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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새정치 국민회의 총재권한 대행 이만섭 회고록 上

“각하! 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까?”

3선개헌 담판 그리고 박정희와의 결별

  • 이만섭 새정치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새천년 민주신당 창당준비위공동위원장

“각하! 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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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시가 돼도 개표 종사원들은 억지를 부리며 개표를 미루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느니, 또는 쉬어야겠다느니 하면서 미적거리다가 결국 개표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7시10분경에야 속개됐다. 당시 난 개표장 안팎을 오가며 분위기를 탐색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개표소 바로 옆 교실에 대구 시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 두목은 대구사회에서 유명한 김세덕이었다.

‘불상사가 나겠구나.’

나는 직감했다. 개표는 속개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투표함을 개봉해 자유당 표와 민주당 표를 분류해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한눈에도 민주당 표가 훨씬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중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두어 차례 그러더니 세번째는 아예 끊겨버렸다. 난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불이 나가자마자 옆방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며 개표장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 대변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표 도둑이야! 표 도둑이야!”



순간 기자석에 앉아 있던 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시 내 나이 스물일곱. 무서울 게 없는 나이였다.

“야! 이 도둑놈들아.”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서는 민주당 표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가 표 더미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표를 감싸안고 엎드린 내 등과 머리 위로 곧이어 깡패들의 주먹과 발길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난 평생에 걸쳐 가장 심한 폭행을 당했다.

잠시 후 깡패들이 사라지고 장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개표소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엉뚱하게도 관람인들과 기자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나중에 다시 전기가 들어온 뒤에 보니, 쌓여 있던 민주당 지지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림짐작으로 3600표가 넘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난 서글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위의 기자들도 참담한지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그때 개표 종사원 중 몇명이 기자들에게 사과를 나눠주었다. 분이 머리 끝까지 치민 나는 사과를 개표소 안으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야!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표 도둑놈들아.”

개표 결과는 뻔했다. 자유당의 김익노 후보가 300여표 차로 재당선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정의감 앞에는 위협만 도사리고 있었다. 분한 마음을 지닌 채 서울로 올라오니 ‘개표 방해’라는 선거법 위반 혐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 박사 비서관인 조승만씨로부터 연락이 와 가보니, 조박사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조금 전 이기붕씨 집에서 자유당 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자네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키로 했다네. 그러니 며칠간 숨어 지내게.”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표 도둑놈은 가만 놔둔 채. 불의를 참지 못한 내겐 사과 던진 걸 가지고 ‘개표방해죄’를 적용시키다니. 그러나 구속까지는 되지 않았다. 친구와 친척집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동료 정치부 기자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된 것이다. 당시 깡패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이 지금도 허리에 신경통으로 남아 있다.

58년 12월24일, 자유당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게 되는 이른바 ‘보안법 파동’이 있었다. 나는 사건 현장에서 이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보안법 파동’이란 자유당 정권이 58년 12월24일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新)국가보안법’을 제안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문제가 많았다. 이미 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있는데도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는 건 정권 연장을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기존 법률로는 정권 유지에 어려움이 있기에 더 강력한 법을 끌어들이려는 수법이었다.

당연히 야당은 “경찰국가를 만들려는 음모” 또는 “관제 공산주의자를 양산하려는 악법”이라며 범국민 저지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날은 야당인 민주당이 5일째 의사당내에서 농성을 벌이던 23일 저녁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은 뒤 민주당의 농성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국회총무과에 다녀오는데 국회총무과 창문을 통해 직원들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창문 밖으로 나르고 있는 걸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수상하다고 판단, 밖으로 나가 보니 서류뭉치였다. 뭔가 음모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 사이 서류뭉치는 검은 지프에 실렸고, 곧 출발할 태세였다.

난 황급히 기자실로 달려가 마침 그곳에 있던 이원홍 기자(李元洪·전 문공부 장관)를 불러내 영업용 택시를 타고 지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역시 문제가 있었다. 서울역 앞을 지나친 그 수상한 지프는 한강다리와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인천 쪽으로 달리더니 부평경찰전문학교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우리는 택시를 대기시킨 채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지프가 나오지 않아, 일단 서울로 돌아와 알아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보충취재를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밤 전국의 무술경찰관들을 긴급히 국회 무술경위로 특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싣고나간 서류는 이력서 등 채용에 필요한 서류임이 분명했다.

보안법 파동, 끌려나가는 의원들

우리는 곧 경향신문의 정종식 기자(鄭宗植·전 연합통신 사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다음날 아침 조간에 이를 보도해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국회 특채 무술 경위의 동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은 너무 약했다. 24일 새벽 나는 전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 300여명을 모아 국회 경위 옷을 입혀 덕수궁에 집결시킨 것을 확인했다. 이 사실은 당시 국회사무차장 비서관이던 연세대 정외과 동문이 귀뜀해 준 것이었다.

나는 조병옥 박사를 찾았다. 조박사는 당시 본회의장 뒤 별관 의무실 2층에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다가 계단 밑에서 마주친 치안국 특수정보과 국회 담당은 은근한 협박조로 말했다.

“이형이 지금 무엇 때문에 조박사를 찾아가는지 알고 있소. 지난번 영일 선거 때도 문제가 됐다 살아났는데, 이번에는 정말 몸조심해야 할 거요.”

그러나 그렇다고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기에 계단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큰일났습니다. 지금 덕수궁에 무술 경위 300여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아침이 되면 그들이 본회의장으로 난입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쫓겨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성하던 침구를 치우고 본회의장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 의사진행 발언을 얻어 시간을 끄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언론에서 무술 경위 급조 등 자유당의 음모에 대해 계속 보도하면 뭔가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침 그 자리에는 곽상훈(郭尙勳)·박순천(朴順天)씨 등 최고위원들도 모여 있다가, 내 말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게 좋겠어.”

그 자리에서 내 의견을 수용한 그들은 곧 본회의장으로 내려가, 침구를 깨끗이 치우고 의자에 앉아 10시 개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유당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었다. 9시40분쯤 됐을까. 갑자기 사방으로 나 있는 본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무술경위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범법자를 소탕하는 듯한 위세였다. 그래도 국민들이 뽑은 선량(選良)들인데, 저렇게 무자비하게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야! 이놈들아.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찢어질 듯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박순천 여사가 양팔을 무술 경위들한테 잡힌 채 끌려 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런 국회가 어디에 또 있을까?’

그 처참한 장면을 지켜보며 울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결국 민주당 의원들을 의사당 복도와 식당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감금시킨 채,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보안법을 통과시켜버리고 말았다. 정권 말기의 전형적인 폭거였다.

사실 당시 자유당의 관제 용공 세력 만들기는 정도가 지나쳤다. ‘보안법 파동’ 전에 민주당의 통일방안은 ‘UN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였다 그런데 자유당은 이를 ‘용공 통일’로 몰아붙여 본회의장이 한때 소란해지기도 했다.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

당시 2층 기자석에 있던 나는 자유당의 행태가 너무 한심해 본회의장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유당 놈들아. 이럴 수가 있는 거야?”

그러자 당시 사회를 보던 민주당 곽상훈 부의장이 기자석을 향해 한마디 했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

곽부의장의 이 말은 아직도 국회 속기록에 남아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통일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던 자유당은 결국 ‘보안법 파동’이란 큰일외에 온갖 탄압과 불법선거를 자행했고 4·19는 이미 그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본격적인 규탄 데모는 마산에서 시작됐다. 후일 ‘10·26’의 불씨도 그랬던 것처럼.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3월15일 마산에서 시작됐고, 곧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데모는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4월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 시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날 아침 나는 급히 마산으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동아일보 마산지국에 진을 쳤다.

마산시내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 성난 시민들은 경찰과 정면 충돌했고 12일과 13일이 되어도 분노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3일 밤 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경찰이 김주열의 시신을 빼돌린다더라.”

즉시 시신이 안치된 마산 도립병원으로 내달았다. 무술경관들이 병원을 포위한 채 일체 접근을 불허했고 조금 있다보니 아니나다를까 시체를 인수한 경찰차가 무장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 시작했다. 나는 차를 몰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추적했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밤, 내가 탄 차는 김주열군의 시신을 실은 경찰차를 바짝 뒤쫓았다. 그러나 역시 경찰은 눈치가 빨랐다. 어느새 알아차렸는지 금세 차 서너 대가 내 차의 앞뒤를 둘러싸고 추적을 방해했다. 그 차가 가는 방향으로 봐 김군의 고향인 남원으로 가는 게 틀림없었다.

억울한 심정으로 동아일보 마산지국으로 돌아와 곧 서울로 급전을 쳤다. 다음날인 14일 아침 동아일보 조간에는 ‘마산발=李萬燮기자’로 ‘경찰, 밤비를 이용, 金朱烈군의 시신 남원으로 이송’이란 제하의 5단기사가 실렸다.

전국은 다시 분노했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대됐다. 서울·부산·대구 등지로 확산돼 사태가 점점 긴박해짐에 따라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군사혁명

올라와 보니 서울의 시위 또한 마산 못지 않게 심각했다. 마침 동아일보는 광화문에 있었기에 비교적 시위 상황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현재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무너뜨린 뒤 목에 새끼줄을 걸고 끌고다니는 시위대가 보였고, 저 멀리 경무대 쪽에는 경찰과 대치한 채 시위를 벌이는 학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보면서, 또한 총알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취재하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민심을 거역하는 독재정치가 결국은 나라를 망치고 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 같았다. 자유당 12년 정권의 말로 역시 그러했다.

그 후 허정(許政) 과도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29일 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예상대로 민주당이 압승했다. 그러나 조병옥 박사의 서거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구심점이 없어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그해 5월16일 새벽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대륜중학교 후배로 해병대 장교라는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알려왔다 나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이를 확인한 후 급히 집에서 뛰쳐나갔다.

‘군사혁명이 발생했다’는 전화를 받고 동아일보사로 달려가면서 언뜻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단하나였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나중에 윤보선(尹潽善) 대통령도 ‘올 것이 왔다’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들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만큼 당시 사회상이 국민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는 증거였다.

신문사에 들어서니 라디오에서는 이미 혁명군의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채 한 달도 못 돼 필화(筆禍)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6월3일 오후, 청와대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의 특별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혁명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윤대통령이 나라의 통수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대통령의 회견 중 혁명군에게 불리한 얘기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음일까. 특별 기자회견장에는 무장 헌병들이 늘어서서 윤대통령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으며 중앙청 출입기자단 간사조차 몸을 사리는 발언을 했다.

“우리, 이번에는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회견 때 곤란한 질문 같은 건 피하면서 적당히 하는 게 좋겠소.”

나는 그런 비열한 태도를 용인할 수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된다. 민간 정부 때는 약하다고 마구 때리다가, 힘 있는 군사정권이라 해서 꼼짝 못하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언론이 되란 말인가? 안돼! 각자 소신껏 묻고 소신껏 써야 해.”

‘민정 이양 촉구’ 기사로 2개월 옥고

그러나 내 말에 기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만큼 당시 분위기는 살벌했다. 드디어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나는 회견이 끝날 무렵 옆방 경호실로 나와야 했다. 왜냐하면 마감 시간이 임박해 본사로 기사를 송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마침 견습중인 이진희기자(후일 문공부 장관)를 데리고 갔다. 뒷일을 이기자에게 부탁하고 옆방에서 전화로 원고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진희 기자가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선배님, 방금 대통령께서 중요한 얘기를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9월의 유엔 총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조속히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뭐야! 그거 아주 중요한 얘긴데…. 이건 정확해야 해. 다시 이야기해봐.”

나는 긴장했다. 윤대통령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이건 톱뉴스였다.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부분을 ‘리드(前文)’로 뽑아 다시 기사를 전화로 불러 주었다. 바로 그날 저녁에 나온 동아일보에는 1면 톱에 ‘윤대통령, 정권 민간 이양을 촉구’란 제목이 있었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모든 언론이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아예 그 기사를 빼버리거나 은폐했다. 조선일보는 제목은 뽑지 않은 채 기사로 취급했으나, 동아일보는 당당하게 1면 톱으로 다뤘던 것이다.

그날 밤 회사에서 숙직하던 사원이 이상한 전화를 했다.

“시경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이기자 집을 가르쳐줘도 되겠습니까?”

난 ‘혁명정부의 포고령 위반’으로 신문사에서 시경으로 끌려가면서, 전화로 고재욱 주필과 김성열 정치부장에게 말했다.

“만일 통행금지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잡혀간 걸로 아십시오.”

가보니 나 이외에 김영상 편집국장도 옆방에 연행돼 있었다. 분명한 사실을 썼을 뿐인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내가 국민과 군사정부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꾸며서 썼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도 보도한 사실을 들며 윤대통령에게 직접 확인하라고 했으나, 나중에야 그들도 “우리는 최고회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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