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은 군함도에 끌려온 조선인 징용공들의 분투기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의 하시마(端島) 섬이다. 바다에 떠 있는 모양이 군함 같은 무인도다. 하루 12시간 이상 해저탄광(미쓰비시광업 하시마탄광) 채탄 작업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감옥섬’이라 불렀다. 하시마는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포함돼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정부기록물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2012)는 1943~45년 이곳에 500~800명의 조선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시마에서 발견된 화장 기록에 등재된 조선인 사망자는 122명, 우리 정부가 피해조사를 통해 인정한 ‘동원 중 사망자’는 27명이다.
한수산 작가가 역사소설에 천착한 배경은 뭘까. 서울 광화문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암흑 속에 성장하는 자아

“체력 회복이 안 되더군요. ‘군함도’를 작년부터 15개월 동안 바짝 달려서 썼거든요. 작년에 만난 사람이 10명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개 산책을 못 시켜줘서 개도 나도 살이 쪘어요. 2003년 ‘까마귀’ 쓰고 나서는, 폭탄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뭉텅이로 빠진 적도 있는데, 탈진했나 봅니다.”
▼ ‘까마귀’를 요약해 ‘군함도’를 쓰셨다고….
“‘까마귀’가 5300매인데, 그중 3300매를 잘라냈어요. 그러곤 1500매를 새로 써서 3500매 ‘군함도’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걸 그리기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전달하자’는 목표였어요. ‘군함도’에선 징용공인 주인공을 성장시키려고 했어요. 암흑 속에 있어도 창조적인 자아를 발견해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일제를 청산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
▼ 일본에서는 ‘군함도’가 2009년에 발간됐는데요.
“한국에서 2003년 5권으로 출간된 ‘까마귀’가, 일본에선 2009년 2권짜리 ‘군함도’로 나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까마귀에게 하듯 돌팔매질을 했대서 징용공을 까마귀로 치환해 붙인 제목인데, 부정적인 제목이라 영 불편했거든요. 그러다 일본 번역진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군함도’로 바꾸고, 일본인들이 잘 아는 그들의 풍습, 생활습관, 전시 상황이 나오는 대목을 대폭 줄였지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하기로 했는데, 제 개인적 사정으로 한국판이 늦어지게 된 겁니다.”
생존자와 찾은 군함도
▼ 일제 강점기의 많은 피해 현장 중 군함도에 주목한 이유는.“1989년 도쿄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작은 책자를 보면서 시작됐죠.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에서 펴낸 건데, 모임을 주도한 오카 마사하루 목사님을 빼놓고는 이 작품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다들 직업이 있으니 주말에 삼삼오오 모여 그걸 들고 나가사키 전역을 10년 넘게 찾아다니며 조선인 피해 사실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물로 ‘원폭과 조선인’ 소책자를 7번 냈는데, 그걸 보곤 경악했지요. 나가사키에서 피해를 입은 조선인이 1만 명이나 된다니…. 소설로 써야 했습니다.”
▼ 군함도는 언제 처음 갔습니까.
“1990년에 오카 목사님을 처음 뵙곤 군함도의 소설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군함도에 갔습니다. 나가사키에서 50분밖에 안 걸려요. 어부의 배를 빌려 섬에 들어가서 3, 4시간 있다가 오는 거죠. 당시 그곳은 사기업 미쓰비시의 땅이라 정식 입도(入島)는 금지됐지만 철조망을 쳐놓고 일반인의 입도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 섬의 첫인상은 어떻던가요.
“저를 위한 ‘세트장’ 같더군요. 축구장 3배 크기의 섬에서 징용공들은 초속 8m로 떨어져 내리는 통을 타고 토하면서 해저 700m 갱으로 내려가 채탄 작업을 하다가 돌아와 한 공간에서 2교대로 잤습니다. 공원하고 묘지만 없지, 절벽 있겠다, 바다 있겠다, 유곽터 있겠다…. 소설가가 뭘 더 만들어낼 게 없는 거예요.”
▼ 군함도에 몇 번이나 갔습니까.
“9번 갔을 때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는 세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이상 해류로 섬에 못 들어간 적도 많아요. 맨 처음 오카 목사님과 들어가 섬을 살펴본 후, 목사님 도움으로 군함도 실제 피해자인 서정우 선생과 함께 가서 섬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요. 일제 강점기 피해자와 함께 현장 답사를 해서 쓴 소설은 ‘군함도’가 유일할 겁니다.
그곳에서 뭘 입고, 뭘 먹고, 뭘 덮었나…맨 꼭대기에 있는 신사(神社), 일본인 숙소 아파트, 갱도 입구를 함께 가면서 설명을 듣는 거예요. 그런데 배고팠다는 얘기를 참 많이 하셨어요. ‘맞는 것보다 배고파서 고통스러워했다’ ‘너무 고달파서, 저쪽에 조선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자살하려 했다’며 우시는데 통곡이 나올 것 같더라고요. 소설 첫 문장 ‘저쪽이 조선이다’는 그분이 만들어준 겁니다.”
한수산 필화사건
▼ 그분이 주인공인가요.“서 선생은 15세 때 군함도에 들어간 소년 징용공으로 이듬해 그곳을 나오셨는데, 그분의 에피소드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눠줬어요. 아쉽게도 2007년에 돌아가셨어요. 취재에 큰 도움을 준 분 가운데 지금 살아계신 분이 없어요. 조총련계 박민규 선생에게도 실생활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때 그분들이 70대였는데, 벌써 세월이 얼마예요.”
▼ 서정우 선생은 군함도를 탈출한 건가요.
“1년 정도 군함도에 있다가 깊은 병이 들어 의식불명 상태에서 나가사키 병원으로 후송됐대요. 폐도 하나고, 콩팥도 하나고, 몸이 허약한 분인데 병이 낫곤 조선소에서 일하다 나가사키에서 피폭됐지요. 그 후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아 무료로 치료를 받고 약간의 보상을 받아 살아가셨어요. 학교 수학여행단에게 원폭체험기 교육을 하시곤 했는데, 학생들에게 “우리가 너희들 아버지, 할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호통을 치면 어떤 애들은 그냥 울고, 배포 있는 애들은 ‘우리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라면서 울었다더군요.”
▼ 원폭 취재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일본인 피폭 피해자들을 만났어요. 미군에게 검증 대상으로 선발돼 살점 떼이고 머리칼 뽑히며 검사받느라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미국이 원폭의 위해성 실험을 제대로 안 하고 일을 저질렀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소설은 허구인데도 많은 취재가 필요하군요.
“소설 쓰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친구가 돼야 합니다. ‘부초’를 쓸 때도 그냥 서커스단 천막 속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구경꾼처럼 갔다가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자꾸 가고, 친해져서 그 사람들 자는 여관에서 잠도 같이 자고 하다 보면 누군가가 결정적으로도와주는 순간을 만나요.”
▼ 어떤 순간입니까.
“‘부초’는 3년 취재를 거쳐 썼는데,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밖에 내가 알던 서커스단원이 보이기에 그냥 내렸어요. 반가워서 밥을 같이 먹었는데, 돈이 없어서 피를 팔고 돌아가는 길이래요. 호적이 없는 아이였어요. 내연녀인 엄마가 호적에 못 올리는 바람에 군대도 안 가고…. 걔가, 자기네가 쓰는 은어도 모르면서 무슨 소설을 쓰겠냐며 알려주는 겁니다. 모기 쫓으며 맥주 마시던 날에는 서커스단 난쟁이들 얘기를 해줬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위장병이 생겨 카스테라를 구슬처럼 만들어 먹는다는 말도 들었죠. 내밀한 이야기는 관계가 무르익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써야 한다’


“지극히 운명적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진 이듬해(1981)에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다 보안사령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대머리 까진 놈이 모자를 쓴다고 우리가 대머리인 줄 모르냐’ ‘완장 찬 권력이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대목이 문제라는 거죠. 제 소설이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는데, 그게 기소가 되겠어요? 일주일 못 돼 풀려났지만 고문으로 정신착란이 왔습니다. 그때 보안사령관이던 노태우가 5공화국에 이어 대통령이 되자 ‘이곳이 내 조국인가’ 싶었지요. 노태우 집권기만이라도 외국으로 나가 있자고 마음먹었습니다.”
▼ 왜 일본이었습니까.
“내가 영문과(경희대)를 다녔지만 미국 가서 영어 하고 다닐 생각하니까 싫더라고. 중국으로 갈까도 했는데 당시 중국과 국교가 없었어요. 꿩 대신 닭이라고 대만엘 가봤는데 일본 식민지 잔재가 있고. 그래서 싫어하던 일본에 간 거죠. 이 참에 일본에 살면서 내 몸으로 일본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 일본 체류가 역사소설을 쓴 배경이 됐군요.
“그보다 필화사건을 겪으며 제 문학적 관심의 폭이 넓어진 겁니다. 말하자면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반공포로 이야기, 물자 약탈을 위해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을 그렸죠.”
▼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문화 분야는 다 던지고 일해야 해요. 가산탕진하며 일해도 신이 밥 굶게 안 만들어요. 그렇게 해도 ‘일’ 하나는 남잖아요. 이번에도 ‘전작보다 낫다’는 게 남으니까 기쁩니다.”
▼ 일본에서 생활은 어떻게 꾸렸습니까.
“기적이 일어나요. 어느 신문에 ‘한수산 작가가 7년 전 보안사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일본으로 이민 갔다’는 오보가 났어요. 당시 일본은 이민을 받는 나라가 아닌 데다, 저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채 떠났는데 말예요. 그러면서 새로 나온 책이 60만 부 넘게 팔리고 그 전에 나온 책들도 함께 사랑받으면서 그걸로 살았어요. 독자가 ‘일본에서 사람같이 일하고 오라’고 성원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뭔가 한국 소설에 도움이 되는 걸 만들어야 하겠구나’ 싶어 44세에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1988년 8월에 가서 1992년 9월에 돌아왔어요. 딱 (노태우) 대통령 임기 동안만 나가 살았던 거죠. 처음에는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취재를 하면 할수록 ‘당사자가 써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원폭, 하시마 섬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
▼ 일본 문헌 취재도 많이 필요했겠습니다.“조선인 문제를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나 르포라이터들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군함도 유곽 3개 중 하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이 가던 곳이란 기록을 봤습니다. 1991년쯤 받은 하시마 화장장 기록에서 ‘음독 투신자살한 유곽의 조선 여자’를 발견하고 소설 속 인물도 구상했지요. 군함도가 폐허 관광상품으로 부각되면서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늘어 하시마 소학교 교가도 찾았습니다.”
▼ 원폭 피해자 얘기도 기록이 근거인가요.
“피폭 후 나가사키에 구호대로 들어간 일본인들이 죽은 사람과 부상자들을 분류하면서 신음하던 조선인은 버렸다고 해요. 작가 요시무네 미치코의 기록과 화가 마루키 부부의 그림을 보면 ‘물, 물…’ ‘어머니, 어머니’ ‘사람 살려’라고 조선말로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다 버렸다는 거예요. 살 수 있었던 많은 조선인이 그렇게 죽어간 거죠. 자료를 볼수록 소명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소설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허구인지요.
“인물과 구성은 허구이고, 그것을 엮어낸 모든 에피소드는 사실입니다. 어느 에피소드 하나 상상으로 만든 게 없어요. 갱 안에서 죽은 징용공 창수의 시신을 끌어올리며 ‘올라가자, 창수야! 올라가’ 하는 장면도 규슈의 관습을 소설화했죠. 오늘이 아닌 시대의 이야기를 그려내려면 철저하게 기록이나 자료에 의거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없고, 어떤 감동도 끌어낼 수 없습니다.”
▼ 소설 속 나가사키 피폭 현장에서 조선인들이 구호에 나선 대목은 비현실적입니다.
“사실이에요. 자기 살기도 바쁜데,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도와요. 이게 소설의 핵심일지도 몰라요.
집사람의 일본 친구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도서관에서 아사히신문이 펴낸 ‘원폭전후’라는 증언집을 구해 보내줬는데, 거기에서 ‘구원대의 주체가 돼 일해준 젊은 조선 징용공 제군의 활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미쓰비시 조선소 간부 히라다 히카리)는 증언을 보고 감정이 복받치더군요. ‘그랬구나, 조선인 징용공들은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을 택했구나’ 하는 감동이었습니다.”
▼ 아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 군함도를 가는 설정도 좀….
“그건 장모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전쟁 중 장인어른을 수소문하다 백령도 부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살던 장모님이 아내를 업고 찾아갔다고 하신 데 착안했습니다.”
▼ 춘천고 상록회 기록도 허구 같던데 참고문헌을 밝혀뒀더군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전 의식이 고양되던 학생들을 구속한 사건인데, 인터넷 사이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데이터베이스’에서 심문 조서, 재판 기록을 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을 위해 부인과 각방을 썼다는 학생의 진술도 나와요.”
“이분법 넘어서야”
▼ 첩자들 얘기가 많아 인상적이었습니다.“한국 소설이 이분법으로 사람들을 나누는 게 싫었어요. 선과 악, 부자와 빈자 이렇게 나누는데, 그 사이에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문학평론가들도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한발 나아갔다고 평가하더군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이 작품이 어떻게 읽히길 바랍니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때 그 싸움을 두려워해선 안돼요. 그 가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 있어야 해요. 독자들이 한일 과거사의 해결에 나설 수 있기를, 우리의 역사가 분노를 넘어 용서의 지평을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간 뭔가에 포획돼 누군가에게 잡혀서 써왔는데, 이젠 좀 자유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