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구광모 회장 이례적 쓴소리에 LG그룹 ‘선택과 집중’ 드라이브

[Focus] 예측 불허 트럼프에 ‘사업구조 고도화’ 꺼내 든 LG그룹

  • 유수진 연합인포맥스 기자 sjyoo@yna.co.kr

    입력2025-06-09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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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번째 창립기념일에 ‘작심 발언’ 쏟아내

    • “사업구조 변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해”

    • 글로벌 불확실성 확대에 실적 악화까지 겹쳐

    • ‘구조적 위기’ 지적에 잇따라 사업 재편

    구광모 LG그룹 회장(가운데)이 2024년 9월 25일 경기 이천시 LG인화원에서 열린 사장단 워크숍에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 권봉석 LG 부회장(오른쪽) 등과 참석했다. ㈜LG

    구광모 LG그룹 회장(가운데)이 2024년 9월 25일 경기 이천시 LG인화원에서 열린 사장단 워크숍에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 권봉석 LG 부회장(오른쪽) 등과 참석했다. ㈜LG

    “일부 사업의 경우 양적 성장과 조직 생존 논리에 치중하며 경쟁력이 하락해 기대했던 포트폴리오 고도화의 모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3월 27일 경기 이천시 LG인화원에서 열린 올해 첫 사장단 회의에서 작심한 듯 쓴소리를 했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진(CEO) 3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구 회장은 “절박감을 느끼고 과거의 관성, 전략과 실행의 불일치를 떨어내자”고 강력히 주문했다.

    “변화와 생존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이날은 LG그룹의 78번째 창립기념일이었다. 하지만 그룹 총수의 입에서 여러 차례 “위기”란 단어가 나오면서 잔치 분위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 회장은 CEO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대신 변화를 위한 주도적 행동을 촉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회의 시간 대부분은 LG가 엄혹한 경영 환경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할애됐다. 참석 CEO들 모두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논의에 임했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돌아보면 경영 환경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난 반면, 우리의 사업구조 변화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각 계열사 CEO에게 조직의 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변화를 주도하라는 과제도 줬다. 경영진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해야 하는 것’ 중심으로 대안을 구체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게 골자다.

    구 회장은 이날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발언을 연이어 쏟아냈다.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며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시급함을 강조한 것이다. 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공석에서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던 모습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날만큼은 “생존”이나 “골든타임”같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단어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해당 내용은 LG그룹이 배포한 참고 자료를 통해 회사 안팎에 알려졌다. 이는 구 회장이 사장단에게 쓴소리한 것 못지않게 매우 드문 일이다. 현재 LG는 그룹 차원에서 분기당 한 차례씩 사장단 회의를 열고 있다. 계열사 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경영 현안을 공유하고 미래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룹의 방향성이 회의 주제인 만큼 비공개로 진행하고, 내용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를 두고 “구 회장의 메시지를 회의에 참석한 CEO들뿐 아니라 LG그룹 임직원 모두에게 공유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는 해석이 나왔다. 구 회장이 주문한 변화가 비단 사장 혼자만의 의지로 완수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임직원이 공감하고 힘을 합쳐야만 추진할 수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구 회장이 체감하는 위기의식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LG그룹 안팎에 알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고(故) 구본무 선대 회장 신년사 인용한 까닭

    그렇다면 구 회장은 왜 지금 ‘위기론’을 꺼내 들었을까. 재계에서는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그에 따른 미·중 무역전쟁 심화 등 글로벌 불확실성 확대를 가장 먼저 꼽는다. 글로벌 정치, 경제 환경 변화에 발맞춰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금세 뒤처지거나 도태될 수 있단 위기감에서 비롯된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때를 놓치면 그룹 전체의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각각 중국·일본·미국으로 떠나 불확실성 최소화를 위한 돌파구 마련에 나선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출장은 사업장 방문과 임직원 격려 등 현장 경영보다 현지 정부 및 기업과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정부와의 민관 합동 대응도 예고됐다. 정부 당국은 4월 4대 그룹 총수들을 불러 제1차 경제 안보 전략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의견을 들은 바 있다.

    이날 구 회장이 인용한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 회장의 과거 신년사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해당 신년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했을 때인 2017년 나왔다. 구 회장은 부친의 과거 신년사를 자신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했다. 당시와 지금은 ‘예측 불허’ 트럼프 대통령으로 인해 글로벌 통상과 무역, 외교 분야의 불확실성이 전례 없이 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구 회장은 “당시도 올해와 같이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경제 질서의 재편이 본격화하는 시기였다”며 “선대 회장께선 경쟁 우위 지속성, 성과 창출이 가능한 곳에 ‘선택과 집중’으로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 사업구조와 사업 방식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 강조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은 2월 24일(현지 시간)부터 나흘간 인도를 찾아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벵갈루루와 수도 뉴델리 등에서 LG 사업장을 둘러봤다. ㈜LG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은 2월 24일(현지 시간)부터 나흘간 인도를 찾아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벵갈루루와 수도 뉴델리 등에서 LG 사업장을 둘러봤다. ㈜LG

    실제로 구본무 선대 회장은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경영 환경을 볼 때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는 의미가 없다”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길을 개척한다는 각오로 사업구조와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LG그룹이 영속하기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로 ‘사업구조 고도화’를 제시한 것이다. 특히 구 선대 회장은 사업별 상황을 고려한 접근을 당부했다. “변화에 뒤처지거나 경쟁력 회복이 어려운 사업들은 근본적으로 사업 방식을 바꿔야 한다”면서도 “성장 사업은 힘을 모아 제대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구 회장의 이번 메시지는 성장세가 한풀 꺾인 LG그룹 전반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도 엿보인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업구조를 변화시켜 위기 극복에 나서자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구 회장의 바람대로 LG그룹의 사업 전반이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 우위를 갖춘다면 외부 환경의 변화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체 경쟁력을 통해 외부의 파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 회장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이자 방향성으로 볼 수 있다. 

    LG그룹은 아직 이 같은 여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구 회장은 이를 “구조적 위기”라고 칭했다. LG그룹은 장기화하고 있는 석유화학 불황과 전기자동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의 여파로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 등 화학 계열사의 실적이 크게 악화한 상태다. 지난해 화학 계열 매출은 55조7000억 원으로 전년 62억1000억 원 대비 10.3% 줄었다. 수익성 지표인 영업이익률도 4.9%에서 2.5%로 반토막 났다.

    그나마 LG전자로 대표되는 전자 계열사가 선방하며 체면치레했지만, 이들의 실적도 미국의 ‘관세 폭탄’ 영향이 본격화하면 장담하기 어렵다. LG전자는 글로벌 12개 생산기지를 적극 활용해 관세 리스크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소비심리 악화와 가격경쟁력 상실 등이 불 보듯 뻔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LG그룹은 방위산업과 조선, 원전 등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이른바 ‘잘나가는 사업’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 사업 포트폴리오상 마이너스(-) 요인만 있는 만큼 수혜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이 역시 구 회장이 느끼는 위기감을 가중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LG그룹 내부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배터리, 주력 사업으로”…신뢰 재확인

    구 회장은 이번에 다시 한번 ‘선택과 집중’을 강조했다. 사업구조 재편이 미래 성장성이 높은 사업은 적극 키우고, 그렇지 않은 사업은 과감히 끊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업을 다 잘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렇기에 더더욱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8년 전 구 선대 회장의 신년사와 중첩되는 대목이다.

    자본의 투입과 실행의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사업의 기준으로는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와 ‘진입장벽 구축’ 등을 제시했다.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사를 따돌릴 수 있는 사업이 선택과 집중 대상이다. 이 기준은 미래 경쟁력의 원천인 연구개발(R&D) 투자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 회장은 현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장기적 관점에서 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느냐가 사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 회장이 배터리 사업에 대한 육성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에서도 나타난다. 구 회장은 3월 26일 ㈜LG 주주총회에서 “배터리와 같은 산업은 미래의 국가 핵심 산업이자 그룹의 주력 사업으로 반드시 성장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전기차 캐즘의 여파로 적자를 거듭하고 있는 사업을 콕 집어 굳건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다. 구 회장은 “시장과 기술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 공정 기술 등에서 혁신 방안을 지속해 만들어나가겠다”고도 약속했다. 지금은 어렵지만 조만간 반등이 시작될, 미래의 LG그룹을 먹여 살릴 핵심 사업으로 배터리 부문을 보고 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LG그룹은 향후 부진한 사업 정리 등 변화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에 구 회장이 2018년 취임 이후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올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몇몇 계열사가 즉각적 행동에 나서고 있다. 

    LG전자는 전기차 캐즘에 발목 잡힌 전기차 충전기 사업을 접고, 성장세가 이어지고 있는 냉난방공조(HVAC)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기로 했다. 2022년 전기차 충전기 전문기업 하이비차저(옛 애플망고)를 자회사로 인수하며 사업을 본격화한 지 3년 만의 결단이다. 이에 시장 성장 지연과 가격 중심 경쟁 구도 심화 등 사업 환경이 악화하자 법인을 아예 청산하고 관련 업무를 수행하던 구성원은 전원 LG전자 내 다른 사업부로 전환 배치하기로 했다. 특히 가정용·상업용 에어컨과 칠러, 히트펌프, 데이터센터 냉각 솔루션 등 HVAC 사업에 집중한다.

    LG화학은 바닷물을 산업용수로 정화하는 역삼투막(RO멤브레인) 필터를 만드는 워터솔루션 사업부 매각에 나섰다. LG화학은 앞서 통풍 치료제 티굴릭소스타트의 글로벌 임상 3상 중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임상 데이터는 우수했지만, 향후 상업화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투자한 2000억 원보다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한 조치다.

    LG에너지솔루션 충북 오창 에너지플랜트에 설치된 전기차용 충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스템. 해당 설비는 폐배터리를 재사용해 만들었다. ㈜LG

    LG에너지솔루션 충북 오창 에너지플랜트에 설치된 전기차용 충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스템. 해당 설비는 폐배터리를 재사용해 만들었다. ㈜LG

    LG에너지솔루션 역시 LG화학, LX인터내셔널 등 국내 기업과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추진하려던 11조 원 규모의 ‘배터리 밸류체인 프로젝트’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3년간 이어진 전기차 캐즘으로 급변한 시장 상황과 투자 여건을 고려한 결과다. LG화학도 정부 차원의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에 발맞춰 자산 매각과 사업 재편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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