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병익씨가 몇 년 전 남미에 갔을 때 일이다. 페루의 한 문학 행사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소회를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는 산문집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들(남미 사람들)에게 있어 한국이란 발전되었지만 경제적 동물 이상의 나라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곳 문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네들은 한국에 대해 대우와 현대를 아는 정도로 끝나지만 우리는 당신네들의 경제를 모르는 대신 네루다를 알고 존경한다. 이 잘못된 거래는 해소되어야 한다.”
남미에 가면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할 만큼 한국이 무척 커 보인다. 칠레의 산티아고에 굴러 다니는 승용차 넉 대 중 한 대는 한국 자동차고 대우는 페루에서만 한 해 5000대의 자동차를 판다고 한다. 안데스 산맥의 오지인 푸노 거리에 티코가 돌아다니고 아마존의 정글도시에서도 효성의 오토바이를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공항에는 삼성 LG의 광고가 커다랗게 걸려 있고 국도변에는 현대와 대우 혹은 금호 타이어의 선전탑까지 서 있으며 산티아고의 진열장에는 소니와 함께 LG 텔레비전이 비싼 값으로 진열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다른 숱한 나라들, 대륙들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을 마주하여 그림자가 서로 반대로 지고 별자리가 전혀 다른 이 남미의 나라들에도 그 손길을 뻗쳐 휘젓고 있고 한국 상품들이 리마의 우범지역을 쑤시고 다니고 고급 식당의 시설품으로 장식되고 있으며 그런 움직임과 물건들을 통해 한국이 다른 역사와 인종과 언어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고유의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어떨까? 불국사와 석굴암,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한글과 김소월을 그들은 모른다.
한국정신의 부활
‘세계 속의 한국’도 예전 같진 않지만 한국인 하면 경제 동물을 떠올리고 한국하면 삼성이나 현대 대우만을 떠올리는 세계 사람들의 시각은 이해할 만하다.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는 신흥 졸부들이 속출하고 너도나도 주식시장으로, 코스닥으로 몰려가고 경제와 돈만이 21세기의 키워드가 되는 요즘 현실에선 문화와 정신을 거론하는 일조차 낯설다. 심하게 말해서 불교 유산을 비롯한 5000년 문화 전통이란 흡사 6·25 때 고생담 정도에나 비유될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기자는 올 여름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한국 정신의 부활을 경험했다.
다름아닌 미국 하버드대학 옆 케임브리지 젠센터(Zen Center)에서였다. 그곳은 한국 불교의 선승 숭산(崇山) 행원(行願) 큰스님이 1970년대 후반에 세운 참선방이다. 4층짜리 아담한 건물을 사서 만들었다는 이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석굴암 사진이 눈에 띈다. 방 정면에는 큰 불상이 앉아 있었고 옆 벽면에는 경허(鏡虛), 만공(滿空) 등 한국 선불교의 맥을 잇는 고승들 사진이 죽 걸려 있었다. 복도 곳곳에는 한국도자기와 나무원앙새 등 메이드 인 코리아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실내는 모두 방석을 깔아놓는 좌식(座式)으로 꾸며졌으며 입구에는 큰 신발장도 눈에 띄었다. 언뜻 보아서는 한국인지 미국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하버드와 예일대생들을 비롯, 인근 보스턴의 샐러리맨 100여명이 오가면서 참선수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곳에서 60명 정도는 아예 먹고 자고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고 참선수행과 일상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 최근 미국에 선풍적으로 일고 있는 불교 열풍을 새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그 열풍 한가운데 한국 불교가 서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국 불교를 세계화한다는 것은 곧 한국 정신을 세계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김병익씨가 지적했던 ‘불공정한 거래’가 이제야 해소되는 것 아닌가 하는 희열까지 느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 조실 숭산행원 선사.
요즘 노자사상의 전도사로 나선 도올 김용옥 선생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최근세 조선 선종(禪宗)의 종맥(宗脈)을 따지자면 경허 만공의 거맥(巨脈)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에 우리 귀에 익숙한 고승 대부분이 이 경허―만공맥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만공 문하 고봉의 수제자로 숭산 행원이라는 인물이 있다. 내가 다녔던 한국신학대학 뒤켠 물 건너 수유리 우이기슭에 있는 화계사의 큰스님으로서 참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숭산 스님을 하버드 다닐 때 케임브리지 어느 허름한 미국집 안방에서 만났다.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할 정도였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들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그 학생 이름은 베키였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대학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도올이 미국에서 만난 ‘쑹싼쓰님’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절대적이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싼쓰님’을 만나 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 ‘쑹싼쓰님’이란 분이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딱 정해진 날만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까 그때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키 말에 따르면 ‘쑹싼쓰님’ 달마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 학생 수백명이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적(邪敎的)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에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디일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무적 김용옥도 이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임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부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시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 구속된다는 뉴스로 시끌벅적하던 지난 12월4일 토요일 오전. 기자는 서울 수유리 화계사로 숭산스님을 만나러 갔다. 과연 그는 동자승처럼 환한 미소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낯익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흔히 고승 하면 연상되는 위압감이 그에게는 없었다. 6개월 전 화계사에서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보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여독과 지병인 당뇨병이 겹쳐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힘이 넘쳐 흘렀다. 이야기 내내 그는 너털웃음을 여러 번 터뜨렸고 시종 밝은 미소로 인터뷰에 응했다.
“과밀인구가 문제의 근원”
이날 인터뷰는 숭산 큰스님의 미국인 제자로 큰스님 비서를 맡고 있는 무심 스님의 안내로 큰스님 방에서 이뤄졌다.
―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요즘 몸이 좀 시원찮아서.”
― 요즘 괜찮으세요?
“예,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요.”
― 이제 2000년이 며칠 안 남았다고 세상이 들썩들썩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에… 우리가 2000년, 2000년 하는 것은 인간 생각을 중심으로 카운트해서 2000년인데, 불교 원리로 따져 볼 때에는 본래 시간 공간이라는 게 없는 것이거든. 그런데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1년, 1년 규정한 것이 2000년이야. 따지고 보면 2000년도 예수님 탄생시작을 기준으로 해서 2000년이지 우리 불교로 따지면 2500년이고 단군으로 따지면 4000년이라. 그러니까 뭐 꼭 2000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없는 거여. 다만 사람들이 어쨌든 새로운 세기니까 2000년대에는 무슨 변화가 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변화는 이미 시작됐어. 소련이 붕괴됐잖아. 이제 공산주의 민주주의하는 것이 다 무너졌어. 그 얘기는 뭐냐, 사상이 없어졌다는 얘기야. 인간이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어. 요새는 전체가 다 ‘경제’‘경제’해요. 경제는 개가 똥덩어리를 좇아 가는거나 마찬가지여. 개가 똥덩어리를 좇는 거나 사람이 ‘경제’‘경제’ 하는 거나 똑같단 말이야.
그러면 2000년대에 무엇을 할 것이냐. 우리 방향을 찾자 이거여.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을 좀 찬찬히 봐야혀(이 대목에서 그는 약간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이 땅에 인간이 너무 많이 살고 있는 게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해. 1945년 광복하던 해 전체 지구 인구는 한 20억 됐어. 그런데 겨우 5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날은 60억이나 된다구. 수천년 동안 인간 역사 중에서 이렇게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때는 없었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게 하나도 없어. 어떤한 원인이 있었기에 갑자기 이렇게 인구가 팽창했느냐. 이것을 알아야 해.
그저 현상에만 급급해서 ‘돈’‘돈’ ‘경제’‘경제’ 하지 말고 사회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에 이 지구상에 평화란 것이 돌아와. 우리 인간은 지구에 살면서 너무 독재가 심해. 동물을 죽이고 산야를 훼손하고 우주에 로켓 쏘고 대기오염시키는 등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제일 악질 동물이라. 그런데도 아직 각성을 못 하고 있어. 우리가 나쁜 사람들한테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욕하는데 그건 사람행동이 개 소 말 같아서 하는 말이야. 동물이나 다름없거든. 이 시대에 인간이 좀더 각성을 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인간 사회를 리드하는 것이 우리 같은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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