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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마니아의 세계|김갑수 시인의 오디오

나만의 소리 찾아가는 ‘바꿈질’의 즐거움

  • 김갑수 시인·음악칼럼니스트

나만의 소리 찾아가는 ‘바꿈질’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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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를 들어보자. LP를 듣기 위해 고심 끝에 티타늄 재질의 톤암을 구하고 저임피던스의 MC형 카트리지(바늘)도 구하고 호사스러운 영국제 승압 트랜스도 구비하고 마침내 플로팅형의 육중한 벨트 드라이브 턴테이블도 구비하게 됐다. 이제 계측기를 동원해 부품간의 오버행과 앤티스케이팅과 무게추를 맞추고 조절하여 음악만 들으면 되는가.

아니다. 이제부터 또 시작되는 일이 있다. 플레이어의 세팅 방법이 대두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진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인슐레이션(받침)이 관건이다. 턴테이블을 받쳐주는 인슐레이터를 세라믹콘이나 블랙 다이아몬드 같은 초강성 재질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사람들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소보탄 같은 물렁물렁한 재질로 진동을 흡수시킬 것인가. 단단한 콘으로 받칠 때 뾰족한 접촉면을 턴테이블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바닥 쪽으로 할 것인가. 콘을 받칠 때 다소 불안정하지만 방진효과가 탁월한 3점 지지로 할 것인가, 안정되게 4점 지지로 타협할 것인가.

이렇듯 오디오장 위에 턴테이블을 올려놓는 방법만으로도 여러 가지 다른 음향효과를 자아내는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니 전체 시스템에서 ‘구사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다양하고 많겠는가. 빨리 음악부터 듣고자 하는 씩씩한 사람들은 웬만한 과정은 건너뛰지만, 뭐 좀더 좋은 일이 없나 해서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는 호사가형 인물이라면 날밤을 새워가며 소리의 터럭 한 오라기를 제거해내고 닦고 죄고 기름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디오는 자기가 만든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이른바 ‘원음 추구’라는 것도 이 동네에서 오래된 토론거리다. 잘 튜닝된 연주회장에서 뛰어난 연주자들이 훌륭한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음악감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일생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극성스럽게 저녁마다 공연장을 전전하는 존경스러운 음악 애호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방에 틀어박혀 연주회장을 그리며 앰프에 불이나 지피기 마련이다.

그러면 오디오파일(오디오 애호가)들은 밥 대신 라면을 먹는 심정으로, 공연장 사운드의 마이너 대체물로 오디오를 접한다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이제 그런 발상은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젠 생음악과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연주회장에서는 노이즈도 디스토션도 없는 무결점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를 극복할 수는 없다. 반면에 오디오를 통해서는 최고의 음악가를 최고의 레코딩을 통해 팬티 한 장만 입고 앉아(이건 나만의 취미생활이다)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음반에는 레코딩 엔지니어를 존중하여 크레딧에 ‘레코디스트 누구’라고 기록을 남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울러 재생음악이 독자성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CD 같은 디지털 음원에서 가능한 극단의 재현능력을 들 수 있다. 어쩌다 처음 고급 첨단 오디오(‘하이엔드’라고 부른다)를 접하게 된 사람이라면 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다 튀어나오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피아노를 두드리는 연주자의 손톱이 살짝 건반에 긁히는 소리, 바이올린 연주에서 활을 움직일 때 나는 미세한 바람소리, 조심스레 숨을 멈추거나 내쉬는 소리, 없는 듯하면서도 수런수런 느껴지는 공기의 느낌과 울림…. 재즈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담배연기 소리’를 가장 즐긴다나.

하여튼 약간은 편집증적이다 싶게 별별 소리가 다 튀어나오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되 하여간 재미를 더해 주는 건 사실이다. 아울러 공연 현장에서는 시각적인 자극이 커서 신경이 다소 분산되는 반면에 오르가즘을 느끼기에는 오디오 같은 집중성 높은 도구가 더 이로운 면이 있다고 (나 혼자) 생각한다.

이제 내가 갖고 있는 시스템을 소개할 차례 같다.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얼마나 어렵게 일을 저질러 왔는지 늘 돈 궁상을 떨어댔지만, 이젠 그런 말로 면피할 단계도 지난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보증금 300만원짜리 월세 자취방에 살 때 4000만원이 넘는 오디오를 사용했고, 화장지 살 돈이 없어서 한 보름쯤 아침마다 샤워로 뒷일을 도모했던 바로 그때에도 음반은 덥석덥석 사들여 오는 식으로 살아왔다.

300만원짜리 월셋방의 4000만원짜리 오디오

고급 기종이 늘어선 내 방을 들여다보고 “야, 너 참 부자다”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밀곤 했다. 좋은 옷에 기름진 식사에 자동차에 아파트 부금까지 부으며 사는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당신은 내의와 양말 따위를 매형이 버리려던 걸 얻어다 해결하지는 않았잖은가. 아파트 입구의 헌 옷가지 버리는 통을 당신은 뒤져보기나 했는가.

헌데 궁상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상황에는 꽤 변화가 생겼다. 특히 근래에는 방송 일을 많이 하니까 재미있는 오해도 따른다. 얼마 전 용산전자상가의 잘 아는 가게를 아주 오랜만에 갔더니 거기 영업부장께서 몹시 반색을 하며 첼로사의 유명한 앰프인 퍼포먼스Ⅱ를 구입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참으며 얼마에 줄 수 있느냐고 점잖게 물었더니 그이 왈 “우리 김선생님이시니까 특별히 5600만원까지 해드리죠”라고. “거 좀 생각해 보죠 뭐.” 우하하하하!

하여간 오디오란 참 값비싼 물건이다. 그 바람에 속칭 ‘노오픈’ 또는 ‘곤뽕’이라고 부르는 새 물건을 사본 적은 별로 없는 대신, 가격 산정이 다소 모호한 중고 물건을 두고 가게주인과 서로간에 포커페이스를 하고서 거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심리학적인 흥정의 사투를 벌이는 데는 꽤 이골이 나 있다.

그들 중에는 앞통수 뒤통수 다 쳐서 사람 허탈하게 만드는 선수들도 있지만, 과거에 회사생활 할 때 상장 전의 우리사주 주식을 장차 오를 가격을 전제로 몽땅 받아준, 신의 어린 양 같은 천사표도 있었다(신이여, 건강이 나빠진 그를 돌보소서).

현재 나는 나름대로 레퍼런스 시스템(소리의 기준을 만들기 위한 구성), 빈티지 시스템(고전 명기를 사용한, 취미적 경향이 강한 구성), 아리송한 시스템 이렇게 3조의 오디오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집에서 듣고 있는 레퍼런스 시스템은 미국의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명한 윌슨의 와트파피 스피커를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독특한 자기만의 색채를 최대한 억제한 중립적인 모니터 경향의 사운드인데, 모델은 요즘 인기있는 5.1이 아니라 89년에 나온 구형 3 모델이다.

여기에다 근래 들어 갑자기 우리나라에 늦바람 인기가 불고 있는 스펙트럴 DMC 20 프리앰프(정말 끔찍하게 탁월한 명기다)와 마크 그래지어가 이룩한 고전명작 마크 레빈슨 NO. 20.5 파워앰프를 조합해 놓았다. CD시스템은 역시 마크 레빈슨의 NO 31L 트랜스포트에 NO 35L D/A 컨버터를 부착시키고 있다. 아날로그 시스템으로는 진공 흡착식인 소타의 스타 사파이어 턴테이블에 SME Ⅴ 톤암, 오르토폰의 MC 5000 카트리지를 결합시킨 구성이다. 스피커 케이블은 MIT사의 속칭 ‘도시락통’이라고 부르는 MH-750E EXTENDED를 쓰고 있고 기기간의 인터커넥터는 킴버와 몬스터사 제품을 이것저것 사용하고 있다.

레퍼런스, 빈티지, ‘아리송’ 시스템

아마 도사들이 품평을 한다면 “음, 하나하나 명기이기는 한데 좀 개성이 없군” 할 것 같은 표준적인 구성이다. 사실 소싯적부터 이렇게 명성 높은 기기를 사용해 보는 게 꿈이었다. 정작 소유해 보니 환상이 깨지더냐고? 천만에. 이 시스템의 장점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면 꼭 자식 자랑하는 주책과 같을 것 같아서 참아야겠다.

하지만 만능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 가끔은 별미가 필요하다. 오디오 평론가이자 친구인 사진작가 윤광준이 고심해서 세팅한 알텍 9708A 스피커를 한동안 빌려다 듣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인수’하여 내 개인 작업실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 프리앰프는 집에서와 같이 스펙트럴 제품으로 한 등급 아래인 DMC 10이고, 파워앰프는 알텍과 찰떡궁합이라고 하는 300B 사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이 파워앰프는 원래 다무라 트랜스를 사용한 일본 선오디오의 2A3 싱글앰프였는데, 거의 껍데기와 트랜스만 남기고 완전히 개조하여 호블랜드니 스프라그니 하는 지상 최고의 부품들을 구해다 갖은 호사를 다 부린 물건이다. 웨스턴 일렉트릭 같은 300B 진공관의 최고봉들은 능력상 사용하지 못하고 중급 정도에 해당되는 세트론제에 만족하고 있다.

여기에 턴테이블은 토렌스제 TD 350MKⅡ, 톤암은 일제 하이포닉을 사용하고 있으며 독일제 펜타곤 CDP를 트랜스포트용으로, 모나키 22B를 D/A 컨버터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구성은 근본적으로 50∼60년대쯤의 미국 시골 극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빈티지 시스템이다. 구식 혼 특유의 소리 왜곡과 찌그러짐이 심하지만, 이른바 아메리칸 사운드 특유의 호쾌함과 진솔함이 버릴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재즈연주에는 이만한 시스템도 드물지 않나 할 정도다.

소리편력은 일탈과 해방의 몸부림

역시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또 한 조의 ‘아리송 시스템’은 전통의 어쿠스틱 리서치사가 90년대 접어들어 재기해 보고자 유명한 엔지니어 세큐에라를 영입하여 온갖 물량을 투자해 만들었던 스피커 리미티드 버전 3 모델을 살리기 위해 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케팅에 완전 실패한 모델로, 덕분에 성능과 원가에 비해 꽤 싸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크렐의 KSA 150 파워앰프를 물렸다가 최근에는 넬슨 패스가 만든 알레프 5를 들여다 울리고 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그 스피커는 B.A.T사의 탱크처럼 무지막지하게 생긴 뿔 달린 진공관 앰프(6C33C관) VK 60 모델과 인연을 맺을 예정이다. 이 시스템을 자꾸만 아리송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나 자신도 어떤 사운드를 추구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오디오를 좀 잊고 음악에만 파묻히고 싶은 심정일 때 자주 사용하는 나의 또 다른 반려이다.

‘책이나 영화 같은 건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대하게 되지 않는데, 음악은 들을수록 새롭다’는 오디오 쪽 어느 대가의 말씀이 있다. 그것 참 맞는 말이다. 음악은 쉽사리 파악되거나 또렷이 기억되지 않은 채 아련한 연상만을 남겨 놓아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롭고 신선한 감흥을 안겨준다. 언어와 사고로는 번역되지 않는 도저한 추상의 세계다.

오디오는 여기에 적극적인 뉘앙스를 부여해 준다. 낮과 밤에 따라, 날씨에 따라, 리스너의 건강상태에 따라 소리는 변한다. 기기의 위치나 배열 같은 세팅방법에 따라 소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달라진다. 더 나아가 기기 바꿈질, 이른바 업그레이드를 실행할 때는 음악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됨을 느끼게 된다. 변화가 큰 업그레이드일 때는 평소 즐기던 음반이 처음 듣는 듯 새로워서 하나하나 되풀이 감상을 시작하는 일도 흔히 경험한다. 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그래서 시간이 흘러간다. 오디오는 시간을 소비재로 삼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오디오는 없다. 허망한 것인가. 이 세상엔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이나 축내며 쭈그려 앉아 있는 게 한심무쌍한 일 아닌가. 그렇다고 다 인정하기로 하자. 세상 쪽을 향해서 보자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셈인 무위의 시간 도둑질에 무슨 변명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 세상을 떠도는 슬픔의 원천에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보다는 너무나 열심히 무슨 일을 해서 생겨나는 것이 훨씬 많다. 무슨 일에서건 의미와 가치를 찾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세상의 톱니바퀴 속에서 이 허랑방탕의 몸부림은 나름대로의 일탈이며 해방이기도 하다.

그래도 굳이 의미가, 가치가 필요하다면 감히 이렇게 자위의 건방을 떨어도 본다. 산중의 스님이 저 홀로 중생제도의 목탁을 두드린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그 목탁소리 속에 충만한 한 세상이 있다. 방 안 귀신으로 의자 위에 들러붙어 소리에 담긴 시간을 흩날린다. 저 혼자 충만하고 저 혼자 난해한 삶의 시간들. 아득하면 되리라, 뭐 그만하면 된 것 아닌가?

신동아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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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시인·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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