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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조선일보’ vs ‘인물과 사상’의 논쟁

내가 조선일보에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이유

  • 홍세화 작가

내가 조선일보에 ‘나를 고소하라’고 외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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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헤게모니’라는 말이 수없이 나왔다. 원래 이 말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 이론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주도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한데,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여기선 필요도 없을 듯하다. 헤게모니 외에 그람시 이론에 자주 나오는 말로 ‘기동전’과 ‘진지전’이 있다.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 검증을 한창 벌일 때의 일이다. 지금은 ‘몽골기마민족론’으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는 최장집 교수를 그람시주의자인양 암시하면서 사상 검증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의 논지인즉, 그람시는 좌파들에게 상황이 불리할 때에는 사회 곳곳에 진출해 진지전을 펴다가 결정적인 순간 기동전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라고 가르쳤는데, 최장집 교수가 바로 그람시주의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실로 그람시 이론을 거꾸로 적용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게 바로 조선일보이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조선일보에 어떻게 체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조선일보라는 매체와 자신의 메시지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은 특히 이 부분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우선 조선일보는 ‘한국논단’처럼 계속 해서 기동전을 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는 솔직하게 자신이 극우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덤벼들지도 않는다. 오직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끼칠 사건이나 인물만 찾아 공격한다. 심지어 조선일보가 극우임을 까발리는 사람들에 대해 쇠귀신처럼 상대하지 않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이 극우 헤게모니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아주 철저한 것이다.

한편,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교묘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평소 광범위한 전선에서 주로 대중 상대의 진지전을 펴고 필요할 경우에 한해 기동전을 편다면, 조선일보는 진지구축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면 일시에 모든 매체가 합세하여 기동전을 편다. 즉, 기동전을 펼 때에만 극우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소동을 통해 조선일보가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보자. 최교수가 교수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는 그를 사상 검증하지 않았다.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준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에 정책기획위원장으로 들어감으로써 극우 헤게모니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자 ‘월간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했고, 조선일보까지 가담해 총력전을 벌였다. 그것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힘의 과시였으며 경고였으며 또한 시험이기도 했다.

그러면 평소 조선일보의 진지는 누가 구축해 주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에서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이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지식인(intellectuel)’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였다. 극우 쇼비니즘, 반유태주의에 반대하고 드레퓌스 옹호파로 등장했던 세력이 바로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거꾸로 지식인들이 극우 세력의 진지를 구축해주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매체가 부르는 손짓에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수나 전문가들은 그 분야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 같아 달라붙고 문인, 예술가들은 가치를 인정받고 유명세를 타기 위해 달라 붙는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권력이다. 시쳇말로 조선일보가 한 번 띄워주면 책도 잘 팔리고 유명해진다. 유명해지는 것으로 인간적인 가치가 올라가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 아닌가.

그리하여, 한국의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인터뷰에 응하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지식인, 문화인들은 극우 군단의 외곽을 화려하게 장식해준다.

이렇게 지식인들, 문화인들을 불러들여 권위와 가치를 인정해주고 유명세를 타게 해주는 대신 조선일보는 두 가지를 획득하고 있다. 첫째, 장식부대를 통하여 극우적 성격을 감춘다. 그것은 문화면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둘째, 극우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기동전을 펼 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건 지원군을 획득한다. 앞으로 있을 기동전을 위해 평소에는 장식부대와 지원부대 편성에 주력하는 것, 이것이 그람시가 조선일보 속에 체현된 모습이다.

‘아가리를 열어라’

프랑스 지식인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점잖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튀는 행동’을 싫어하고 튀는 사람을 은근히 경멸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사회 명사로 기억되고 싶어하며, 따라서 누구로부터도 비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비론이 번창하고 직설적인 비판과 논쟁을 보기 어렵다. 한 마디로, 싸우기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 지식인들의 점잖음에서 사회적 명예는 보이는지 모르나 사회적 책임은 볼 수 없다고. 나는 비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극우와 싸우지 않으면서,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진보 양당체제로 가야 한다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지식인들을. 지금 극우와 싸우지 않으면서 리얼리즘이니 민족문학이니 민중문학을 말하는 문화인을, 시민운동이니 사회운동을 말하는 운동가를, 여성해방을 말하는 여성운동가를, 통일을 말하는 통일운동가를, 탈정치니 문화연구니 떠드는 문화연구가를 나는 마음껏 비웃을 것이다.

최근 ‘르 몽드’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양철북’의 작가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의 대담을 실었다. 대담 제목부터 점잖지 않게 ‘아가리를 열기’였다. 그런데, 피에르 부르디외의 다음 말은 마치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그대로 지적하는 것 같아 옮겨 본다.

“공인되고 잘 알려진 사람들 외에는 공론의 장에 다가가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내가 이 대담을 시작하면서 당신에게 ‘아가리를 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은 오직 공인된 사람들만이 이 서클을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점잖고 말없는 사람들만 공인되고 또 계속 점잖고 말 없도록 공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언하기 위해, 단지 발언하기 위해,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내기 위해, (사회가) 인정해준 상징적 자본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이렇게 화답했다.

“독일문학계의 젊은 세대들은 계몽주의에 내재한 전통, 즉 ‘아가리를 열고’ 참여하는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사도 흥미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침묵하고 있는 지식인들을 비판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극우 헤게모니의 문제는 없다. 다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까지 에둘러 갈 것인가. 이젠 극우 헤게모니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새천년에는 우리 모두 점잖기를 거부하자.

신동아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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