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60·본명 정주일)이 돌아왔다! 이건 분명 연예계의 큰 뉴스다. 지난 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사흘 동안 이씨는 ‘꿈에 그리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다. ‘꿈에 그리던’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동안 세종문화회관이 그의 공연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하루 2회 공연인데 매회 꽉꽉 들어찼다.
기자가 공연장을 찾은 것은 공연 둘째날인 11월30일. 공연(오후 4시30분)시간이 임박했는데도 공연장 안팎은 매우 어수선했다. 매표구 앞에선 암표상들이 현장에서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표 다 팔렸다”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었다. 출입문 앞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전화 예매를 했던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담당 직원과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자리가 제때 제대로 안 나자 고성이 오가고 때로 욕지거리까지 터져 나왔다.
공연은 제목(‘이주일 울고 웃긴 30년’)에 걸맞게 파란만장했던 이씨의 삶을 축약해 극화시킨 것이었다. 첫 장면은 이씨의 무명 시절 일화. ‘남진 쇼’에 보조 사회자로 출연하기로 돼 있다가 못 생겼다는 이유로 단장으로부터 퇴짜를 맞는 장면이다.
이씨는 2시간 동안 녹슬지 않은 춤과 노래 솜씨, 그리고 폭소를 자아내는 즉석 개그를 선보였다. 그러나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관객들은 그의 무명시절 설움과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씨 인터뷰는 12월4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진행됐다. 수많은 바위와 소나무들이 자리잡은 널따란 정원,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밭, 그리고 축사가 눈에 들어왔다. 약 1500평 크기라고 한다. 그는 공연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몸살이 났다며 훌쩍거렸다. 무대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의 나이가 비 갠 후 풍경처럼 또렷해졌다.
이씨는 공연 얘기부터 꺼냈다.
“원래 그 대목은 안 집어넣으려 했는데 제작진이 넣자고 해 할 수 없이…. 우리 아이 말입니다. 집사람에게는 속였습니다. 공연 보러 오겠다는 걸 말렸는데, 보고 싶다고 기어이 와서 그 장면을 보다 쓰러졌어요. 바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당신만 생각하고 내 생각은 안 하냐며 울부짖더라고요.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는데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씨의 부인은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지 퇴원한 후에도 집에서 누워지낸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그 대목’이란 7대 독자인 아들의 죽음을 극화한 장면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아들은 91년 유학중이던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때부터 그는 수염을 길렀다. “깨끗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언론 보도를 보니 6회 공연 모두 매진이었다고 하던데, 관객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2만4000명쯤 됐을 겁니다. 3층까지 좌석이 약 4000석인데 하루 2회 공연이니. 개관 이래 신기록이라고 해요. 첫날 공연장 밖에서 난리가 났어요. 전산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표가 중복된 겁니다. 600여 만원을 물어줬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돈 받고도 안 가는 겁니다. 환불받으러 온 게 아니고 공연 보러 왔다며. 사무실 의자를 다 동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단에 앉아 봤다니까요.”
그가 무대에 오른 것은 80년대 초 대한극장 공연 이후 20년 만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초조하고 긴장했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이 주는 중압감도 컸지만 더 큰 이유는 역시 나이였다.
세종문화회관 정복(?)
“힘들어요. 예전엔 여건도 좋지 않았잖아요. 기차 버스로 이동하며 하루에 3∼4회 공연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는데 요즘은 여건도 좋은데 힘들더라고요.”
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는 80년대부터 꾸준히 세종문화회관의 문을 두드렸다. 대여섯 차례 공연 신청을 했는데 매번 허가가 나지 않았다. “회관의 격이 떨어진다” “좋은 시설물 버린다” 따위의 이유로 심의위원회가 그의 공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페라를 공연하면 중산층 이상이 오기 때문에 (무대가) 안 버리고, 우리가 공연하면 서민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다 버린다는 거예요. 시민이 갈 수 있는 데가 세종문화회관 아닙니까. 시민 누구나 갈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대학교수라는 녀석들이 그런 결정을 해요. 내가 그래서 이번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씨 공연을 기획한 ‘르네상스 21’에 따르면 제작비로 6억원이 들었기 때문에 매회 매진이긴 했지만 크게 남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연 수익금은 전체 제작 경비를 약간 넘은 정도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공연 중엔 ‘이주일에게 영향을 끼친 100인’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다. 그중 전·현직 대통령들의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이씨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과는 80년대 후반 인연을 맺었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자선공연을 힐튼호텔에서 했는데 그때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김대통령이 공연장에 들러 격려를 해준 일이 인연이 됐다는 것이다.
전두환 전대통령과는 축구로 인연을 맺었다. 이씨와 절친한 박종환 전 감독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이룬 일이 계기였다. 그 인연으로 훗날 전씨가 백담사에 유배됐을 때 이씨가 위로차 방문했고 전씨는 이씨가 아들을 잃었을 때 상가에 찾아와 위로하는가 하면 그의 두 딸 결혼식 때도 참석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군 장성으로 있을 때 알게 됐다. 노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지낼 때 이씨가 그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갔다고 한다.
─ 말이 난 김에 묻겠는데요. 5공 시절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정지 당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잘못 알려진 거예요. 대학생들이 만든 말이에요. 그때 몇 개월 방송에 못 나간 건 그것 때문이 아니고 ‘헤이’ 때문에….”
─ ‘헤이’요?
“그거 있잖아요. 제가 추던 이상한 춤요. 그 춤 때문에 전국적으로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전국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애들이 전부 그 짓 하고 다녔으니까. 수업시간에 선생이 불러도 그 짓 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하교길에서도 전부 그 짓 하면서 걸어가고, 부모님이 심부름 시켜도 그 짓 하면서 가고…”
어린 시절 그의 코미디에 배를 잡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다. 이씨 특유의 오리 궁둥이 춤인 ‘헤이’ 춤을.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길거리에서 ‘헤이’를 외치며 이씨의 몸짓을 흉내냈던가.
“애들이 말투까지 그대로 따라했지요. 그것 때문에 전국에서 교장단 회의가 열렸다는 것 아닙니까. 교장단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고, 방송국에도 넣었어요. 애들 다 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요즘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때 초등학교 아이들이 지금 30대인데 내 춤 때문에 버린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요. 내가 책임져줄 테니.”
─ 공연 때 김대통령을 소재로 성적인 농담을 하던데요. 말리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말릴 이유가 없는 거죠. 이것 못하고 저것 못하면 할 게 뭐 있습니까. 만약 그걸 문제삼는다면 앞으로 더 진한 것을 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더라고요. 아, 괜찮지요. 나이 많은 대통령이란 걸 세상이 다 아는데. 그분이 그런 것(발기)과 관계없다는 게 뭐가 나쁜 얘기냐 말입니다.”
박근형은 안 때리고…
이씨는 무대에서 소개한 ‘100인’ 중 특별히 박근형 박종환 하춘화 세 사람의 사진을 크게 내걸어 남다른 인연을 강조했다. 탤런트 박근형씨는 이씨가 무명 시절 따뜻한 마음을 건넸던 사람이고 축구 감독 박종환씨는 이씨의 고교 시절 축구부 동기였다. 가수 하씨는 이리역 폭발 사고 때 이씨 등에 업혀 살아난 사람이다.
박근형씨와 관련된 일화 한 가지. 어느 지방 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씨가 사회자고 박씨는 초대 손님이었다. 공연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 두 사람은 박씨의 친구와 함께 낮술을 했다. 간단하게 한다고 시작한 술자리가 한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돼 무대에 오른 이씨는 취기를 가누지 못해 비틀거렸다. 관객들은 연기인 줄 알고 폭소를 터뜨렸다. 이어 이씨의 소개로 박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박씨 또한 심하게 비틀거렸다. 급기야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엎어지는 추태가 벌어졌다. 그제야 눈치를 챈 관객들이 야유와 욕설을 보냈다. 극장엔 일대 소란이 일었고 공연은 중단됐다. 흥분한 일부 관객들이 무대로 몰려들었다.
“박근형씨 친구가 자꾸 ‘한잔 더’ 하는 바람에 그리됐어요. 그런데 관객들이 박근형씨는 안 때리고 나만 때리더라고요.”
이씨의 친구 가운데 빼놓으면 섭섭한 사람이 바로 박종환 축구감독이다. 두 사람은 춘천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함께 뛰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교 졸업 후에도 이어졌다. 박씨는 이씨가 유랑극단을 떠돌던 무명 시절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을 보여줬다.
“어려울 때 쌀 몇 말, 미역 몇 줄기가 얼마나 큽니까. 집사람 출산을 앞두고 공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었어요. 어렵던 때라 집에 쌀도 없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쌀과 미역을 보내준 겁니다. 집사람은 그 덕분에 산후조리를 잘 했습니다.”
─ 축구부 시절 포지션은?
“라이트윙이었어요. 박종환씨는 풀백이고.”
─ 잘 하는 선수들은 특차로 진학하지 않았어요?
“박종환씨는 경희대 특차로 뽑혀갔고 나는 특차 자격 없이 그냥 올라갔는데 등록금을 안 내는 바람에 입학을 못했습니다.”
─ 운명의 갈림길이었군요. 그때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가 축구를 계속했더라면….
“지금도 축구를 했겠죠.”
─ 집이 어려워 등록을 못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아버지가 마련해 줬는데 하숙집에서 노름하다 날려버렸어요. 네 명이 ‘섰다’를 했는데 하룻밤에 다 날렸어요. 그길로 군에 입대해버렸어요. 아버지한테 매 맞을 것 같아….”
─ ‘섰다’ 때문에 군에 입대했다?
“예.”
─ 아버지한테 엄청 맞을 일이었군요.
“그럼요. 군에 가 2년 동안은 휴가 나와도 집에 들르지도 못했어요.”
─ 아버지가 엄하셨나요.
“예. 공무원이었는데 아주 엄하셨어요.”
─ 군에서 문선대 활동을 했죠?
“그게 연예 활동의 계기가 된 것이죠. 61년인데 강원도 화천 최전방으로 배치됐어요. 하도 힘들어 좀 편한 데 없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문선대가 있다는 겁니다. 문선대는 민가에 있었는데, 시내를 돌아다니며 머리도 맘대로 기르고 사복도 입을 수 있었어요. 거기를 찾아가 거짓말을 했지. ‘서영춘 쇼’ 사회를 보다 왔다고. 해볼 수 있는 게 뭐냐고 묻기에 서영춘 흉내를 냈어요. 그랬더니 엉터리라고 ‘빠따’를 쳐요. 그때 문선대에서 연출을 맡았던 친구가 지금 한국화장품 회장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고대 재학 중 군에 들어왔어요. 상병이었는데 그 친구가 날 잘본 모양인지 부대장에게 얘기한 거라. 엊그제 왔던 놈 다시 불러내자고, 코미디 소질 있는 놈이라고. 그게 시작입니다. 그 친구는 한 달에 한두 번 서울 출장을 갔는데 서울 갈 때마다 당시 시민회관에서 하던 ‘서영춘 쇼’ ‘배삼룡 쇼’를 녹음해와 내게 테이프를 건네줬어요. 그걸로 연습하고 1년에 두세 번 하던 전방 위문공연 때 그대로 재연해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남 흉내로 출발한 이씨는 뒷날 자신의 코미디 세계를 창조했다. ‘헤이’ 춤과 더불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일단 한 번 와 보시라니까요’ ‘따지냐’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등 숱한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중 대표작은 아무래도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일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경쟁의식을 무장해제시키는 그 어눌한 고백 한마디가 단숨에 그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단점으로 여길 만한 것을 오히려 성공 비결로 활용한 셈이다.
─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됐는데 얼굴 철학 같은 것이 있다면….
“사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얼굴에 국한시켜 한 얘기가 아닙니다.”
─ 하나의 상징이라는 얘기인가요?
“예. 잘 생긴 사람들만 으스대며 사는 세상을 꼬집은 겁니다. 잘 생긴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걸로 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고 뭔가 보여주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그런 현실을 표현한 거죠. 그 표현이 평소 기가 죽어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간 거예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와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까요’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따지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윗사람이 말할 때 아랫사람이 대꾸하면 ‘너 따지냐’ 하고 눌러버리잖아요. 그런 권위의식을 뒤틀어 말한 거죠.”
─ 상당한 풍자인데요.
“예. 풍자입니다, 풍자. 내가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내 얘기를 한 거예요. 외모만 두고 얘기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추남으로 보입니까.”
─ 어쨌든 스캔들은 한번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웃자고 한 얘기인데 이씨는 예상치 못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한때 성형수술도 생각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 때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수술비를 대준다고 해 공짜로 좀 고쳐볼까 하고 의사를 찾아갔더니 ‘당신은 그냥 이걸로 살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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