅 개념을 잘못 이해하면 기업경영에 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점에서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데는 소비자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 과제다. ‘신동아’는 새천년을 맞아 소비자 행동과 마케팅 전략을 전공한 홍성태 교수의 ‘재미있는 마케팅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는 곧 ‘잘 되는 마케팅 이야기’ 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는 우선 마케팅의 핵심 내용인 ‘고객 중심 마케팅’ 개념에 대해 오해하는 점들을 짚어보고, ‘마케팅 전략’의 본질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편집자>》
    [ 제1부-고객중심 마케팅 신화에 대한 오해 ]

    ‘고객이 왕’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고객 중심 마케팅은 마케팅 원론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인식되어 왔다. 고객의 욕구(needs)를 찾아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고객 중심 마케팅을, 가능한 한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기업들은 해답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먼저 고객지향 마케팅에 대한 오해 사례들을 살펴보자.

    오해 1- 소비자의 욕구는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다

    주부들을 겨냥한 월간지 ‘마리안느’가 창간 17호 만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기업경영에서 부도는 병가지상사이며 한 잡지사가 문을 닫은 사건 또한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부도를 내게 된 이유가 눈길을 끈다.

    이 회사 기획실장에 따르면, ‘마리안느’는 창간을 앞두고 철저한 소비자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조사 결과를 보면, 주부들은 낯뜨거운 섹스 이야기나 루머 일색의 잡지에 식상해 있어 유익한 정보만 전해 주는 잡지가 나올 경우 95% 이상이 구독하겠노라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안느’는 자신있게 ‘무섹스, 무스캔들, 무루머’의 3무(三無)정책을 표방하고, 그 정책을 고수했다. 그런데도 이 잡지가 독자들의 외면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최근 들어 소비자의 욕구가 무엇인지 미리 예측하려고 마케팅 조사를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폐간은 이와 같은 마케팅 조사의 유용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해 만들었다는 제품이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들. ‘펩시’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한 코카콜라는 85년 400만 달러의 개발비를 들여 소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맛의 콜라를 만들어냈다. 20만 명이 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엄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 그야말로 소비자가 선호하는 맛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 ‘뉴-코크(New Coke)’가 시장에 나오자마자 직면한 것은 소비자의 거센 반발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지프를 군납하여 크게 성장한 아메리칸 모터스(AMC)는 전쟁이 끝난 후, 일반 소비자에 대한 판매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마케팅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는 일관되게 부정적이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어 지프를 상용화했는데 뜻밖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메리칸 모터스는 오히려 고객 욕구조사 결과를 무시함으로써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처럼 마케팅 관리자는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지만, 고객 자신도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욕구를 제대로 의식했다 해도 잘못 표현하기 일쑤다. 물론 마케팅 조사가 불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조사했다 하더라도 고객의 진정한 욕구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인정해야 한다.

    오해 2- 소비자의 욕구는 소비자 자신이 잘 안다

    기업은 소비자들이 자신의 욕구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항상 제대로 의식하는 것은 아니며, 기업만큼 장래에 대해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30년 전에 어떤 소비자가 캠코더·팩스·무선 전화기·e-메일·노트북 컴퓨터 등을 요구했겠는가? 오히려 기업이 아이디어를 다듬어 신제품을 만든 다음 광고 등을 통해 잠재고객을 교육시키고 시장을 창출해 왔다.

    고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기업은 훌륭한 기업이다. 그러나 더 훌륭한 기업들은 고객 자신이 알아채기 전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일본 소니사의 아키오 모리타 회장은 “소비자를 새로운 제품으로 리드해야 한다. 소비자는 무엇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제품 개발은 고객 욕구의 관찰(market pull)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과학 발전의 결과(science push)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객의 욕구 충족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세세한 문제 해결에만 급급할 뿐 창조적 과학발전에 따른 이노베이션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미래에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인데도 즉각적인 시장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술의 연구 개발이 무시될 염려가 있다.

    고객지향 마케팅이란 기업이 고객들보다 그들의 욕구를 더 잘 인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문제 해결과 욕구 충족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고객은 모를지라도 기업은 알아야 한다.

    오해 3- 소비자도 적절한 비용 개념을 가진다

    소비자들도 가끔은 제품의 제조비용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소비자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제품을 쓰고 싶어한다. 그래서 소비자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품종 소량생산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원가가 상승하고 결국 고객의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고객의 욕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오히려 고객에게 이롭지 못한 마케팅 활동이 되기도 한다. 기업들은 끝없는 신모델 개발과 그에 따른 투자로 ‘물건은 팔리지만 이익은 남지 않는’ 딜레마에 빠졌다. 최근 일본 기업들은 생산품목과 부품 숫자를 대폭 줄이고, 모델변경 기간도 늘려 잡는 ‘탈(脫)다품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품의 품목 줄이기, 모델변경 기간 연장하기, 공통부품 사용하기 등으로 비용을 줄이고,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일본에서 해마다 새로 나오는 자동차 모델은 평균 90종으로 40종인 미국의 갑절이 많다. 모델 숫자를 줄이면 공장 및 유통현장에서 재고가 줄고, 신모델 개발을 위한 설비투자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일본 닛산자동차의 경우 자동차 운전석의 계기판 종류만도 437가지고, 라디에이터는 110가지, 실내 카펫이 1200가지, 핸들은 87가지, 재떨이만도 300가지에 이르렀다. 결국 닛산의 디자인 부서는 모든 부품의 종류를 40%까지, 모델 종류도 35%까지 대폭 줄이도록 전략의 일대 전환을 단행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는 슬로건은 판매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품의 모델과 디자인을 자주 바꾸다 스스로 무덤을 판 자동차업계에서 이심전심으로 일고 있는 새로운 다짐이다.

    일본 가전업계도 모델이나 디자인을 자주 바꾸다 멍이 든 상태다. 마쓰시타는 90년에 내건 슬로건 ‘새로운 유형의 사고’ 대신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s)’라는 새로운 기치 아래 오디오와 카세트 등 각종 제품의 모델을 6000개에서 1000개로 줄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소니나 히타치와 같은 대형 가전업체들은 비디오카메라 한 품목에서만 매년 5∼6가지씩 신제품을 쏟아내는 경쟁에 몰두한 나머지 ‘소비자를 외면한 개발경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각 사는 소형화·경량화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지만 소비자들은 비디오 카메라를 휴가철에 한두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이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새로운 기능들을 활용할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제품의 전체 제조원가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랐다. 또 소비자 쪽에서는 모델과 디자인이 자주 바뀌자 “오늘의 신모델이 얼마 가지 않아 곧 구모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구매심리가 도리어 위축되기도 한다.

    오해 4- 고객지향의 관점은 장기적인 가치가 있다

    고객과의 선의(goodwill)를 위해 단기적이나마 이익의 희생을 감수하는 데는 실질적인 문제가 따른다. 다른 이해집단의 양해를 구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고객의 만족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주주나 하청업자 등 다른 이해집단을 등한히 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자칫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기업은 또한 치열한 경쟁 상황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의 아메리칸 모터스(AMC)는 승용차 부문은 시장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고 지프만이 크라이슬러에 흡수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회사의 실패는 고객관리를 장기적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자동차 기업들과의 경쟁에 직접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고객지향 마케팅을 추구하면 단기적으로는 부담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상받는다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는 고객지향 마케팅의 문제점을 두루 살펴보았다. 물론 고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쟁우위를 유지하며 기업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더 넓은 시야를 필요로 한다. 이렇듯 포괄적이며 실제적인 전략의 방향제시가 요구됨에 따라, 기업들은 마케팅 전략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전략형성의 핵심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기법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면 마케팅 전략의 핵심은 무엇인가.

    밑에서부터 짜 올라가는 마케팅 전략

    마케팅 전략은 밑에서부터 짜 올라갈 때 더 큰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장군만이 효과적인 전략을 짤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베트남에 가보지 않은 장군이 서울에서 베트남전의 전략을 짤 수 있겠는가?

    훌륭한 마케팅 전략은 고층 빌딩의 기획실로부터 나오는 것도, 한적한 리조트 호텔 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장바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마케팅 전략은 아래에서부터(bottom죚 up) 개발되어야지, 위에서부터(top죚down) 지시되어서는 안 된다.

    창업주가 처음 시작할 때는 의사결정이 바닥에서 이루어지지만, 기업이 커질수록 바닥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기 쉽다. 드러커(Peter Drucker) 교수는 한국기업들이 시장에서 멀어져가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은 가장 크게 성공한 H기업을 내다버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H기업이 시장에 밀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룹 차원의 결정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제너럴 모터스(GM)가 한창 발전을 거듭할 당시 경영진은 한 달에 일주일을 세일즈맨이나 서비스맨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재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세계석학에게 듣는다, ‘사회평론’ 1994)

    시장은 고객이 있는 곳이며 또한 경쟁자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전략적 의미에서는 경쟁자와 맞닥뜨리는 최전방을 전선(front)이라고 부른다.

    전략 담당자들은 전선으로 내려가 보아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러나 유능하다고 인정되는 전략 담당자일수록 다른 더 중요한 일이 많아서 “가 봐야지”하면서도 직접 전선에 가보지 못한다. 다만, 전선에 나가 본 것처럼 상상하여 기획도 하고 전략도 짠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더라도, 전선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마케팅 전략 형성과정에 매우 중요하다. 또 시장에 가서는 소비자의 불평에 귀를 기울여야지, 자기 생각을 단순히 확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판단하려 하지 말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자의 조그만 불평에서 마케팅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 전쟁은 마음의 전쟁

    마케팅은 ‘제품의 전쟁’이 아니라 ‘마음의 전쟁’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승용차간 경쟁이 엔진 크기와 마력수, 연료 효율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일본차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단연 혼다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혼다의 판매량이 도요타, 닛산에 이어 겨우 세 번째로, 도요타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마케팅이 제품만의 전쟁이라면, 미국에서든 일본에서든 판매 순위가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같은 제품이라도 이를 대하는 소비자의 마음이 다른 것이다. 70년대부터 수입이 늘어난 일본차 중 가장 먼저 미국 소비자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은 혼다의 시빅과 어코드라는 모델이다. 미국인들에게는 혼다가 ‘고장 안 나는 일본차’를 대표하는 셈이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혼다’ 하면 오토바이를 먼저 떠올린다. 혼다는 오토바이로 일본 사람들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오토바이 회사가 만드는 자동차를 은연중 꺼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펩시의 끈질긴 도전에 직면한 코카콜라는 새로운 제품을 내놓기로 결정한다. 철저한 시장조사 결과, 사람들이 더 달고 부드러운 맛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코카콜라가 창립 99년 만에 새로 만들어 낸 것이 뉴-코크였다. 코카콜라가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맛 테스트에서 뉴-코크는 기존 코크와 펩시를 젖히고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펩시에 이어 3등에 머문다. 반면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기존 코크는 맛 테스트에서는 3등이었지만, 시장에서는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음료수 마케팅 또한 맛의 전쟁이 아니라 마음의 전쟁임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다. 소비자들은 마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마케팅의 전쟁터는 바로 마음인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사실(fact)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눈에 편평해 보인다면(인식: perception), 나에게는 편평한 것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마케팅 상황에서의 진실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고객의 인식이 그야말로 진실이다. 기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여하튼 마케팅 전쟁을 치를 때는 고객의 인식이 진실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고객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디오 레코더 중에는 소니의 베타멕스가 VHS보다 더 우수한 기종이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VHS를 선택했다. 베타멕스는 이제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패자이고 VHS가 승자다. 제품의 진실된 품질이 어떠했든 언제나 승자가 더 좋은 제품으로 기록될 것이며, 그들은 또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마케팅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전쟁인 마케팅 전쟁에 승리해야 좋은 제품으로 평가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환경분석 내부분석 산업분석 경쟁분석 고객분석 등 각종 분석에 매달리는 경우를 본다. 과연 과학적인 분석 단계를 거친다면 마케팅의 성공이 보장될까. 많은 사례를 살펴보건대, 합리적인 과정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버나드 쇼는 “진보(progress)는 불합리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마케팅 조사를 잘하고, 치밀한 전략 기획을 수립한 회사가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좋은 마케팅 전략은 그 본질상 비정상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남을 설득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경영자의 사고방식에는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마케팅의 꽃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벤-프랭클린(Ben Franklin)이라는 할인점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교외에 사는 사람들이 유통비용 때문에 제품을 비싼 가격에 구매한다는 것을 알고 벤-프랭클린의 중역에게 지방 소도시에 할인점을 열 것을 제안하였다. 벤-프랭클린의 경영진은 상식에 벗어난 제안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5만 명 이하의 소도시에서는 할인 가격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자신이 1962년 아칸소의 조그만 도시에 첫 상점을 열었다. 30년 후, 이 상점은 42개 주에 걸쳐 1720개로 불어났으며, 해마다 150개 상점을 새로 열고 있다. 90년에 이미 세계 최대 산매점인 시어즈의 매출을 추월하였고, 97년에는 1000억 달러 이상을 판매하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이 상점이 바로 월마트(Wal-Mart)이며, 그 사람이 샘 월튼(Samuel Walton)이다. 월튼은 벤-프랭클린 할인점을 경영하는 유능한(?) 경영진의 상식을 뛰어넘었기에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현재 월마트가 영업을 하는 도시의 평균 인구수는 1만5000명이다.

    페더럴 익스프레스를 만든 프레드릭 스미스는 대학교에 다닐 때 이미 자기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는 매우 독특하였다. 중심축과 바퀴살로 된 수레바퀴 형태를 띤 우편배달체계였다. 즉 모든 우편물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직접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중심축(hub)에 해당되는 멤피스로 모이게 된다. 지리적으로 멤피스가 미국 전체의 중앙이 되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수거된 우편물은 당일밤 비행기에 실려 멤피스로 집결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수신지역별로 분류된다. 분류된 우편물은 멤피스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배달될 지역으로 떠난다. 이러한 방법을 쓰면, 어디서 어디로 우편물을 보내든 다음날 오전까지 배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일대학 시절 스미스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경제학 리포트로 제출하였을 때 그는 C학점을 받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실망하지 않고 그의 꿈을 추구하여 특급 속달우편 분야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업을 창출해 냈다.

    조사와 분석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밝혀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았다 해도 그 자체가 해결책은 아니며, 사실들을 대입하면 정답이 나오는 ‘전략 공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널리 신봉되는 그런 법칙이나 공식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깨부수는 데 오히려 승리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영국의 로렌스 중위가 12명의 아랍인을 프랑스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 아랍인들은 난생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하게 된 것인데 로렌스는 몹시 당혹스러운 사태에 부딪혔다. 아랍인들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좀처럼 나오려 하질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욕조에 들어앉아 있었으며, 외출했다가도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목욕을 즐기곤 하였다.

    흉내로는 이길 수 없는 마케팅 전쟁

    마지막 날, 짐을 꾸려 공항으로 떠날 차비를 모두 갖추었는데 아랍인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초조해진 로렌스는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나섰다. 그러다가 돌연 그들이 욕실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랍인들은 모두 욕실에서 수도꼭지를 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로렌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니, 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요?”라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했다. “수도꼭지를 가져가려고요. 아라비아에 가서도 목욕을 즐기게요.”

    벤치마킹을 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런데 수도꼭지를 가져간다고 해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듯, 겉으로 드러난 시스템을 흉내낸다고 해서 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마다 기질이 다르고 기업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의 경영기법에 대해 연구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미국 기업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문화적인 차이를 간과한 채 피상적인 기법만 흉내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대기업들은 정부의 여러 가지 보호와 혜택 안에서 성장해왔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이라 해도 한두 제품에 집중해서 커진 것이 아니라 갖가지 업종의 매출을 모두 합하여 대기업 반열에 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기업들이 ‘포춘’지가 선정한 100대 기업에 속하는 기업의 운영방식을 흉내내는 데 문제가 있다.

    월맹의 호치민이 자신의 게릴라 부대 요원을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서 훈련시켰더라면 오히려 전쟁에 졌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에게 걸맞은 전략과 전술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 대기업은 ‘포춘 100대 기업’들과 정반대 전략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마케팅 전쟁에서는 스타 플레이어보다 팀워크가 중요

    마케팅 전략은 그야말로 실전을 고려한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 기업 수준의 전략은 모방할 수 있을지라도 마케팅 전략은 흉내로 성공할 수 없다. 마케팅에서 성공의 열쇠는 창의성과 융통성임을 유념해야 한다.

    마케팅 전략에 있어 힘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는 전형적인 예는, 인재가 많으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다. 그렇다고 우수한 인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원들의 수준이 낮아 마케팅 전쟁에서 패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기업이 커지면 인재도 많이 들어오지만 전반적인 사원의 평균 수준은 점차 낮아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마케팅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창의력과 이를 수행할 구성원들의 팀워크다. 명문대학의 졸업장이 결코 창의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짝이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마케팅 전략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본다.

    스포츠에서는 경기시즌을 마친 후, 각 팀의 가장 좋은 선수들만 뽑아서 올스타전을 벌이곤 한다. 이러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팀은 전력이 매우 막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때가 많다. 스타 플레이어의 활약보다 팀워크가 훨씬 중요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전략을 수행할 때도 한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 활용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어떻게 하면 전체가 뭉쳐서 팀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팀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한 기업들은 기업문화 기업철학 사풍 등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을 전파하려고 애를 쓴다.

    서툰 경영자는 전략을 수행하는 데 흔히 적극성 내지 공격성을 강조한다. 제품을 하나라도 더 만들고, 판매원을 한 명이라도 더 늘려서 더 열심히 판매하고, 광고를 더 많이 내고, 회의를 많이 하고, 보고서와 자료를 더 준비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겨야겠다는 의욕과 집념만으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사원 결의대회를 하고, 무작정 열심히 뛰기로 다짐하는 것은 눈감고 아무 데로나 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머지 않아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의욕과 집념만 가지곤 안 된다

    경험이 많지 않은 유치원 보모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흥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즐거워진 아이들은 그 다음 좀더 큰 자극이 있지 않으면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극의 강도를 높이다 보면 보모도 지치고 아이들도 자극 수준이 충족되지 못해 짜증을 내게 된다. 반면 경험이 많은 보모는 아이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애쓴다. 그 차분함 속에서 교육도 이루어지고 아이들은 진정한 즐거움을 찾게 된다.

    요즘 어떤 기업들은 신바람 내는 것을 전략집행을 위한 기업문화 형성의 일환 인 양 생각한다. ‘신바람 대회’ ‘한마음 운동’ ‘신풍 운동’ 등을 내세우며 단합대회도 거창하게 치르지만,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마는 것은 웬일일까.

    신바람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 치료요법인 것이다. 신바람을 연거푸 일으킬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유치원생들을 계속 흥분시켜 기분을 돋우려는 것과 같다. 마음만 앞서서 분위기를 띄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마케팅 전략에서 창의력이나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을 신바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케팅 전략의 수행은 “우-” 하는 기분이나 밀어붙이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실천의 문제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경쟁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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