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당쟁과 불안 친자살해로 귀결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의 세자 지위를 박탈했다. 아들은 창덕궁 휘령전 앞에 둔 뒤주에 갇혔다. 여드레 후 28세 아들은 숨을 거뒀다.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미증유의 사태였다.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201612012016년 11월 23일문자향(文字香) 일깨운 지극한 서자 사랑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겐 ‘우아(佑兒)’라고 부른 아들이 있었다. 서자였다. 이 아들 김상우(金商佑·1817~1884)는 김정희가 32세 때 기생 첩 초생이 낳았다. 전하는 얘기로 초생은 김정희의 경저(京邸, 서울집) …
201611012016년 10월 28일편지로 잘못 일깨운 ‘한 시대의 아버지’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을 모를 사람은 없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그가 있었다. 그는 요즘말로 ‘꼰대질’ 하는 선비가 아니었다. 유유자적하는 신선과도 같았다. ‘도산에서 뜻을 말하다’라는 시를 보라. 그러한 풍모…
201610012016년 09월 20일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쳐 자신의 학문을 후세에 전한 경우는 드물다. 자식을 직접 가르치다 보면 부자의 정(情)이 엷어지기 쉽다. 아들 사도세자의 교육에 지나치게 열중하다가 현왕(賢王) 영조는 부자간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다. …
201609012016년 08월 18일“갓 자란 난초, 티 없는 구슬 빈산에 널 묻다니…”
아마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16세기의 큰선비였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익혔고, 여섯 살에 한시(漢詩)를 능숙하게 지었다. 소년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
201607012016년 06월 20일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17세기의 학계를 뒤흔든 풍운아였다. 논란에 휩싸인 그의 저술은 훗날 ‘서계집(西溪集)’(16권 8책)으로 정리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변록(思辨錄)’은 논자들의 뜨거운 관심거리였다.그가 활동하…
201606012016년 05월 24일“진정한 孝는 經世濟民” 실천으로 불 밝힌 實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당파 싸움은 밥그릇 싸움이다. 벼슬자리는 적은데, 한자리 하고 싶은 사람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상도 이념도 다 중요하지만 먹지 않고도 살 수…
201605012016년 05월 02일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이순신의 인기는 여전하다. 연전에는 영화 ‘명량’(2014)이 큰 인기를 끌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2001)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도 연달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순신을 향한 우리 국민의 사…
201604012016년 03월 25일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유희춘이 노년에 쓴 ‘미암일기’ 원본(보물 제260호)과 그의 문집 ‘미암집’ 목판. 문화재청 홈페이지사화(士禍)는 15세기 말 조선 연산군 때 시작돼 16세기 전반 명종 때까지 4차례나 거듭됐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
201602012016년 01월 27일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기세 좋게 잘나가다가도 갑자기 맥없이 꺾이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그럴 수가 있다. 그럴 때 위기에 빠진 가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선 후기에도 한순간에 끝없이 추락한 이름난 사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
201601012016년 0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