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동생을 잃은 일이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내게 한을 심어준 사건이다.
본래 나에게는 천섭(千燮)이란 이름의 3년 아래 동생이 있었다. 학교도 같았으니 난 3학년 때부터 동생과 함께 통학한 셈이다.
그러나 내가 5학년 때, 그러니까 녀석이 2학년 때였다. 교실에서 녀석이 좀 떠들었던 모양인데 젊은 일본 선생이 녀석을 몇번 업어치기로 마루바닥에 때려눕혔다는 것이다. 그게 치명적이었다. 어린 동생은 그만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가야 했다. 결국 뇌를 다쳐 시름시름 앓다가 대구 동산병원(현 계명대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난 어린 동생에게 잔인한 짓을 한 일본인 선생을 증오하고 한을 품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애’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그 당시 땅을 치고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내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형제가 2남 1녀가 됐다.
일본인에게 어린 동생을 빼앗긴 내가 민족학교인 대륜 중학교(당시 6년제)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륜학교는 3·1운동 직후 대구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홍우일, 김영서, 정운기 선생 등이 설립한 학교였다. 당시 이 분들은 민족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상화선생의 서재에 모여 학교설립을 의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상화선생은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셨고,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 정신의 맥을 이은 대륜의 뿌리가 그러했으니 내가 대륜을 다닐 때의 분위기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학 25일만에 터진 전쟁
50년 봄 대학입시를 앞두고 고민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서울에서 공부할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가 정미소를 운영던 아버지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라고 권했다. 그러나 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울에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해 서울행을 고집했다.
그 해 신입생 선발은 연세대가 가장 빨랐다. 당시 난 정치외교를 통해 나라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 유일하게 정외과가 있는 연세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2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무난히 합격했다. 아무튼 선생님들 덕에 6월1일 무사히 입학식을 치렀고, 서대문 충정로에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나와 함께 입학한 정외과 동기로는 한기춘 전 외국어대 교수, 이종익 전 전주 대 총장, 한배호 고려대 교수, 서대숙 전 하와이대 교수 등이 있으며 같은 해 입학했다가 6·25가 발생하자 바로 군에 입대한 오자복 전국방장관도 동기다.
그러나 내 서울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입학 25일 만에 동족상잔의 불행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고생은 다음 날 곧바로 시작됐다. 28일 한강다리가 끓어지자 이젠 정말로 모두가 적지에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29일부터는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비축해야 할 상황으로 치닫자 하숙집에서는 하숙생에게 밥까지 끊어버렸다. 그날부터 인심 좋고 잘 사는 집에서 하숙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먹거나 먹다 남은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떻게 매번 신세질 수 있겠는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눈치를 보다 굶게 되니 나로서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7월8일 결국 정외과 친구인 김경덕군과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나는 영어사전과 책 몇권만 챙겨 길을 재촉했다. 김군의 고향은 경북 선산군 장천읍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경기도 이천을 지나 장호원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길가에서 과일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걷다가 눈에 보이는 수박이나 참외를 따먹으며, 우린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낙동강까지는 도보로 거의 열흘이 걸렸다. 도중에 민가에 들러 밥도 얻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했지만, 피골이 상접했다. 낙동강 가까이 도착하자, 난 그제서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꼈다. 열흘 동안 인민군은 아무 저항 없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근처는 달랐다. 하루 종일 총소리가 끊이질 않는 게 아닌가.
강 하나만 건너면 안심인데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건너는 경북 선산 땅이었다. 김군과 나는 날이 밝기 전에 마을 노인이 가르쳐주는 대로 허겁지겁 산을 넘어 마침내 강가에 다다랐고, 마지막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뗏목 위에는 후퇴하는 우리 경찰관도 눈에 띄었다. 김군과 헤어져 대구 집에 돌아오니 그때가 7월18일, 떠난 지 열흘 만에 도착한 셈이었다.
공사3기생 입교, 임관 직전 퇴교
정부는 16일 이미 대전에서 대구로 와 있었다. 나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합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할 때라 한동안 뵙지 못한 채 보냈다. 당시 대구와 부산을 빼놓곤 거의 모든 지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8월초 부산에 가보았다. 당시 고려대는 대구에 피란해 있었으나, 서울대와 연세대는 부산으로 피란했었다. 영도에 있는 연세대 가교사에 각보니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쟁통에 한가롭게 공부한다는 것도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8월22일 국민병 모집이 시작됐다. 나 역시 학도병으로 가야 했다.
‘그래, 이왕이면 공군으로 가자. 하늘 높은 곳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또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자.’
난 즉시 공군사관학교 지원서를 냈고, 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해 50년 11월1일 진해의 공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막상 들어가보니 난 학벌이 좋은 편이었다. 대부분 중학교 5·6학년을 다니다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나처럼 대학을 다니다 온 친구는 별로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더러 낯익은 친구가 눈에 띄긴 했지만, 대부분 대구의 학교 후배들이었다.
나이와 경력 때문에 난 입학식 때부터 학생 대대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공사 3기생들은 무척 우수했다. 전쟁 중이라 교수진도 막강했다. 당시 동기생 중에는 나중에 공군참모총장과 13대 국회의원을 한 김인기씨도 있었다.
난 성격이 분명하고 활동적이었기에 2학년 때 생도회 격인 ‘오성회(五星會)’를 조직했고, 회장으로 선출돼 생도회를 이끌게 됐다. 현재도 공군 예비역 장교 모임으로 ‘오성회’가 있는데, 뿌리는 당시 내가 만든 ‘오성회’다.
그러나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내 소박한 꿈은 2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53년 봄, 모든 기초 훈련을 마친 우리는 본격적인 비행훈련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앞으로 열 달 정도만 견디면, 나도 원하는 조종사가 되어 조국을 지킬 수 있다는 꿈에 젖어 있을 때였다.
우리는 진해에서 대전의 항공학교로 이동, 비행훈련 이전에 실시하는 마지막 지상훈련을 받게 됐다. 그런데 지상훈련을 마치고 비행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사건이 터졌다.
우리는 항공병 학교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날 밤 임관을 하루 앞둔 행정장교 후보생들이 유성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3기 사관 불침번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술에 취한 행정장교측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겨, 전시중인 공군에서는 그대로 넘기기에 엄청난 사건이다.
이젠 열 달만 참으면 임관하게 되는데, 최소한 예닐곱 명은 어쩔 수 없이 처벌 당할 위기였다. 생도회장이었던 나는 고민했다. 그리곤 결심했다.
‘비록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회장인 내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모든 건 내가 책임지고 동료들을 살려야 겠다.’
결국 나는 혼자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내가 책임을 지고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사 출신 장교들은 물론 옥만호·주영복·최치곤 등 당시 유명했던 임전 출격 조종사들까지 나의 구명운동에 나섰고, 채용덕 공군참모총장까지도 유치장에 있는 나를 불러 위로했다. 특히 채장군은 내 용기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뭐라 해야 할지…. 내가 한평생 조종사 생활을 해왔지만, 이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반드시 죽어…. 대학을 다니다 왔다니 차라리 대학으로 복교해서 공부를 계속하는 게 좋겠어.”
채장군은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내 성격이 비행기 조종사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일사천리로 공군본부에서 군법회의가 진행됐고, 난 결국 퇴교당했다.
‘연대 털보응원단장’ 시절
퇴교당하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4·5기 생도 모두가 두 줄로 도열해 교문까지 날 전송해주었고, 특히 동기생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 했다. 공사에 근무하던 장교·사병·문관, 심지어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까지 나의 퇴교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희생적 퇴교는 같은 진해에 있던 육사에서도 관심거리였다. 듣기로는 강의 중에 교관들이 내 이름을 거명하며,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쉽게 공사를 퇴교했지만, 공사 3년을 군복무 기간으로 환산해 법적으로 병역 의무는 다 마치고 공군 이병으로 군복무를 끝냈다. 때문에 난 지금도 사병 제대다.
집에서 한동안 쉬며 생각을 정리한 난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9월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그 사이 전쟁은 소강 상태에 있었다. 7월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고, 정부는 이미 환도한 후였다.
신촌캠퍼스의 분위기는 전시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내 눈이 변했을까. 거의 3년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고된 훈련을 견디던 내가 변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도대체 학생들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보통 해이해진 게 아니군. 정말 큰 문제다.’
학생들의 걷는 모습은 물론, 옷차림에다 생활태도까지도 내 눈에는 엉망으로 보였다. 가뜩이나 휴전으로 사회 기강도 다소 해이해지고 있을 때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입학 동기생들은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초조하기도 했지만 학교에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응원단장을 자처하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는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부터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란 별명이 내 뒤를 따랐다. 이 ‘연대 털보’는 옳지 못한 걸 보면 참지 못하는 특유의 성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난 등교 때면 학교 정문에 서서 차를 타고 오는 학생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걷도록 했다. 교수들도 걸어서 학교에 들어오는데 고관 자제라고, 또 돈 많은 학생이라고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게다가 때가 어떤 때인가.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 서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어려울 때인데, 자가용 등하교라니….
뿐만 아니었다. 당시 학생들은 서대문에서 신촌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신촌역 앞에서 연세대·이화여대생들에게 줄을 서라고 야단치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기도 했다. 때문에 이화여대생들은 특히 나를 무서워했고, 김활란 총장이 백낙준 총장에게 ‘이만섭 학생이 우리 여학생들에게 너무 하는 게 아닌가’하는 항의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57년 졸업을 앞두고 당시 AP 및 AFP와 특약을 맺고 새로 창간된 동화통신사에 지원, 56년 9월 입사했다.
처음엔 동화통신사에서 영어경제판을 만드는 특심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이 내 인생에서 정치를 접하게 된 시초였다. 때는 3대 국회 후반이었다.
부정선거 현장 덮치다 깡패에게 몰매
동화통신사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년 만인 58년, 난 대학 선배인 이동수 기자(전 동아일보 상무)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정치부로 자리를 옮졌다.
3년간 3·4·5대 국회를 취재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58년 5월12일에 실시된 4대 민의원 총선거다. 당시 경북 영일을구에서는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자유당의 김익노씨가 당선됐는데, 이에 민주당의 김상순씨가 당선 무효 소송을 내 결국 9월19일 재선거가 실시됐다.
나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영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재선거는 한마디로 불법이 총동원된 부정선거였다. 손에 흰 붕대를 감은 깡패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특히 야당측 운동원과 취재기자들에게 공갈·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찰이 투표소마다 유권자들의 번호표를 일일이 검사한 후 투표를 허락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무더기 투표·대리 투표·릴레이식 투표 등 온갖 부정이 난무했다.
투표가 끝나자, 포항 대송초등학교에서 1000여 유권자들과 수십명의 무장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가 시작됐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정할 정도로 올바른 투표를 했다. 그토록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부정선거가 감행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자 처음부터 자유당 공천의 김익노 후보가 민주당의 김상순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미를 감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표차가 갈수록 벌어지기 시작하자, 개표 작업을 하던 종사원들이 이상하리만큼 느리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날이 새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관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개표 종사원들이 피로하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표를 중단합니다.’
오후 6시로 시간을 잡은 건 뻔한 수작이었다. 어두워야 뭔가 일을 꾸밀 수 있잖은가. 눈치를 챈 야당측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항의하자, 개표 시간이 4시로 앞당겨졌지만 여전히 양측의 긴장감은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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