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우리 문화 바로보기 (7)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2/3
그렇다면 소수림왕 원년(372)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 전래되기 이전에도 불교가 중국계 내투자(來投者, 도망온 사람)나 민간인들에 의해 이미 고구려에 전해져서 중국문화특구에 해당하는 평양 일대에서는 크게 신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밝혀보기 위해 중국측 기록들을 뒤져보니 우선 양(梁)나라 혜교(慧皎, 497∼554년)가 지은 중국 최초의 승사(僧史)인 ‘고승전(高僧傳)’에서 불교가 우리에게 처음 전해지던 시대와 관련해 우리 불교의 정황을 짐작케 해주는 몇 가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이 권 4 축잠심(竺潛心, 286∼374년)전에 나오는 ‘고려도인(高麗道人)’의 기사이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년)이 그와 친분이 있는 고려도인에게 축잠심을 소개하는 편지 내용 중에 바로 고려도인의 존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림의 졸년(卒年)이 366년이고 보면 그가 존숭하던 고려도인은 불교가 공식 전래되는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불교를 알고 출가했어야만 한다. 이미 당시 고승들이 알아줄 정도였다면 그의 출가 이력이 결코 짧지 않았을 터이니 늦어도 4세기 중반경에는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에게 전파돼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고려도인은 불도징(佛圖澄, 232∼348년)과 석도안(釋道安, 314∼385년) 사제간의 법맥을 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바, 순도(順道)나 아도(阿道)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일 수도 있을 듯하다.

다음 민간차원에서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파하였다는 석담시(釋曇始)의 기록이 ‘고승전’ 권 10 신이(神異) 하(下) 담시전(曇始傳)에 실려 있다.



“담시가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376∼396년) 말년에 경(經)·율(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삼승법(三乘法; 聲聞乘, 緣覺乘, 菩薩乘을 일컫는 말.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에 해당하고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으로 선화(宣化; 널리 펼쳐 교화함)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도를 듣는 시초가 되었다.”

이 시기는 대체로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3년) 초년에 해당하여, 고구려가 비로소 요동성을 완전히 장악한 사실(385년)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담시전의 내용을 계속 읽어가노라면, 담시란 분이 ‘발이 얼굴보다 희고 맨발로 다녀도 진흙이 묻지 않았다’는 백족도인(白足道人)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夏)의 임금인 혁련발발(赫連勃勃, 자는 屈381∼425년)이 장안을 함락하고(418년) 수많은 사람들을 목베어 죽일 때 담시도 칼을 맞았으나 다치지 않으므로 혁련발발이 스스로 보검을 뽑아 쳤으나 해칠 수 없어 사죄하고 도륙을 그쳤다고 한다. 담시는 또 이러한 신통력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폐불 사건(446∼452년)에도 거듭 써서, 폐불의 장본인인 태무제를 참회시키고 이를 사주한 최호(崔浩)와 구겸지(寇謙之)를 모두 악병과 주문(誅門, 한가족을 모두 죽임)으로 응징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실제 백족도인이 활동하였던 나라인 북위의 정사 ‘위서(魏書)’ 권 114 석로지(釋老志)에서는 백족도인을 백각사(白脚師)라 하고 그 이름을 혜시(惠始)라 하였으며 혁련발발과의 일을 그대로 적고 있어서, 담시와 혜시가 동일 인물인 것을 알게 해준다. 아마 어느 한곳에서 오자를 낸 것이 이와 같이 별개 인명을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기사를 자세히 대조해 보니 ‘고승전’ 기록은 태무제 폐불시 기록이 더 첨가되고, 그 출신이 관중(關中, 長安 부근)이라 하였으며, 돌아간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석로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이 장(張)씨이고 본향은 산동성 청하(淸河)인데, 구마라습(鳩摩羅什, Kumrajiva, 343∼413년)이 장안에서 새로 경전을 번역해낸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그를 찾아뵙고 경전을 익히며 좌선에 힘쓴 결과 혁련발발에게 그런 신행(神行)을 보일 수 있었다. 그는 하(夏)나라가 북위 태무제에게 멸망하자(428년) 태무제를 좇아 위나라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와서 태무제의 존숭을 받다가 태연(太延, 435∼439년)연간에 수도 안에 있는 팔각사(八角寺)에서 앉은 채로 열반하였다. 그 시신은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돼 탑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10년 만인 태평진군(太平眞君) 6년(445)에 성 안에 무덤을 둘 수 없다는 법제 때문에 남교(南郊)로 옮기려고 보니 시신이 조금도 변함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으며, 중서감(中書監) 고윤(高允)은 그의 전기를 지어 유덕을 칭송하였다. 그 무덤 위에 돌로 정사(精舍)를 만들어 세우고 그 형상을 그려놓았었는데 폐불시에도 훼손되지 않고 홀로 온전하였다.

이로 보면 석로지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고 합리적인 데 반해 ‘고승전’의 기록은 자못 모호하며 신비로워 신이(神異)로 윤색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따라서 위수(魏收, 505∼572년)가 지은 ‘위서’ 석로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 할 것인데, 이는 ‘위서’가 정사(正史)일 뿐만 아니라 고윤의 ‘혜시전’을 직접 보고 약술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전도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석로지의 내용에 좇아서 혜시의 고구려 전도 사실을 윤색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신이승 혜시의 신행(神行)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니, 오히려 석로지에서 생략된 내용이었으리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 요동성 교화의 시조라는 담시는 혜시(惠始)라고 그 오자를 바로잡아야 하겠다. ‘고승전’을 그대로 추종한 최치원(崔致遠, 857∼?)의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비문의 내용이나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1215년)’ 권 1 담시전의 내용과 이름자는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든 혜시가 구마라습 문하에 들어가 그의 번역인 신경(新經)을 바로 가지고 와서 고구려에 전파한 까닭에, 본래 도안 일파의 하북불교(河北佛敎)에만 연결돼 있던 고구려 불교는 이제 국제성이 강하며 가장 풍부하고 세련된 교학체계를 갖춘 장안파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임으로써 장차 다양한 발전을 약속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얼마 뒤에 요동성에서는 남방 신삼론종(新三論宗)의 시조가 되는 승랑(僧朗) 같은 대인물이배출돼 중국 삼론종의 기틀을 다져 놓기도 한다.

[ 내실(內實)을 다지는 장수왕 ]

광개토대왕이 요서를 제외한 만주 전역과 한강 이북의 한반도 중북부 전역으로 국토를 확장해 놓고 영락 23년(413) 계축 10월에 불과 39세로 돌아가자 태자 거련(巨連)이 20세로 왕위를 계승한다. 바로 이분이 98세의 장수를 누리며 재위 79년이라는 긴 기간에 고구려를 안정적으로 다스려 나간 장수왕이다. 현명한 장수왕은 부왕이 넓혀 놓은 영토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즉위 후 10여년 동안은 정복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그래서 일체의 대외관계도 자제한다.

그런데 북중국의 강국으로 부상한 북위에서 태조를 계승한 태종 명원제(明元帝, 392∼423년)가 역시 한식산(寒食散)에 중독돼 32세에 폐인이 되어 돌아가고, 태자인 세조 태무제(太武帝, 408∼452년)가 장수왕 11년(423) 11월에 16세로 등극하여 그 다음해부터 영토 확장에 혈안이 돼 사방을 침공한다. 이에 장수왕은 그 실상을 탐지하여 대비하려는 듯 13년(425)에 처음으로 북위에 사신을 보낸다. 사신을 통해 북위 태무제의 통일 야욕을 확인한 장수왕은 서북으로의 진출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저들의 침략을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한사군 설치 후 422년 동안 한제국의 식민통치 중심 거점으로 한의 수도권 문화가 그대로 이식되어 당시 중국문화권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고 있던 평양으로 과감하게 천도할 계획을 세운다. 사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평양을 차지한 지 11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으로 천도해 가지 않은 것은 서북 진출의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준 높은 문화특구로 천도해 들어갔다가 한문화에 문화적으로 역정복당할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구려 집권층이 요동 일대를 정복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후 평양으로의 천도 결정을 내렸던 듯하다.

드디어 장수왕 15년(427)에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해 간다. 이로써 장수왕의 계산은 맞아떨어져, 북위가 존재하는 동안, 즉 남북조시대에 있어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침략을 끝내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역정복에 대한 자신감은 무너져 평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수준 높은 한문화에게 끝내 역정복당하고 말았던 듯하다. 이는 광개토대왕릉과 같은 고구려 전통 능묘제도가 평양 천도 이후에는 중국 능묘제도인 봉토석실벽화분으로 바뀐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떻든 동북의 강국 고구려가 북위와의 충돌을 피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서북 진출에 뜻이 없음을 보이자, 태무제는 마음놓고 북중국 서쪽 혁련(赫連)씨의 대하(大夏)를 공격하여 장수왕 16년(428) 2월에는 대하 황제 혁련창(赫連昌)을 사로잡았고 장수왕 19년(431) 6월에는 대하의 부흥군까지 완전 토멸하여 대하를 멸망시킨다. 그러고 나서 고구려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동쪽의 북연으로 눈길을 돌려 이를 정벌하려 한다.

때마침 북연의 사정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운의 뒤를 이어 자립한 풍발(馮跋, 409∼430년)이 재위 20년 만인 장수왕 17년(429)에 중병에 걸리는데 후궁 송씨가 자신의 소생 왕자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고 태자를 비롯한 정궁 소생 왕자들의 출입을 차단한다. 그러자 국정을 총괄하고 있던 풍발의 막내 아우인 풍홍(馮弘)이 송씨를 견제하기 위해 장수왕 18년(430) 9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대내에 진입한다. 이에 풍발은 놀라서 죽고 마는데, 풍홍은 태자를 비롯하여 풍발의 아들 100여명을 죽이고 자립한다.

이에 북위 태무제는 장수왕 20년(432) 6월 풍홍을 응징하는 대군을 일으켜 몸소 정벌에 나선다. 여기서 태무제는 요서지방에 있던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 낙랑, 대방, 현도 등 6성을 함락하고 3만여 가구를 포로로 잡아 9월에 회군한다. 그런데 풍홍도 집안이 복잡하여 정비인 왕(王)씨를 폐출하고 후궁 모용씨를 정비로 삼았던 까닭에 정비 소생인 세자 숭(崇)도 역시 폐위돼 요서의 변방인 비여(肥如)로 쫓겨나 그곳을 지키게 되었고 모용씨 소생의 왕인(王仁)이 세자가 되었다.

이런 형편에 태무제가 침략해와 전국을 유린하고 돌아가니 풍홍의 정비 소생 왕자들인 광평공(廣平公) 낭(朗)과 낙릉공(樂陵公) 막(邈)이 의논하기를 ‘대운(大運)의 소재는 분명하여 집안과 나라는 이미 망하였는데 또 모용씨의 참소로 장차 화가 미쳐올 것이다’라 하고, 비여로 달아나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숭으로 하여금 북위에 항복하기를 권한다.

숭이 아우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위에 항복하기로 뜻을 굳히자 12월에 막내인 막이 형 숭의 뜻을 가지고 북위로 가서 태무제에게 이를 전한다. 태무제는 크게 반가워하며 겸홍로(兼鴻盧) 이계(李繼)를 보내 풍숭을 시중(侍中)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유평이주목(幽平二州牧) 요서왕(遼西王)에 봉하고, 요서 10군을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어 사실상 북연의 전체 통치권을 위임한다.

이에 풍홍은 장군 봉우(封羽)를 보내 요서를 포위 공격하게 하지만 태무제의 구원군이 밀려와서 도리어 봉우마저 항복하니 3000여 가구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풍홍은 막내공주를 태무제의 후궁으로 보내고 세자 왕인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여 겨우 강화를 맺는데 차마 세자를 보낼 수 없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한다.

장수왕은 이를 북연의 국세(國勢)를 흡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장수왕은 우선 북위를 안심시키기 위해 23년(435) 6월에 북위로 사신을 보내 많은 공물을 선사하고 북위 역대 황제들의 이름자를 물었다. 피휘(避諱, 제왕이나 선조의 이름자를 공경하는 뜻으로 피하여 쓰지 않음)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정성에 감복한 태무제는 북위의 황제 세계와 이름자를 적어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사신으로 보내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한다.

이렇게 북위를 안심시킨 장수왕은 24년(436) 4월 북위의 연나라 침공이 시작되자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으로 하여금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청군하러 온 북연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따라 은밀하게 북연 수도 화룡성(和龍城)으로 가서 풍홍을 맞이해 오게 한다. 이에 고구려 군사들은 화룡성에 이르러 북연의 창고에서 새 옷과 새 병장기를 꺼내 새롭게 무장하고, 화룡성의 일체 재물과 백성들을 챙긴 다음, 화룡성 안의 궁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에 불지르고 5월에 고구려로 돌아온다. 여자와 아이들은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북연의 정병을 이끌고 좌우를 둘러싸며 갈로와 맹광은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앞뒤를 호위하는 네모꼴 형태로 행진해 오는데 그 길이가 80리에 이르렀다 한다.

이들 일행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국경 안으로 들어오자 장수왕은 이들을 우선 요하의 하구 부근에 있는 지금의 요령성 개평현(蓋平縣)인 평곽(平郭)에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에 들로 나왔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구려’라고 인사했다 한다. 이에 풍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황제의 행세로 응대했다 하는데, 본래 풍홍이 고구려를 무시하여 이곳에 피난해 와 있으면서도 형정(刑政)과 상벌(賞罰)을 제 나라에서처럼 행하려 하고 남조 송(宋)에 기별하여 그곳으로 갈 뜻을 밝힌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장수왕은 풍홍 일행을 남조 송과 연결되는 바닷길에서 멀리 떼어놓기 위해 우선 지금의 요령성 심양(瀋陽) 부근인 북풍(北豊)으로 옮기게 한다. 그리고 시중드는 사람을 빼앗고 세자 왕인을 인질로 삼으니, 풍홍이 이를 원통히 여겨 남조 송에 밀사를 보내 군대가 와서 데려가 주기를 청한다.

남조 송 문제가 왕백구(王白駒) 등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로 하여금 풍홍 일행을 호송해 보내기를 청하자, 장수왕은 26년(438) 3월에 장군 손수(孫漱)와 고구(高仇)를 보내어 북평에서 풍홍을 죽여버리도록 한다. 이에 왕백구는 거느리고 있던 7000군사로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장군 고구를 살해하고 손수를 사로잡는다. 장수왕은 즉각 대군을 동원하여 송군을 격파한 뒤, 백구 등이 마음대로 살육을 자행했다는 죄목으로 사신 편에 이를 묶어 보내며 본국에서 다스려주기를 청하는 외교수완을 발휘한다.

송은 이미 지나간 일로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맺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백구 등을 고구려가 원하는 대로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짓게 되니, 풍홍이 이끌고 온 북연의 국세(國勢)는 고스란히 고구려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구려의 국력은 더욱 고강(高强)해져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린 북위 태무제마저 고구려 정벌을 단념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천하제패의 야망을 가진 태무제는 고구려의 배신에 발을 굴렀으나 그의 참모인 낙평왕(樂平王) 비(丕)가 극구 만류해 정벌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무제는 울분을 풀기 위해 장수왕 27년(439) 7월에 서쪽으로 북량(北凉) 정벌에 나서 9월에 북량을 멸망시킴으로써 북중국 통일을 완성한다.

[ 제해권을 빼앗긴 해상왕국 ]

백제의 지배층은 본래 압록강 유역을 근거지로 하여 해상활동을 하던 졸본부여 계통의 해양세력이었다. 주몽이 이들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인데 북부여로부터 유리왕자가 찾아오자,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제2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따르는 백성을 데리고 그 모후와 함께 남쪽으로 바다를 따라 내려와 강화만을 거점으로 삼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서울인 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국했던 것이다.

사실 강화도와 교동도의 북쪽을 휘감아돌아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조강(祖江)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물머리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강이다. 이 조강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한반도 중부권 거의 전지역으로 이어지므로, 이곳은 한반도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백제가 이곳 조강을 차지하여 해상세력의 거점을 삼았다는 것은 곧 한반도의 심장을 장악했다는 의미이니, 백제가 이곳을 중심으로 해양강국으로 성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실제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제주도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까지 세력을 펼쳐 한반도 주변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해갔던 듯하다.

북중국의 황하는 황토의 침전에 따라 하류로 내려올수록 강바닥이 높아져서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황하 하구에서는 일찍이 해상세력이 발달할 수 없었다. 반면 양자강은 수심이 깊고 주변에 호수가 많아 일찍부터 배 부리는 기술이 발달하여 해상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양자강 하구를 중심으로 하는 남중국 해안이 해상세력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이에 백제의 해상세력은 자연 남중국 해양세력과 제해권을 다투면서 연결을 맺게 되는데, 중국 대륙이 남북조로 나뉘면서 남조에서 해상세력을 적극 지원하자 백제의 해상세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아우르자 본래 그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압록강 일대의 해상세력이 대동강 하구의 남포만과 황해도 옹진반도까지 밀고 내려오고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요하 하구인 요동만 일대까지 장악하니, 백제의 수군세력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제는 할 수 없이 그들의 연결세력이던 왜군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일전을 벌였던 것인데, 광개토대왕의 수군에게 옹진반도를 지키는 요해처였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기는 바람에 강화만이 항상 고구려 수군에게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의 뜻을 분명하게 표방하고 북연의 국세를 흡수하여 엄청난 강국으로 부상하니 백제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4년)은 즉위하고 나자 남조 송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여 해상세력을 키워가기 위해 4년(458)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및 정로장군(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 등 11인에게 송나라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는다. 이는 송나라 연안에서 활동할 때 이들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한 예비조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왜군의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해 송으로 하여금 왜국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왜신라임나라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摹韓六國諸軍事) 안동(安東)장군 왜국왕을 봉하게 한다(‘宋書’ 권 97 倭國傳).

백제가 이와 같이 남조 송과 밀착돼 가자 고구려도 송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고구려의 주축이 해양세력이 아니었던 만큼 그 관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북연의 흡수를 둘러싸고 국교가 단절되어 있던 북위와 국교를 재개한다. 태무제가 돌아가고 난 뒤 고종 문성제(440∼465년)가 등극하여 10년이 지난 장수왕 50년(462) 3월에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북위도 이제는 정복전쟁을 끝마친 마당에 굳이 고구려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고구려가 남조 송과 비길 만한 강국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대국으로 깍듯이 예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구려와 북위는 급속도로 밀착돼 백제와 왜, 남조 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세력을 견제하려 든다.

그러자 백제 개로왕은 장수왕 60년(472)에 북위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강성과 침략상을 과장하여 알리며 고구려를 정벌해 주도록 요청한다. 북위 문성제는 지금 중하(中夏)가 통일돼 나라에 근심이 없고 고구려 역시 뜻을 거스르지 않으니 정벌할 이유가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사신 소안(邵安)을 백제 사신과 함께 보내며 고구려를 거쳐가게 한다.

장수왕은 개로왕과 원수를 진 일이 있어서 통과시킬 수 없다고 하며 소안 일행을 되돌려 보내는데, 이때 벌써 개로왕을 응징하려는 결심을 굳힌 듯하다. 그래서 승려인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보내어 백제의 틈새를 엿보게 한 다음 장수왕 63년(475) 9월에 3만 군사를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일시에 진격한다. 고구려군은 위례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화공(火攻)으로 성문을 태운 다음 성 안으로 쳐들어가 겨우 수십기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아나는 개로왕을 잡아다가 아단성으로 끌고가 죽여버린다.

그런데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예측하여 이미 여러 방면으로 이를 모면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승려 도림의 간첩행위로 개로왕이 토목사업을 벌이다 국력이 고갈돼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삼국사기’ 권 25 개로왕 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 토목사업을 벌였다면 오히려 성곽의 보수 등 전쟁 대비를 위한 것이었을 듯하다.

다만 3만 군사에게 일시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힘든 대목인데, 아마 개로왕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방심하다가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개로왕은 조강을 지키고 있는 강화만의 수군이 결코 깨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고구려 육군의 저지에만 신경을 쓰다가 뜻밖에 강화만의 막강한 수군선단이 고구려 수군에게 격파당함으로써 조강을 거슬러 온 고구려 수군에게 허를 찔려 어이없는 참패를 당했을 듯하다. 성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다는 것도 선단의 괴멸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단이 있는 곳으로 피란하려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태자인 문주왕은 신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가서 1만 군사를 빌려 와보니 벌써 국도는 고구려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한다. 강화만을 지키던 백제 수군 선단이 완전 괴멸하여 조강과 위례성이 고구려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한강의 물길을 따라 남한강 상류지역까지 진격하여 여주, 충주, 단양 등을 차례로 손에 넣고 백두대간을 넘는 길목인 죽령을 넘어 신라지역까지 넘보게 된다.

이렇게 백제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수군세력을 모아 결사적으로 아산만을 지켜내려 한다. 이곳에서 밀리면 더 버틸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산만 배후 깊숙이 자리잡은 금강 상류의 공주가 피란 수도로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으므로 금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그러고는 아산만을 수군 선단의 재건 중심기지로 삼아 은밀하고 신속하게 선단을 재건해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한편 해상세력으로 연결돼 있는 남조세력의 핵심인 백제 수군세력이 고구려 선단에게 무참히 격파돼 강화만과 한강 이북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되자 남북의 세력균형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왜국은 장수왕 66년(478)에 송 순제(順帝)에게 고구려 정벌을 제의하지만, 송나라 형편도 신하에게 제위를 찬탈당하는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한편 발해만 등지에 흩어져 있던 백제 해상세력들은 본국 주력 선단이 괴멸하자 각처에서 반격을 시도하는 듯하니, 장수왕 65년(477)경에는 송화강 일대와 연해주 일대에 걸쳐 살던 물길(勿吉)을 움직여 북위 효문제(467∼499년)에게 고구려 정벌 여부를 타진하게 한다. 그러나 효문제는 그의 황후 고(高)씨가 고구려계였으므로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서로 침략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러 보낸다.

이로부터 북위 효문제는 고구려를 더욱 우대하여 남조 제(齊)나라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렬에 앉게 하고 거처하는 집도 차등이 없게 하니(‘資治通鑑’ 권 136 齊紀 2 世祖紀上 및 ‘南齊書’ 권58 고구려전), 백제는 동성왕(東城王) 10년(488)에 북위를 침공하여 진(晋)·평(平) 2군을 빼앗는다. 이에 북위는 기병(騎兵) 수십만을 보내 이를 물리치려다가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고 한다(‘資治通鑑’ 권 136 齊紀 2 世祖上之下 및 ‘南齊書’ 권 58 百濟傳,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東城王 10年條).

2/3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목록 닫기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