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내가 조선일보에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이유

  • 홍세화 작가

    입력2007-01-17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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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압살시키는 모순이 계속돼왔다.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고 칭했고 또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해 왔기 때문이다. 그 선두에 조선일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함이 없이 조선일보를 향해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 홍세화씨는 반(反)조선일보 측을 대표해 이 글을 썼다. 이를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자유민주주의와 극우파시즘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장이 열리기 바란다(편집실).》
    나는 99년 11월29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 “나를 고소하라!”고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발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꺼낼 소리가 아닐 것이다.

    실상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정해 주라는 똘레랑스(tole쳑ance:관용)를 무척이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버리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 근대사에서 보더라도 로크나 볼테르, 루소 등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사람들일수록 앵똘레랑스(intole쳑ance:불관용)와 과감하게 싸웠다. 조선일보는 앵똘레랑스를 부추겼다. 한국 사회에서 사상 검증이란 행위, 즉 ‘당신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빨갱이로 몰아가는 행위는 앵똘레랑스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함 없이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것이다.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것은 물론 내가 처음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리베라시옹’의 마티외 랭동 기자가 소설 ‘장 마리 르펜의 소송’을 통해 극우세력을 실명으로 비판해 화제가 됐다. 여기서 랭동 기자는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우두머리인 장 마리 르펜을 ‘살인자 집단의 수괴’ ‘인간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망령’ ‘피로 살찌는 흡혈귀’ 등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판했다. 르펜은 출판사와 랭동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승소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문인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100여명의 문인들이 문제가 된 네 개의 구절을 ‘리베라시옹’에 그대로 옮겨 쓴 뒤 “똑같이 쓸 준비가 돼있다”며 “그대로 썼으니 나를 고소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판에서는 최장집(崔章集) 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의 사상검증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를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라고 쓴 강준만 교수(월간 ‘인물과 사상’)와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 증상’이라고 쓴 정지환 기자(월간 ‘말’)가 명예훼손에 의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여기까지는 ‘한겨레신문’에서 이미 밝힌 내용이다.



    그후 한국에서는 네티즌들이 중심이 돼 ‘벌금 대신 물어주기(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지식인들이 앞장섰지만 한국에선 일반 시민들이 나섰다. 실로 기이한 대비라 하겠다.

    프랑스 극우세력은 왜 한국을 좋아하나

    내가 바라는 한국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우선 상식만이라도 통하면 다행이겠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극우 국민전선당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전선당의 당수인 장 마리 르펜은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가스실을 가리켜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꾸조차 하기 역겨운 극우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역사관이다. 그들은 또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고 멸시하고 혐오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정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극우세력의 선동에 쐐기를 박기 위해 부단히 싸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하여. 여기서 극우주의자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아, 한국요! 한국은 나의 이상향(mon pays id al)입니다!”

    전화 저쪽에서 반갑게 외친 사람은 브뤼노 골리쉬라는 사람이다. 그는 파리에 있는 어느 교포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참이었다. 한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꼽아주는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국민전선당의 제2인자이며 장 마리 르펜의 오른팔이다. 일본 여자를 아내로 둔 탓인지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국의 이인화’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비(非)백인들을 싸잡아서 혐오하고 멸시하는 국민전선당이지만 한국인은 좀 봐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프랑스 극우세력의 대표 인물 중 하나가 한국을 가리켜 이상향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국가보안법이나 준법서약제 같은 것도 그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일 것이다. 또 사상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것, 사상을 검증하는 신문이 가장 강력한 언론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사상을 검증한다는 데 지식인들조차 침묵함으로써 방조하고 그래서 한국 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사상 검증’이란 말은 중세 용어에 속한다. 극우세력의 사전에도 이 말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다른 점은 사회 안에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의 속성인 ‘배제의 논리’를 거부하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칼 포퍼의 말을 빌어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를 구분하면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차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보수 우파와 그렇지 않은 극우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당은 여타의 모든 정당들과 다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보수 우파 정당과 가장 앙숙이다.

    사상검증과 극우헤게모니

    한국에선 현대 정치사가 말해주듯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압살시켜온 모순이 계속됐다.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고 칭했고, 또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해 왔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조선일보가 보인 언론 왜곡의 역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공인이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가 조선일보에 의해 어떻게 지켜졌는지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세계 유일무이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헌정 질서를 문란시켰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장기집권하다가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대한민국의 국부(國富)로 추앙하고, 독재자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켜주었다. 조선일보는 일본 육군장교 출신이며 남로당원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게는 그네들처럼 일제의 적자(適者)라는 정실주의에 입각해 사상 검증을 면제해 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빛내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신독재에 대해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해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켜주었다. 드디어 광주에서 ‘어슬렁대던 폭도’(김대중 당시 기자의 표현. 현 주필)들을 진압한 전두환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한 ‘전군 지휘관 회의’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일반 국민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일보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켜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독재 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셈이다. 조선일보가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위해 사상을 검증해준 덕이 참으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역사의 뒤틀림은 프랑스 극우파의 역사관 못지 않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왜 이처럼 극우 헤게모니에 매달리는가. 궁극적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권력과 부의 계속적인 확대 유지에 있다.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한 주무기가 ‘안보상업주의’라는 것인데 지금까지는 아주 잘 먹혀왔다. 안보상업주의는 한국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힘을 주었다. 따라서 극우 헤게모니의 관철은 조선일보의 조직논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도 조선일보의 활약은 계속되고 있다. 극우 인사 중 대표격인 정형근 의원과 아주 의견이 잘 맞는다. 김대중 주필의 활약 또한 눈부시다. 그가 최근에 쓴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이라는 칼럼을 보자. 제목부터 무시무시하다.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이라! 여기서 간첩이란 서경원 전의원을 말하며, 공안이란 당시 서의원과 김대중씨를 연결시키기 위해 고문을 일삼고 은행 전표를 슬쩍 감춘 공안팀을 말한다. 김주필은 이에 대해 “이유가 어쨌건 상황의 줄거리만 보면 주객이 보따리를 바꿔서 진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도를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가 어쨌건’이라… 나에겐 그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 ‘가치관의 전도’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적으로 그리고 마음대로 고문할 수 있었던 3공 때나 5공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한이 용공조작과 지역감정이라고 실토한 김대통령은 그 한의 한자락을 풀려다가 거꾸로 김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이 사회에 용공성이 점증하고 있다는 보수적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형국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보수적 시각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시각을 말하는 것일까. 국가보안법 개정에 극력 반대하면서 극우 헤게모니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조선일보의 시각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헤게모니’라는 말이 수없이 나왔다. 원래 이 말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 이론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주도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한데,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여기선 필요도 없을 듯하다. 헤게모니 외에 그람시 이론에 자주 나오는 말로 ‘기동전’과 ‘진지전’이 있다.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 검증을 한창 벌일 때의 일이다. 지금은 ‘몽골기마민족론’으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는 최장집 교수를 그람시주의자인양 암시하면서 사상 검증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의 논지인즉, 그람시는 좌파들에게 상황이 불리할 때에는 사회 곳곳에 진출해 진지전을 펴다가 결정적인 순간 기동전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라고 가르쳤는데, 최장집 교수가 바로 그람시주의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실로 그람시 이론을 거꾸로 적용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게 바로 조선일보이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조선일보에 어떻게 체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조선일보라는 매체와 자신의 메시지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은 특히 이 부분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우선 조선일보는 ‘한국논단’처럼 계속 해서 기동전을 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는 솔직하게 자신이 극우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덤벼들지도 않는다. 오직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끼칠 사건이나 인물만 찾아 공격한다. 심지어 조선일보가 극우임을 까발리는 사람들에 대해 쇠귀신처럼 상대하지 않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이 극우 헤게모니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아주 철저한 것이다.

    한편,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교묘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평소 광범위한 전선에서 주로 대중 상대의 진지전을 펴고 필요할 경우에 한해 기동전을 편다면, 조선일보는 진지구축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면 일시에 모든 매체가 합세하여 기동전을 편다. 즉, 기동전을 펼 때에만 극우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소동을 통해 조선일보가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보자. 최교수가 교수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는 그를 사상 검증하지 않았다.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준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에 정책기획위원장으로 들어감으로써 극우 헤게모니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자 ‘월간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했고, 조선일보까지 가담해 총력전을 벌였다. 그것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힘의 과시였으며 경고였으며 또한 시험이기도 했다.

    그러면 평소 조선일보의 진지는 누가 구축해 주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에서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이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지식인(intellectuel)’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였다. 극우 쇼비니즘, 반유태주의에 반대하고 드레퓌스 옹호파로 등장했던 세력이 바로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거꾸로 지식인들이 극우 세력의 진지를 구축해주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매체가 부르는 손짓에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수나 전문가들은 그 분야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 같아 달라붙고 문인, 예술가들은 가치를 인정받고 유명세를 타기 위해 달라 붙는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권력이다. 시쳇말로 조선일보가 한 번 띄워주면 책도 잘 팔리고 유명해진다. 유명해지는 것으로 인간적인 가치가 올라가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 아닌가.

    그리하여, 한국의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인터뷰에 응하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지식인, 문화인들은 극우 군단의 외곽을 화려하게 장식해준다.

    이렇게 지식인들, 문화인들을 불러들여 권위와 가치를 인정해주고 유명세를 타게 해주는 대신 조선일보는 두 가지를 획득하고 있다. 첫째, 장식부대를 통하여 극우적 성격을 감춘다. 그것은 문화면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둘째, 극우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기동전을 펼 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건 지원군을 획득한다. 앞으로 있을 기동전을 위해 평소에는 장식부대와 지원부대 편성에 주력하는 것, 이것이 그람시가 조선일보 속에 체현된 모습이다.

    ‘아가리를 열어라’

    프랑스 지식인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점잖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튀는 행동’을 싫어하고 튀는 사람을 은근히 경멸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사회 명사로 기억되고 싶어하며, 따라서 누구로부터도 비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비론이 번창하고 직설적인 비판과 논쟁을 보기 어렵다. 한 마디로, 싸우기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 지식인들의 점잖음에서 사회적 명예는 보이는지 모르나 사회적 책임은 볼 수 없다고. 나는 비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극우와 싸우지 않으면서,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진보 양당체제로 가야 한다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지식인들을. 지금 극우와 싸우지 않으면서 리얼리즘이니 민족문학이니 민중문학을 말하는 문화인을, 시민운동이니 사회운동을 말하는 운동가를, 여성해방을 말하는 여성운동가를, 통일을 말하는 통일운동가를, 탈정치니 문화연구니 떠드는 문화연구가를 나는 마음껏 비웃을 것이다.

    최근 ‘르 몽드’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양철북’의 작가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의 대담을 실었다. 대담 제목부터 점잖지 않게 ‘아가리를 열기’였다. 그런데, 피에르 부르디외의 다음 말은 마치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그대로 지적하는 것 같아 옮겨 본다.

    “공인되고 잘 알려진 사람들 외에는 공론의 장에 다가가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내가 이 대담을 시작하면서 당신에게 ‘아가리를 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은 오직 공인된 사람들만이 이 서클을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점잖고 말없는 사람들만 공인되고 또 계속 점잖고 말 없도록 공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언하기 위해, 단지 발언하기 위해,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내기 위해, (사회가) 인정해준 상징적 자본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이렇게 화답했다.

    “독일문학계의 젊은 세대들은 계몽주의에 내재한 전통, 즉 ‘아가리를 열고’ 참여하는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사도 흥미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침묵하고 있는 지식인들을 비판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극우 헤게모니의 문제는 없다. 다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까지 에둘러 갈 것인가. 이젠 극우 헤게모니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새천년에는 우리 모두 점잖기를 거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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