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곳간이 차야 예의를 안다’는 옛말이 있다. 생물학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이에게 여유니 보람이니 하는 ‘배부른 얘기’가 먹혀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곳간이 차야 알 수 있는 게 어디 예의뿐인가. 인간의 정신적 허기를 달래주는 문화 역시 수용자나 제공자나 곳간이 차지 않고는 영위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IMF를 통해 제조업 시대의 패러다임이 일대 곡절을 겪은 우리 사회에 그 대안의 하나로 문화가 ‘뜨고’ 있다. 진원지는 정부다. 세종로 청사 위에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는 구호를 걸어놓은 문화관광부는 드디어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문화예산 1% 확보라는 숙원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지금 뜨고 있는 주제는 정확히 말해 문화가 아니라 ‘문화산업’이라고 해야 옳다. 몇 년 전 청와대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영화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50만대 수출대금과 맞먹는다는 얘기가 나와 관료들의 잠을 깨운, 그리하여 최근에는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자 ‘무공해 고부가가치산업’ 대접을 받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평소 문화의 중요성을 쉼없이 언급해온 김대중 대통령도 문화의 날인 10월 20일 문예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문화는 곧 돈’이란 요지의 치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문화창조력은 경제의 핵심”, “새로운 세기에는 한 나라의 문화 역량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국가적 위상이 결정될 것”이라며 문화계 인사들의 활약을 주문했다. 문화산업에 걸고 있는 국가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것이다.
애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이란 책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한 문화산업은 ‘문화의 산업화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산물’이란 부정적 시각이 담긴 용어였다. 이들은 문화산업이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대중의 욕구를 조작함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관철시키는 반계몽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화가 가진 경제적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문화의 산업화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기술 제일의 시대였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는 독창적인 문화 전략 없이는 물건을 팔 수 없는 시대로 전망된다. 바야흐로 문화산업 키우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을 찾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신동아’는 문화 상품화의 방법론을 모색하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 인프라를 점검하기 위해 ‘경영마인드’로 무장한 문화계 인사 3인이 대담을 가졌다. 허다한 문화 장르 중에서 공연 가요 영화 세 분야에서 대담자를 선택한 것은, 이들 분야가 다른 장르에 비해 대중의 접근과 이해가 용이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꿈 공장의 사람들
홍사종 :문화와 산업이 만나는 접점이 어디인가는 문화가 대중의 일상 속에 침투된 과정이 잘 보여줍니다. 유럽에서 르네상스 이전까지 순수예술이란 존재하지 않았지요. 수요가 없었으니까요.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나 베네치아의 영주들에 의해 발레와 오케스트라, 오페라 같은 예술 장르가 태동했고, 이것이 점차 귀족들의 놀이공간인 살롱으로 넘어왔다가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극장과 공연장이 생겼지요. 이 점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화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인택 :이제는 음반 한 장, 영화 한 편이 얼마를 벌어들였다는 차원에서만 문화산업을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90년대 후반 들어 벤처기업의 돈줄인 창업투자사들이 영화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쉬리’를 만든 강제규필름과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가 곧 코스닥에 등록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문화산업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꽃이라고 불리는 벤처산업 가운데서도 가장 앞선 산업이 된 것이지요.
홍사종 :이런 비유는 어떨까 싶군요. 생산요소적 관점에서 볼 때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공장을 위한 토지가 있어야 돼요.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만든 빈 테이프 한 개는 원가 600원, 여기에 300원의 마진을 붙여 나갑니다. 그런데 빈 테이프를 900원에 사다가 조수미나 H.O.T의 노래를 담으면 5000원에 팔리죠. 4100원이 부가가치예요. 이건 노동과 자본, 토지가 집중적으로 투자돼야 부가가치가 나온다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산장수가 짚신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산업 분야가 어려울 때 문화 산업은 국가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산업이 되는 것이지요.
이수만 :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군대를 키웠지만, 지금은 가수와 영화배우를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40대 이상 되는 이들은 대개 백인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요. 영화에서 백인을 멋있게 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댄스 가수는 우리가 외국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고. 이건 뭐냐 하면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런 자신감이 여러 문화 분야에 차곡차곡 쌓이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크지요.
홍사종 :저는 문화산업을 단순히 돈을 버는 사업이라기보다 꿈을 주는 산업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있는 극장 얘기 좀 할게요. 97년 12월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다음해 공연 걱정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공연시장이 다 죽어버렸는데 국가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왔으니 앞길이 막막했죠. 그때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를 떠올렸어요. 미국 공황기에 빈한한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을 보면 1달러 때문에 살인까지 할 정도로 극에 몰린 이들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에 뭐가 있습니까, 꿈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빈한한 노동자가 금광을 발견해서 부자가 되고, 평범한 사람이 공주를 만나서 사랑도 하지요. 저는 꿈을 파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일수록 더 경쟁력이 있다라고 거꾸로 생각했어요. 물건은 안 사도 꿈은 산다는 거죠. 그래서 극장의 공연횟수를 더 늘렸고, 그 결과 98년 공연수입 매출이 전년보다 40% 신장했어요.
한국적인 상품, 세계적 상품
80년대 북유럽의 스웨덴에는 세 가지 국가적인 보물이 있었다. 볼보자동차, 테니스 스타 비요른 보리, 그룹 아바가 그것이다. 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워터루를 불러 대상을 차지하며 떠오른 아바의 음반판매 수익은 절정기에는 볼보의 수출 수익을 앞질렀을 정도. 장르를 돌아가며 찾아보면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문화가 가진 잠재력은 경제적 이익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만화영화를 보고 자라 록그룹 X재팬의 음악에 열광하고 헬로키티 캐릭터로 자신의 장신구를 치장하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한결 엷어졌다는 사실은 문화가 가진 ‘만능키’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산업디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역사가 물려준 창의력이 디자인 경쟁력으로 전환돼 패션, 가구, 자동차 등 산업 전분야에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다.
지난 98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의 경제 위기를 독창적인 문화의 개발과 전파의 실패’에서 찾고 ‘한국 상품의 최대 약점은 이미지가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급 브랜드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인 우리로서는 아픈 훈수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이미지는 무엇이며, 또 우리는 외국에 무엇을 팔아먹을 것인가.
유인택:저는 문화가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얘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90년대 초 중국이 개방된 이후 중국을 다녀온 많은 관광객들은 중국이 우리보다 30년쯤 뒤떨어졌다고 얕잡아봤습니다. 그러나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탄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다시 보게 됐어요. 마찬가지로 유럽사람들한테 당신 한국 영화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딱 하나,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얘기해요.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유럽 영화계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확실히 달라요.
홍사종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씀이신데, 비슷한 사례는 ‘난타’와 ‘명성황후’의 성공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난타’ 같은 경우는 에딘버러 축제에 가서 100만달러 계약을 하고 왔을 정도입니다. 이런 공연의 흥행성공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키는 한편으로, 우리 문화가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수만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한국적인 것에 매달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화 상품을 얘기하면서 주체의식, 혹은 민족주의와 연결시키려는 발상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TV를 안 본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프랑스를 닮아야 할까요. 이렇게 되면 국민의 문화향유에서 텔레비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우리의 여건으로 보아 문화 전체가 도태할 가능성도 있어요.
유인택 :제 경험담을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90년대 후반 들어 몇 차례 해외 합작을 시도한 일이 있습니다. 폴란드하고 ‘이방인’이란 영화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이재수의 난’을 프랑스와 합작했지요. 이들 영화 전에 만든 게 호주와 합작해 ‘현상수배’란 영화입니다. 당시 저는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한국 영화를 해외에 팔려면 언어의 장벽이 있으니 영어로 가야겠다. 영어권에서는 자막을 읽기 싫어하거든요. 프랑스 같은 경우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자막을 치지 않고 더빙을 합니다. 자막처리해서 외국영화를 보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둘째, 상품으로 국경을 넘으려면 백인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배우는 박중훈 한 사람에다가 나머지는 전부 호주 사람들로 썼단 말이죠. 그 다음에 국경과 인종을 떠나서 공통적으로 다 좋아하는 영화장르를 생각했어요. 바로 액션과 코미디입니다.
이렇게 기획해서 만든 게 ‘현상수배’라는 영화인데, 결국은 제가 착각을 했더라구요. 어느 나라나 코미디는 좋아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코미디가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성공하더라도 한국에 와서 실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챙기지 못한 거예요. 외국 관객들에게 한국의 멜로영화라든가 어설픈 액션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늘상 보아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보다는 같은 사랑을 다룬 영화를 하더라도 한국적인 것, 못 봤던 것이 먹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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